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43
#142화
“화산파 속가제자 이풍, 청풍 사숙(師叔)께 인사 올립니다.”
자하신공과 매화검법. 마지막으로 이풍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단어, 사숙.
이 믿기지 않는 상황에 공일혁의 얼굴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럼 정말 저놈이?’
검성의 친손자는 아니더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리만 꾸벅꾸벅 숙이는 저 얼간이가 검성 매종학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후인(後人)이라는 것.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공일혁이 더듬거리며 현실을 부정하던 그때.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공 대협.”
“아, 도지휘동지.”
홍진을 발견한 공일혁의 안색이 한결 밝아졌다.
종남파는 관(官)과의 연계를 통해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었고, 홍진은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산서성의 권력자였다.
이 곤경에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홍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공일혁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가 잠시 착각한 모양입니다.”
“착각이라니, 무슨 착각이요?”
“그저 검성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기꾼 정도로 생각했는데…….”
“글쎄요, 전 무공 쪽은 영 문외한이지만 사기꾼처럼 보이지는 않던데요?”
“야,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오해라…….”
나지막이 읊조리던 홍진이 공일혁을 빤히 바라봤다.
“공 대협.”
“예, 도지휘동지.”
“내가 왜 공 대협을 비롯한 종남파의 분들을 이 자리에 초대했는지 알아요?”
“압니다, 잘 알지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는 산서 성주이자 황족인 상산왕과 안면을 트고 새로 벌이는 사업의 재가를 받기 위해서.
두 번째는 홍진의 정적인 이풍의 콧대를 바짝 눌러 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공 대협도 알다시피 내가 근래 좀 바빴거든요. 그러다 보니 경황이 없어서 전하께 다른 손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못 드렸네?”
“그러시군요.”
콧소리가 빠진 목소리는 건조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공일혁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한데 갑자기 그 말씀은 왜…….”
“오늘은 이만 가 줬으면 해요.”
“예?”
“아무래도 불청객이 있으면 전하께서 심기가 불편하시지 않겠어요?”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거기에 더해 불청객이라는 말까지.
공일혁이 항변했다.
“불청객이라니요, 도지휘동지.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머, 두 번 말해야 하나요? 앞서 했던 말 그대로예요. 전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홍진은 본래 내관(內官)이다. 상산왕이 갓난아기였던 시절부터 옆을 지켰고 덕분에 산서성부의 실세이자 군부 이인자인 도지휘동지라는 자리까지 꿰찼다.
이처럼 어린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그가 고작 미리 말을 못 했다는 이유로 손님을 돌려보낸다니?
“저, 저는 도지휘동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잘…….”
당황한 공일혁을 향해 홍진이 싱긋 웃어 보였다.
“공 대협.”
“예.”
“그렇게 안 봤는데, 머리가 좀 나쁘네?”
“……예?”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가?”
갑작스러운 폭언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공일혁을 비롯한 종남삼수의 다른 두 사람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어머, 그렇게 느꼈다면 내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거예요. 일부러 좀 과하게 한 면이 없잖아 있거든.”
“도지휘동지!”
“목소리 줄여요, 여기 대전이야.”
“갑자기 이러시는 연유가 뭡니까! 설마 방금 일로 제게 실망이라도 하신 겁니까!”
“목소리 줄이라니까. 그리고 난 공 대협한테 실망한 것 없어요. 우리가 친구도 아니고, 서로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실망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런…… 우리 종남파와의 약조는 잊으신 겁니까?”
“약조? 아, 산서성 쪽에 길을 터 달라는 그거?”
홍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거래라는 게 그런 거예요. 일이 성사되기 전에는 언제 어그러질지 모르는 거거든. 설마 아직 전하의 재가도 안 떨어진 일을 말 몇 마디로 다 끝났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공일혁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사문인 종남파에는 일이 끝난 것처럼 호언장담해 둔 상태.
이번 일이 성공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겠지만 실패한다면 질책을 피할 수 없다. 그로서는 최대한 눈앞의 내관 놈을 구슬려야만 했다.
“이번 일이 잘만 성사된다면 도지휘동지께도 좋은 일이 아닙니까. 종남파는 결코 은원(恩怨)을 잊지 않습니다.”
은혜면 은혜지, 굳이 원한까지 덧붙인 것은 은근한 협박이었다. 구파일방 중 하나를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는 경고.
어린 시절부터 내관으로 지내며 온갖 암투를 지켜본 홍진이 그 말에 서린 속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다.
‘쯧쯧. 이래서 무림인들이란.’
홍진은 내심 혀를 찼다.
언행 하나하나가 서투르고 노골적이다.
그에겐 공일혁처럼 어중간하게 닳은 인물보다는 아예 무인답게 과묵하고 뚝심 있는 이풍이 훨씬 까다로운 적수였다.
‘지금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도 모르고.’
원하는 목표가 있다면 설설 기어도 모자랄 텐데 협박까지 곁들이다니. 그러나 덕분에 그는 마음을 굳혔다.
“공 대협. 나처럼 여린 사람은 그런 말 들으면 무서워서 같이 일 못 해요.”
“아,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공일혁이 몰랐던 척 사과하려던 그때, 지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진태경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오해의 소지는 무슨. 지나가던 개도 안 믿겠네.”
“이, 이……!”
“거, 종남파 선배님들. 뭐 얼마나 대단한 사업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따로 얘기하시면 안 됩니까? 안 그래도 밥상 엎어진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바닥을 뒹구는 음식들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진태경의 모습에 홍진이 실소를 터트렸다.
“걱정 말아요. 이분들이 나가시면 새로 음식을 들이라 할 테니까. 그렇죠?”
이제는 나가라고 등까지 떠미는 상황. 공일혁이 이를 악물었다.
“도지휘동지. 제 안목이 형편없다는 건 인정합니다. 다만, 부디 오늘 일로 뭘 잃고 얻을지를 잘 생각하십시오.”
“뭘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철저하게 실익을 따져서 내린 결정인걸요?”
“그게 무슨……?”
“일은 계속 진행할 겁니다. 섬서와 산서를 연결하는 전용 무역로와 무역소도 지을 거고 규모도 늘릴 거예요.”
“그럼 더욱더 본문과 손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외침에 홍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섬서에 있는 문파가 종남파밖에 없나요? 제가 알기로는 종남파보다 훨씬 오래되고 세간의 인식도 좋은 곳이 있다던데.”
“……지금 혹시 화산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일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화산과 종남은 지난 수백 년간 수없이 신경전을 벌여 온 숙적 관계.
이번 일이 다른 문파도 아니고 화산에게 넘어간다면 가벼운 질책 정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당연히 이럴 수 있죠. 더 좋은 선택지가 눈앞에 있는데.”
“본문도 결코 화산파에 밀리지 않습니다. 아니, 당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화산파를 넘어섰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자부할 수 있다라. 사문에 충성하는 모습은 보기 좋아요.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자타공인(自他共認)이라는 말이 더 듣기 좋지 않을까요?”
홍진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공 대협.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종남파에도 검성 같은 고수가 있나요?”
“……그건.”
“그럼 저기 있는 소협과 같은 걸출한 후기지수는요?”
“…….”
공일혁을 포함한 종남삼수 전원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검성? 종남파의 문주인 풍운검군이 종종 십왕(十王)에 비견되기는 하나 딱 거기까지다.
하물며 청풍 같은 괴물은 듣도 보도 못했다. 특히 선공하고서도 일 합 만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공일혁은 얼굴이 붉어졌다.
“하, 하지만 본문에 소속된 절정 고수들의 숫자는 결코 화산파에 비해 밀리지 않습니다.”
“내 듣자 하니 무림 문파의 힘은 고수가 몇 명이냐가 아니라 ‘어떤’ 고수를 품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더군요.”
정곡을 찌르는 홍진의 한마디에 공일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든 화산파에게 자리를 뺏기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또, 또한 지금까지 관과 협력했던 것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고요. 반면에 화산파는 지금까지 이런 일을 추진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서투르고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죠.”
“어머, 그래요?”
싱긋 웃은 홍진이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첨사, 어떻게 생각해요?”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이풍이 대답했다.
“맞는 말입니다. 화산은 관과 무림을 확실히 구분 짓는 편이지요.”
홍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공일혁의 얼굴에 화색이 돌던 그때 이풍의 묵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나 처음이란 게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이풍, 네놈이!”
홍진이 깔깔 웃었다.
“우리 이 첨사, 진짜 많이 늘었다니까.”
“누구 덕분이지요.”
불과 한 식경 전에도 같은 내용의 대화를 나눴지만 분위기는 그때와 정반대다.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이어 갔다.
“이 첨사가 다리를 놔 줬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물론입니다. 사부님께 전서구를 보내지요. 이 소식을 들으면 장문인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아, 그리고 여기 귀한 손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알려 드리고.”
홍진의 눈짓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이풍이 슬며시 웃었다.
“그건 태사부께서 좋아하실 소식이고요.”
“시작이 좋네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느새 대화에서 완전히 배제된 공일혁은 신형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와 버린 상황. 그는 분노와 배신감이 섞인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 봤다.
“감히, 감히 대종남파를 무시하다니.”
“저기,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불쑥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태경이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종남파를 무시한 게 아니라, 그쪽을 무시한 겁니다. 몰라서 그렇지, 나 종남파 엄청 좋아해요. 군림…… 아무튼 삼십사 권까지 꼬박꼬박 봤어.”
“그게 무슨 개소리냐! 족보도 없는 태원진가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진태경이 상처받은 얼굴로 청풍의 옆구리를 찔렀다.
“청 소협. 저 아저씨가 우리 집 족보도 없대.”
“헉, 은인한테요?”
“응. 아무리 선배라지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구파일방이라 무서워서 대답도 못 하겠고, 청 소협이 대신 말 좀 해 줘.”
“제, 제가요? 저 그런 거 잘 못하는데.”
“나 은인 아니야? 말만 은인이었어?”
“아뇨, 당연히 아니죠.”
“그럼 내가 알려 주는 대로 말해.”
뭐라 속닥거림이 끝나자 청풍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꺼, 꺼…….”
“청 소협, 더 크게! 당신은 할 수 있어!”
진태경의 응원에 힘을 얻은 청풍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꺼져, 이 꼰대 새끼들아!”
“……!”
“……!”
꼰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뒤에 새끼라는 단어가 붙었으니까.
“이런 쳐 죽일……!”
공일혁을 포함한 세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그들이 누구인가, 종남파의 본산 제자들이다.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에 익숙해진 그들에겐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하지만…….
“으득, 갑시다!”
공일혁은 울분을 참으며 돌아섰다. 이 치욕을 갚아 주기에는 상대도, 장소도 좋지 않다.
‘오늘 일은 언젠가 갚는다. 반드시!’
으스러져라 움켜쥔 주먹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졌다.
거친 발걸음으로 대전을 박차고 떠나는 그의 등 뒤로 진태경과 청풍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이야, 욕 잘하네. 이것도 처음이에요?”
“네, 저 욕 처음 해 봐요!”
“처음치고는 제법 소질이 있는데. 앞으로 나한테 많이 배워요. 세상 살다 보면 쓰기 싫어도 쓸 데 많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