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40
#139화
진태경 일행을 태운 육두마차가 출발하고 채 한 시진도 되지 않아 태원 거리는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두마차를 둘러싼 오십 기의 기마, 그리고 형형한 눈빛을 뿜어내는 무인들 때문이었다.
“저건…….”
“태원진가다!”
“와아아아!”
“아까는 산서잠룡이고 이제는 태원진가야? 오늘 눈 호강 제대로 하는구먼.”
마차 안,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듣고 있던 진위경의 귀가 쫑긋 섰다.
“무경아, 방금 들었느냐?”
진무경이 하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들었습니다.”
“위팽, 자네도?”
위팽 역시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들었건 말건 신경 안 쓰시잖습니까. 그냥 말씀하십쇼.”
“자넨 말을 왜 그렇게 하나? 그러면 속이 시원해?”
“속이 시원하긴요, 지금도 화병 나게 생겼는데요.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방금 사람들이 그러는데 태경이가…….”
“와, 미치겠네.”
진위경은 위팽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성주와의 오찬에 참석하러 간 모양일세. 지금쯤이면 도착했을지도 모르고.”
“도착했겠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린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니겠지?”
“삼공자가 무슨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 테니 걱정일랑 접어 두십시오.”
“글쎄, 워낙 자유분방한 아이라.”
위팽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유분방이라뇨. 이 경우는 천방지축 아닙니까?”
“크흠.”
“그냥 사고 칠 것 같아서 걱정된다고 말씀하시면 되지, 뭘 또 그렇게…….”
“그 입 다물게.”
“예. 그럼 아무 말도 안 할 테니까 정 걱정되시면 저기 있는 이공자한테 물어보십쇼.”
심드렁한 대답에 진위경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옮겨 갔다.
사실 위팽의 조언은 적절했다. 이 중에서 현 산서 성주와 한 번이라도 대면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진무경뿐이니까.
‘더 말을 안 해 줘서 문제지.’
산서 성주와의 오찬을 그냥 ‘개 같았다’는 한마디로 일축한 진무경은 그 후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무경아, 혹시…….”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단칼 같은 대답에 진위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진무경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비위가 좋다면요.”
“……비위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황족이며 성주가 주최하는 식사 자리다. 성대한 연회에 구더기가 들끓는 음식이라도 나온단 말인가?
순간 어리둥절해진 그의 시선에 서서히 일그러지는 진무경의 얼굴이 보였다.
“있습니다. 벌레만큼 징그러운 놈이.”
* * *
성주가 머무른다는 이곳, 산서성부(山西城府)는 저택의 형태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태원진가도, 얼마 전에 다녀왔던 항산검문도 상당한 규모였지만 이곳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 요새? 아니면 성?’
대륙 스케일이 큰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다.
나는 물론이고 청풍과 후기지수들도 입을 쩍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관리가 슬며시 웃는다.
“어떻소?”
“넓네요. 엄청나게.”
“능히 수천 명을 수용하고도 남으니 그럴 수밖에. 전시에 수성하게 된다면 십 년을 버틸 만한 곡식도 있다오.”
관리는 거대한 창고 몇 개를 차례대로 가리켰다. 저 안에 식량이 가득 채워져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 많은 곳에 전부 다요?”
“물론이오.”
강남 아파트 입주민처럼 자부심 넘치는 미소를 띤 관리가 말을 이었다.
“성부라는 곳은 전시를 대비하여 크고 단단하게 짓기 마련이지만, 본래 이 정도 크기는 아니라오.”
“그럼……?”
“이곳에 어떤 분이 사시는지 벌써 잊었소?”
“아.”
그랬지. 그냥 성주도 아니고 황족. 거기에 더해 정식으로 왕 작위도 가진 어엿한 임금님이 살고 있댔다.
“그럼 여기가 왕궁?”
“그런 셈이오.”
우리는 촌놈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이동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인과 시비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군기가 바짝 든 정예군들은 경계를 서거나 연무장에서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수준이 제법인데?’
가장 의외였던 점은 군사들의 질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이었다.
경계를 서는 인원 중 대부분이 레벨 20 전후였고, 제법 그럴싸한 갑주를 차려입은 장수들의 경우에는 일류를 가뿐히 넘겼다.
‘하긴, 버젓이 있는 무공을 굳이 익히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군대가 강성해지는 거니 장려해야 할 일이다.
나는 걸음을 옮기면서 계속 연무장을 곁눈질했다.
둥! 둥! 둥!
“찔러!”
“악!”
이미 해가 중천에 걸린 정오.
북소리에 맞춰 수백의 창날이 빛나고, 군사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모이고 흩어진다.
전법과 전술, 대형을 훈련받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한 단어가 떠올랐다.
‘레이드 팀.’
통일된 무기 종류.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맞춘 합(合)은 대규모 집단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개개인의 실력은 무림인들보다 떨어지겠지만.’
수십 대 수십의 싸움이라면 몰라도 수백 대 수백, 수천 대 수천의 전투가 벌어진다면 어지간한 절정 고수로는 전세를 뒤엎을 수 없다.
그게 바로 훈련된 집단의 무서움이다.
‘떨어지는 질은 물량과 훈련으로 메운다, 이건가.’
지난 수백 년간 광활한 영토를 지배해 왔다는 통일 제국답다.
그 자존심 강한 무림인들이 대국의 백성임을 인정하는 데에는 지금 같은 이유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거 뒀다가 어따 써. 엿 바꿔 먹나?’
당장 눈에 보이는 군사들만 수백이 넘어간다. 저 중에 일부만이라도 산서 북부로 보냈으면 적풍단은 진작 빤쓰런 했을 거다.
‘시벌, 누구는 죽을 고비 넘겨 가면서 그 고생을 했는데.’
무능한 공권력의 실체를 보자 갑자기 현자 타임이 찾아온다.
천하제일의 명검을 갖고 있으면 뭐 해. 검갑에서 뽑지 않으면 몽둥이나 다름없는데.
내심 욕을 퍼붓고 있을 때 관리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거의 다 도착했소.”
그의 말대로였다. 수십여 개의 기둥이 늘어선 긴 회랑의 끝,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양옆으로 긴장된 한숨이 흘러나온다.
“휴우우.”
“후우. 어떡해요, 정 소협? 나 너무 떨려요.”
“걱정 마시오. 내가 있잖소.”
“……지랄 염병하네.”
될 놈은 된다더니 그 와중에 어떻게 눈이 맞은 건지 모르겠다.
함께 빠따를 맞으면서 애정이 싹튼 건가?
‘이게 나라냐.’
솔로부대 투 스타로서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못하는 내게 경쾌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던 청풍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안에 왕이 있는 건가요?”
왕. 그 한 글자에 산서오문의 후기지수들이 입을 딱 벌렸고, 앞서 걷던 관리는 벌에라도 쏘인 것처럼 펄쩍 뛰었다.
“와, 왕이라니! 무엄하오!”
“어? 왕 아니에요?”
“왕이 아니긴! 당연히 왕이지!”
“그럼 왕 맞지 않아요?”
“아니, 그게 아니고……!”
이러다가는 둘 중 하나다. 관리가 고혈압으로 쓰러지거나, 역모죄를 들먹이면서 당장 연무장에서 훈련 중인 수백 명의 군사를 부르거나.
둘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 내가 중재에 나섰다.
“일단 좀 진정하시고, 그리고 청 공자.”
“예, 은인.”
“왕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전하라고 해야 돼요. 맞죠?”
마지막 질문은 관리를 향한 거다. 그가 청풍을 노려보며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무조건 그래야 하오!”
“아, 정말요?”
“휴, 그렇소.”
청풍이 맑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왜요?”
“……진 공자. 정말 이놈, 아니 이자를 데려가야겠소?”
“전 빼도 상관없긴 한데. 괜찮으시겠어요?”
관리는 잠깐 침묵했다.
청풍을 빼고 다섯 명을 데려가면 상부의 문책과 함께 직장이 날아갈 것이고, 청풍이 혓바닥 한 번 잘못 놀렸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이다.
잠시 후, 다시 입을 연 그의 얼굴은 십 년은 늙어 있었다.
“……그냥 갑시다.”
청풍이 활짝 웃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시간 되면 왕, 아니 전하한테 잘 말씀드려 볼게요.”
“그쪽 양반은 제발 입만 다물고 있어 주시오.”
관리가 간곡한 부탁과 함께 주의해야 할 점을 줄줄이 읊는 동안 우리는 마침내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척 봐도 엄청나게 크고 두꺼운 철문 뒤에서 두런두런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도지휘첨사, 화산파, 모욕?’
단편적인 단어들만 들어서는 도저히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다만…….
‘분위기는 영 아닌 것 같은데?’
마주 보며 밥 먹기에는 썩 좋은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든 그때, 철문 앞에 시립해 있던 이가 크게 외쳤다.
“산서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뵙기를 청합니다!”
그그긍.
외침과 동시에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지막 당부를 건넸다. 슬쩍 청풍을 곁눈질하면서.
“저 인간 주둥이만 막아 주시오.”
“……아, 예.”
정말 어지간히 걱정되나 보다.
* * *
들어가자마자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호화롭게 꾸며진 대전은 마법 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보던 넓은 탁자와 온갖 음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미리 와 있던 다섯 사람을 본 순간, 딱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조졌군.’
눈치 빠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다. F급 헌터로 눈칫밥을 하도 처먹다 보니 0.1초면 분위기 파악이 끝난다.
바로 지금처럼.
‘분위기 끝내주는데.’
다섯 사람을 중심으로 팽팽하게 조여든 공기가 느껴진다. 밖에서부터 심상치 않음을 느끼긴 했지만 생각 이상이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모두 빈손이기에 망정이지, 허리춤에 뭐라도 있었으면 당장 칼부림이 일어났을 거다.
“이거…… 손님이 오셨으니 해후는 이쯤에서 마칠까요?”
팽팽한 분위기를 흩어 놓은 것은 가냘픈 목소리의 사내였다.
아니, 사내가 맞나? 여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가냘픈 체구에 얼굴은 희었고 입술은 염료라도 바른 듯 붉다.
[Lv.22 홍진]그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강호의 후기지수답게 훤칠한 미남이시네. 내 듣기로는 오늘 태원진가에서 젊은 영웅이 온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이 인사를 할 타이밍이다. 나는 다섯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순간 안 좋았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진다. 불쾌와 비웃음의 흔적이 남아 있던 네 사람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덧칠해졌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이라면…….”
흑색 무복을 걸친 거한이 중얼거렸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상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던 그의 이름은 이풍, 머리 위에는 68레벨이라는 숫자가 떠다녔다.
‘군문(軍門)에 소속된 사람인가?’
첫 만남에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지만 풍기는 냄새가 그렇다. 자존심 강하고 강직한 군인. 그것이 그의 첫인상이었다.
‘이풍, 이풍이라. 68레벨이면…… 초일류 정도?’
그의 이름과 레벨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겼을 때쯤 나머지 세 사람의 반응이 이어졌다.
“흠. 저 친구가 산서잠룡이라고?”
“젊은데? 아니, 어려.”
“딱히 소문만큼 실력이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놀라움과 약간의 질투, 그리고 미묘한 우월함이 담겨 있었다.
대개 이런 경우에는 굳이 상대의 정체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사가 늦었군. 후배.”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가 씩 웃으며 말을 걸어온다. 다른 두 명은 귀여운 병아리 보듯이 팔짱을 끼고 날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거 묘하게 기분 나쁘네.’
뭐 하는 놈들이기에 다짜고짜 선배 노릇일까?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곧 풀렸다.
“아, 아직 모르겠군. 우린 섬서에서 왔다네. 섬서 종남파(終南派), 들어 봤나?”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조, 종남파? 그 종남파요?”
세 사람의 얼굴에 한껏 웃음꽃이 피었다.
“하하, 이 친구 너무 놀라는데?”
“그러게 말이야.”
“혹 우리 문파를 잘 아는가?”
나는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알죠! 잘 알죠! 얼마나 재밌게 봤는데!”
“잘 안다니 기쁘…… 잠깐, 재밌게 보다니?”
“뭐긴요. 그야 당연히 군림…….”
대답하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여긴 소설이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