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50
#149화
서안(西安)의 역사는 깊다. 왕조가 바뀌기 전까지 수백 년간 천하의 중심이라 불렸다.
수많은 인구, 평야와 광산으로부터 생산되는 풍부한 자원. 그리고 세월에 휩쓸려 간 세 개의 통일 왕조가 남긴 명승고적(名勝古跡)들은 아직도 수많은 이들이 서안을 찾는 이유다.
시끌벅적한 서안의 한 객잔. 두툼한 모피 옷을 걸친 두 유생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자, 서두르세.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 객잔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빠듯해.”
의욕이 넘치는 친구와는 달리 다른 유생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또?”
“또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오늘은 이만 쉬면 안 되겠나? 며칠째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서 그래.”
“이 친구 엄살은. 천릿길을 걸어서 왔는데 어떻게 그냥 돌아가? 우리 나이에 다시 서안에 올 일이 있을 성싶은가?”
“어이고, 서안 구경하다가 북망산 구경하게 생겼네. 나 좀 내버려 둬.”
“어허, 다른 곳은 몰라도 서악(西岳)은 들러야지. 그 절경을 놓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서악이라…….”
천하에서 손꼽히는 다섯 개의 명산을 가리켜 오악(五岳)이라 한다.
그중 서악은 서안에서 가까운 화산(華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화산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 보게. 상상만으로도 호연지기가 솟구치지 않나?”
“그건…… 그렇지.”
열의에 찬 설득에 유생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그 험준함만큼이나 아름다운 절경으로 유명하다는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명산이 괜히 명산이겠나? 이번에 영험한 기운을 잔뜩 받아 가야 다음 과거 때 좋은 소식이 있지. 자네가 낙방한 것만 벌써 몇 번짼가?”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이 사람 성내기는. 아무튼, 화산에 가서 호연지기도 받고 영기도 받자. 뭐 그런 말이지.”
그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자, 유생이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다른 곳까지 들르자는 말은 안 하겠네. 화산의 연화봉(蓮花峰)만 찍고 바로 내려오세.”
이쯤 되니 완강히 버티던 유생도 마음이 동했다. 혹시 누가 아는가, 정말 내년에 과거에 떡하니 붙을지도.
하지만 한 가지 소문이 마음에 걸렸다.
“한데 내 듣자 하니 화산에는 무림인들이 득실거린다던데…….”
“화산파 도사들을 말하는 거라면 괜찮네. 석년에 내 지인이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더군.”
“커흠. 그럼 한번 가 볼까?”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유생이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까부터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이 쫙 풀린 것이다.
자칫하면 주위에 널린 탁자 모서리에 뒤통수가 찍힐 상황.
“어, 어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려는 찰나, 거칠고 단단한 손바닥이 유생의 등을 받쳤다.
“으, 으헉. 겨우 살았네.”
겨우 신형을 바로 한 유생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서른쯤 되었을까? 평범한 인상에 흰 도포를 입은 청년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고, 고맙소.”
“별말씀을요.”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유생은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평범해 보이는데.’
어중간한 신장에 늘씬해 보이는 몸이다. 한데 수십 근이나 더 나갈 자신의 몸을 한 손으로 받치다니.
혹 무림인인가 싶어 옆구리를 살펴봤지만 휑한 것으로 봐서 그건 아닌 듯싶다.
‘보기와는 달리 힘이 장사구먼.’
어쨌건 덕분에 살았다.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길 은혜를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했다.
“다시 한번 고맙소. 공자 덕분에 낭패를 면했구려.”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큰 도움을 받았는데 어찌 말 몇 마디로 끝내겠소? 이럴 게 아니라 내 한턱 낼 테니 합석하시구려.”
그러자 동료 유생이 황당한 듯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화산은? 연화봉은 어쩌고?”
“방금 골로 갈 뻔한 거 못 봤나? 이건 객잔에서 쉬라는 징조야. 그리고 여기 계신 공자가 날 구해 줬으니 은혜는 갚아야지. 안 그렇소?”
청년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전 정말 괜찮습니다. 기다리는 일행도 있고요.”
“일행이라니? 아까부터 보아하니 한 시진이 넘게 혼자 있던 것 같은데.”
“하하, 일이 있어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한 시진을 넘게 있었는데도 계속 기다리겠다고? 생긴 것만큼이나 속 좋은 놈이다.
그렇다고 일행이 있다는데 막무가내로 합석하자고 할 수도 없는 일. 유생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사는 동안 가내 두루 평안하시고, 무병장수하길 바라겠소.”
“화산! 연화봉!”
“아, 지금 갈 테니까 거 유별난 주둥이 좀 닫아 보게.”
“역시, 난 자네를 믿었어.”
“확 그냥, 연화봉 정상에서 밀어 버릴까 보다.”
일행을 향해 눈을 부라린 유생이 막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쾅!
모골이 송연해지는 굉음. 객잔 문이 박살 나더니 우렁찬 외침과 함께 일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희 왔습니다!”
“은향이도 왔어요!”
그들을 바라본 객잔 안의 손님들이 하나같이 입을 딱 벌렸다.
사내의 엄청난 체격에, 그리고 아리따운 소녀의 미모에 놀란 탓이었다.
‘저건 무슨 조합이야.’
‘세상에, 살다 살다 저리 큰 사람은 처음 보네.’
순간 침묵에 잠긴 객잔 안, 유일하게 놀라지 않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앞서 유생을 도운 평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늦었구나.”
남들보다 머리통 몇 개는 더 큰 사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작은 시비가 붙어서 그만.”
“무슨 일이길래 한 시진이냐 늦었느냐?”
“저어, 그게…….”
사내가 우물쭈물하자 자신을 은향이라 밝힌 소녀가 씩 웃으며 끼어들었다.
“큰 오라버니, 혹시 흑사파라고 들어 보셨어요?”
“흑사파? 글쎄다. 이름만 들어서는 썩 좋은 일을 할 것 같진 않구나.”
“맞아요. 요 앞에서 투전판을 관리하는 흑도 무리인데, 거기 두목이라는 자가 철우 오라버니를 보더니 같이 일해 볼 생각 없냐고…… 읍! 읍읍!”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제가 얼마나 순박하게 생겼는데!”
철우라는 사내가 은향의 입을 막고 항변했지만, 객잔 안의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생긴 것 봐라. 저 얼굴이면 이미 흑도지.’
‘내가 흑사파 두목이었어도 말 꺼내 봤다.’
‘저 정도면 영입 일 순위야. 일 순위.’
다들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린 이유는 철우가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성난 맹수의 눈빛에 사람들은 침만 꼴깍 삼켰다.
물론 이번에도 한 사람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청년의 물음에 철우가 냉큼 대답했다.
“그냥 일없다 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사실이냐?”
철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사, 사실입니다.”
“주먹에 피가 묻어 있구나.”
“헉. 정말입니까? 분명히 닦았는데!”
“…….”
“…….”
“읍. 읍!”
청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은향이부터 놔주거라.”
“……옙.”
“읍, 푸하!”
간신히 풀려난 은향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침을 퉤퉤 뱉었다.
“으, 짜. 오라버니 손 언제 씻었어요?”
“어제.”
“뭐야, 어제오늘 동안 측간에 다녀오는 것만 다섯 번은 본 것 같은데. 그럼…… 아악!”
“괜찮아. 난 보름에 한 번 씻어도 향기 나.”
“미쳤나 봐, 저러니까 여자들이 싫어하지.”
“뭣이!”
으르렁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던 청년이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사문에서도 골칫덩이로 악명 높은 두 사람이다. 언젠간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서안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벌써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장문인의 명이니 거절할 수도 없고.’
어쩌겠나. 이게 다 자신의 업보이려니 생각하는 수밖에.
벌써부터 반쯤 기가 빨린 그가 입을 열었다.
“둘 다 돌아가고 싶은 것이냐? 장문인께 말씀드려서 면벽 수련이라도 시켜 줘야 정신을 차리겠어?”
“헉, 아닙니다.”
“저도 괜찮아요. 큰 오라버니.”
청년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어허. 큰 오라버니가 아니라 대사형이다.”
“네, 큰 오라버니.”
“은향이 너…… 휴우, 아니다.”
“헤헤.”
미인의 웃음이란 얼마나 위력적인가. 은향이 배시시 웃자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싸늘하던 객잔의 공기가 훈훈해졌다.
눈치만 살피고 있던 객잔 주인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저어, 나으리들.”
주인장을 알아본 청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잔뜩 겁에 질린 눈빛으로 철우를 힐끔거린 그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배상을, 좀.”
“아.”
그제야 박살 난 문이 눈에 들어온다. 청년이 재차 한숨을 내쉬자 철우가 묵직한 전낭에서 잽싸게 은자를 꺼내 들었다.
“이거면 충분할 거요.”
“이 은자는 어디서 났느냐?”
은향이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흑사파요.”
철우가 기겁해서 외쳤다.
“야!”
“왜요, 난 잘못 없는데?”
“너도 옥비녀 챙겼잖아!”
“앗. 어떻게 알았지?”
“…….”
흑사파를 박살 낸 걸로도 모자라 재물까지 싹 다 털어 온 모양이다. 청년은 이마가 지끈거렸다.
“당장 돌려주어라.”
“대사형, 놈들이 갖고 있어 봤자 악행에나 쓰일 재물입니다.”
“맞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맛있는 것도 먹고…….”
청년이 엄격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말을 끊었다.
“언제부터 투전판 관리가 악행이 되었느냐? 아니면 직접 네 눈으로 목도한 적이 있느냐?”
“안 봐도 뻔합니다. 흑도잖습니까.”
“이 넓은 무림에 어찌 한 가지 색만 있겠느냐. 그리고 흑사파가 정말 악적들이라면 진작 본산에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건…….”
“시끄럽다. 갈 길이 바쁘니 재물은 여기에 맡기고 간다. 그리 해도 괜찮겠습니까, 주인장?”
이제는 객잔 안의 모든 사람이 안다. 이들이 무림인이며 서안의 흑도 세력과 원한을 맺었다는 사실을.
무림인과 얽히는 걸 극도로 꺼리는 주인장은 똥 밟은 표정이었다.
“대, 대협. 송구합니다만 저 같은 늙은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잃게 된 철우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걱정 마시오. 별일 없을 테니.”
“지금 당장은 몰라도 여러분들이 떠나시면 저는 큰일이 납니다요.”
“어허, 그럴 일 없다니까. 우리가 떠나도 주인장의 털끝 하나 못 건드릴 거요.”
“아니 그게 그렇게 쉽게 말씀하실 일이 아니라니까요.”
머리까지 근육으로 뭉친 놈인지 생각이 더럽게 짧다.
주인장이 차마 그렇게 말은 못 하고 냉가슴만 앓던 그때, 청년이 담담하게 웃었다.
“그들이 오거든 이 전낭과 함께 한마디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아니, 대협들. 지금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은데…….”
주인장의 말은 곧바로 이어진 청년의 목소리에 뚝 끊겼다.
“화산파의 일대제자 백무성이 사제들의 실수를 대신 사과한다고요.”
순간 객잔 안이 침묵에 잠겼다.
화산파, 세 글자가 주는 위압감도 위압감이었지만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본 듯한 청년의 이름 때문이었다.
“화산파의 백무성이라고?”
“백무성, 백무성…… 잠깐. 혹시?”
화산파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서안이다. 무림에 관심이 많은 몇몇 호사가들이 청년의 정체를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산일학(華山一鶴) 백무성!”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한 품행을 지녔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
이미 화산파 입문 당시부터 뛰어난 기재로 알려진 그에게는 또 다른 별호가 있었다.
“화산일학이라면 매화삼절(梅花三晣)의 첫째 아닌가!”
현 화산파 장문인은 세 명의 제자를 두어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로 성장시켰다.
그런 그들이 화산파의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매화검수(梅花劍手)에 임명된 것은 당연했고, 이내 두각을 드러냈다.
“듣자 하니 그중 여인이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저들이?”
“말해서 뭣하나. 아까 화산일학에게 대사형이라고 부르는 거 못 들었어?”
“허어, 살다 보니 이런 곳에서 매화삼절을 다 보는군.”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탄성을 모른 척하며 백무성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주인장이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목숨을 걸고 이 재물을 흑사파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존명!”
“…….”
* * *
“아, 맞다.”
백무성의 중얼거림에 두 사제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대사형?”
“뭐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어요?”
백무성이 고개를 저었다.
“화산이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걸 깜빡했다.”
“누구한테요?”
“이름은 모르겠구나. 그 사람, 아픈 다리를 이끌고 헛걸음을 하게 생겼어.”
은향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런. 앞으로 몇 달은 어림도 없을 텐데.”
“그러게 말이다.”
그들은 며칠 전 화산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을 떠올렸다.
장문인, 그러니까 자신들의 사부가 잠든 사이 침입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다녀간 것이다.
그는 대담무쌍하게도 화산파 장문인의 머리맡에 비수 한 자루와 친필 서신을 남기는 기행을 저질렀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오마. 너는 장문인 됐다고 놀지 말고 잠잘 시간에 무공 수련 좀 해라.]평소 같았다면 즉시 천라지망을 펼쳤겠지만, 침입자의 정체가 검성 매종학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장문인은 즉시 화산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검성의 은거지를 찾으라 지시했고, 수색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태사부님도 참. 대단하신 분이네요.”
“말만 들었지. 나도 이 정도이실 줄은 몰랐다.”
“전서가 오지 않았다면 저희도 꼼짝없이 화산을 뒤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와중에 산서성에서 날아든 전서구는 구원의 빛이었다.
화산파 수뇌부는 고심 끝에 매화삼절이라는 걸출한 인재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청풍이라는 사람. 대사형은 만나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래, 십 년 전에 한 번.”
검성 매종학이 자식처럼, 손자처럼 키운 제자.
십 년 전 그 자리에는 그도 있었다. 화산일학 백무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기대되는구나. 어찌 성장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