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49
#148화
십만 냥이라는 거금이 따뜻하게 덥혀 놓은 분위기 속, 진위경과 홍진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태원진가의 진위경이라 합니다. 말로만 듣던 도지휘동지를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대태원진가의 소가주께서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편하게 홍 동지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도 벼슬하시는 분께 그럴 수야 있습니까.”
“아이, 너무 딱딱하시다. 편하게 부르시라니까.”
“하하, 그럼 그럴까요, 홍 동지?”
갑자기 분위기 공산주의 뭔데.
여기가 평양인지 무림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 통성명을 끝마친 진위경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음. 태경이 왔느냐?”
“예.”
평소와는 다른 묵직한 목소리에 눈치껏 공손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외부인이 보는 앞에서 평소처럼 굴었다가는 진위경 개인의 위신은 물론이고 가문 전체가 망신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 전하께 인사는 잘 드렸고?”
인사 정도가 아니라 단독 팬 사인회도 하고 왔지.
홍진이 웃으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전하께서 아주 기뻐하셨어요. 평소에 여기 진 공자를 너무 보고 싶어 하셨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네.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도무지 놔줄 생각을 안 하시더라니까요.”
“으허허, 우리 막내…… 아니. 제 아우가 마음에 쏙 드신 모양이군요.”
“그럴 만도 하죠. 얼굴 잘생겼지, 키 크고 몸 좋지. 무공도 강한 데다 성격도 아주 서글서글하니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으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사실 태경이가 대단한 인재이긴 합니다. 본가가 아니라 오대세가 같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천하제일인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무게 잡는 것도 잊고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진위경의 모습에 홍진이 얼굴을 굳혔다.
“천하제일이요? 진 소가주님. 농담이 너무 심하시다.”
“네? 그게 무슨.”
“진 공자가 천하제일인이 될 재목이라니요. 아무리 제가 무림과 연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우습게 보시는 거 아녜요?”
“……커흠.”
순간 싸해진 분위기 속에 진위경이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때 홍진이 재깍 말을 이었다.
“진 공자 정도라면 고금제일인도 될 수 있죠.”
“……!”
“미리 축하드려요, 소가주님. 태원진가에서 고금제일인이 나오다니, 산서성의 홍복이네요.”
진위경이 감격에 찬 얼굴로 외쳤다.
“홍 동지!”
“진 소가주님!”
“…….”
황궁에서 20년을 살았다더니, 과연 혓바닥 놀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나는 영혼의 단짝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뻐하는 진위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안 되겠습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제가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술이라도 한잔…….”
“어쩌죠? 제가 술은 잘 못 먹어서.”
“아, 이리 안타까울 수가.”
“없어서 못 먹어요.”
“홍 동지!”
“진 소가주님!”
“…….”
“…….”
쿵짝 잘 맞는 거 봐라.
두 사람이 껄껄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사라지자 위팽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저자가 정말 도지휘동지가 맞습니까?”
“안타깝지만 사실이에요.”
“내관 출신이라고는 들었지만 저렇게 경박스러울 줄은.”
글쎄, 그럼 거기에 맞장구까지 다 쳐 준 무인 출신인 진위경은 뭐가 되나.
아까부터 썩은 표정이던 진무경이 입을 열었다.
“원래 저런 작자입니다. 지난번에는 은근슬쩍 제 어깨를 쓰다듬더군요. 팔을 부러트리려다가 간신히 참았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천을 쫙쫙 찢어 땅바닥에 내팽개친 그가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전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볼일은 무슨. 또 수련이겠지 뭐.”
“무인에게 있어 수련보다 중요한 일이 있나?”
“……없지.”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말문이 막혀 입맛만 다시던 그때, 또랑또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 저희 할아버지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랑 똑같아요.”
순간 위팽과 진무경의 시선이 청풍을 송곳처럼 찔렀다.
양민들이 볼 때야 조금 독특한 분위기의 청년, 딱 그 정도지만 고수들에겐 다르다.
두 사람의 눈썹이 위로 솟구치자 청풍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어, 은인.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잘못은 무슨. 그냥 신기해서 그런 거예요. 그렇죠, 두 분?”
두 사람은 청풍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새파랗게 젊은 절정 고수. 그들로서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청풍의 정체가 궁금할 법도 했다.
“이참에 서로 통성명이라도 하시죠. 이쪽은 청풍.”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풍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청풍입니다! 산서에 온 지는 며칠밖에 안 됐고요. 그전에는 하남에 있었고 또…….”
이거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야? 두 사람의 얼굴엔 딱 저렇게 쓰여 있다.
예상했던 바다. 나는 청풍의 정체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검성의 제잡니다.”
“……!”
“……!”
검성 매종학의 이름은 무림인들에게 있어 확실히 치트키나 다름없다.
두 사람이 경악에 찬 얼굴로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하자 청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그런데 두 분 중 누가 진천검이시죠?”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진무경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내, 내가 진천검이오. 한데 정말 검성 매종학 대협의……?”
“네. 저희 할아버지세요.”
“헉!”
화염신장의 비급을 봤을 때보다 몇 배는 놀란 표정이다.
이미 수십 년 전 은거한 것으로 알려진 초절정 고수의 제자, 그것도 손자라고 하는 젊은이가 툭 튀어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럴 수가…….”
“검성의 후인이라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청풍이 해맑게 웃었다.
“저도 하산하기 전까지는 몰랐네요.”
“소, 소협. 혹시 매 대협께서도 하산을……?”
물어보는 목소리에는 기대와 흥분이 한껏 담겨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평생 검을 수련해 온 검객. 매종학은 검성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검도(劍道)의 경지를 이룩한 사람이니 그들에게 있어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청풍은 대답은 두 사람의 기대를 산산조각 냈다.
“아뇨, 저만 몰래 도망쳐 나왔어요. 만나고 싶은 분들이 있어서.”
“아아.”
“그럴 수가…….”
“근데 그건 그렇고…….”
안타까워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청풍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의 반짝거리는 눈빛은 아까 전부터 진무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진천검 진무경 소협이신가요? 십봉룡(十鳳龍)의 그분?”
“맞소, 내가 진무경이오.”
“와, 드디어 찾았다!”
“……음?”
“제가 그쪽을 엄청 찾아 헤맸거든요. 하남의 천무학관에서부터 여기까지.”
뭐야, 저 녀석이 찾고 있던 사람이 진무경이었어?
위팽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진무경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 말이오?”
“네. 마침 가깝기도 하고, 첫 번째 시작으로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요.”
“첫 번째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비무행(比武行).”
청풍이 잔잔하게 웃었다. 그건 지금까지 보아 왔던 해맑고 순수한 웃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하산하면서 결심했지요. 십봉룡을 모두 꺾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무인에게는 대화가 필요 없다. 오직 무(武)로 겨룰 뿐이다.”
스으으.
그 순간, 나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어느새 솟구친 자줏빛 광염(光焰)이 청풍의 전신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광경이다.
‘자하신공.’
극양의 기운이 냉기를 불살랐다. 땅이 녹고 흙이 그을렸다. 청풍이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그럴 필요 있나?”
진무경의 말이 이어졌다.
“검을 뽑아.”
* * *
진무경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전투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이다. 이제야 비로소 검을 뽑을 준비를 갖췄다.
그는 검파에 손을 올리며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렸다.
‘검성 매종학.’
검을 처음 쥔 날부터 단 하루도 그 이름을 잊은 적이 없었다.
검의 궁극에 다다랐다는, 혹은 그 너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전설적인 검객.
모두가 검성을 추앙했지만 진무경은 달랐다.
‘언젠가 그를 꺾고 말겠다.’
누군가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 일이다.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진무경이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검성이라는 이름에는 닿을 수 없다. 매종학이 검성이라 불리기 시작한 이래, 그 누구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으니까.
검성 매종학은 이미 수십 년 전 정파 무림의 새로운 역사를 썼고,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상관없어. 이건 내 목표니까.’
만용이 아니라 목표다.
지금껏 검을 수련하며 매일같이 뼈와 가슴에 새겨 온 목표.
그리고 이 순간, 검성 매종학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죠. 너는 십봉룡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만하지 말아라.”
청풍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허리춤에는 아무렇게나 매인 청강검 한 자루가 대롱거렸고, 발걸음은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빈틈이 없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도무지 언제, 어떻게 상대를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무경은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난 그분을 만나 본 적도 없는데…… 과찬을 하셨군.”
“아니에요. 솔직히 살짝 놀랐는걸요. 이건 진심이에요.”
진무경 역시 지금 청풍이 하는 말들이 모두 진심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묘했다.
‘살짝, 이라고.’
검을 수련한 지 어느덧 이십여 년이 지났다. 재능과 노력을 바탕으로 이 자리에 올랐다.
세인들은 자신을 천재라고 불렀고, 진천검이라는 별호를 붙여 주었으며 십봉룡이라 칭했다.
단 한 번도 그런 허명(虛名)에 취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아직 한참 멀었군.’
어느새 자신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풍양에게 당한 상처가 다시 욱신거리는 듯했다.
“그거 아시오?”
“뭘요?”
“당신이 강하다는 것.”
“사실 얼마 전까지 확신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겠네요.”
“나를 만나서?”
“네. 진 소협을 만나서. 십봉룡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그렇소?”
진무경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놈이다. 이미 구파일방의 장로에 버금가는 무공, 혹은 그 이상이면서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 솔직함.
무인이지만 무림에는 어울리지 않는 놈이다.
‘내가 아는 누구랑은 정반대로군.’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무림 어디에 던져 놔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 같은 놈, 동시에 가장 무인답지 않게 싸우는 놈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올해로 약관입니다.”
“마침 나이도 같군. 우연인가? 아니면 인연?”
“네?”
진무경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 비무의 결과는 이미 알고 있다. 청풍의 전신에서 넘실거리는 자하신공의 기운이 그만큼 압도적이었으니까.
이 정도의 고수를 상대로 모든 기량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럴 때 저 녀석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진무경은 자신의 사고뭉치 동생을 흘끗 바라봤다. 놈은 악동 같은 웃음과 함께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넌. 좆. 됐. 다.
이런 쳐 죽일 놈을 봤나. 허탈하게 웃은 진무경이 검파에 손을 올렸다. 단전에서 끓어오른 공력이 사지백해로 뻗어 나간다.
청풍이 진무경의 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씀도 해 주셨어요. 비무에는 기수식 따위 필요 없다.”
“동감이오.”
다음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자줏빛 광염과 은빛 검기가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