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51
#150화
을씨년스러워 보일 정도로 넓고 휑한 연무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한 청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찌했어야 했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한 사람을 떠올린다.
그의 조잡한 청강검과 발걸음. 무공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사라진 웃음을 기억해 냈다.
비로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줏빛 광염을 두른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청풍.’
검신 매종학의 손자, 제자. 뭐라 부르든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나흘 전 그와 무공을 겨뤘고, 패했다는 사실이다.
진무경은 그날부터 연무장과 처소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허기는 벽곡단으로 채웠고 졸음은 수련으로 쫓았다.
지금 그에게 따뜻한 음식과 꿀 같은 휴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졌다. 철저하게.’
불과 삼백여 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감안해도 너무 쉽게 무너졌다.
자신이 누군가. 고작 약관에 절정의 경지에 올라 중원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천재다.
‘진천검, 십봉룡…… 우습군. 겨우 이 정도였나?’
고작 이 정도인 자신에게 붙은 거창한 별호들이 우습고, 허명이라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스스로를 높게 여기던 자신의 모습이 허탈했다. 이거야말로 위선자 아닌가.
‘누가 그랬지. 천하는 넓다고.’
구주팔황(九州八荒), 사해오호(四海五湖).
이 광활한 대륙에 얼마나 많은 고수가 숨어 있단 말인가.
진무경은 청풍을 만나고서야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어.’
천무학관(天武學館)은 분명 정파 무림 최고의 교육 기관이지만 천하의 모든 기재가 천무학관의 관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천하 오대세가의 직계와 구파일방의 적전 제자들은 사문의 비전 절기를 이어받기에도 바쁘니까.
청풍도 그중 한 명이다. 그들은…… 우물 밖에서 태어났고 오래전부터 거기서 살아왔다.
‘기다려라, 청풍. 그리고 다른 놈들도 모두.’
눈이 반개한 순간, 진무경의 신형이 번개처럼 솟구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쏴아아악!
검기(劍氣). 사방을 쉼 없이 난도질하는 은빛 검기는 나흘 전보다, 아니 지금까지의 그 어떤 때보다 짙고 선명했다.
청풍과의 비무는 그에게 깨달음과 투지를 주었다. 그저 강해지겠다는 막연했던 목표가 초점을 잡은 것이다.
쉬쉬쉬쉬슁!
그 후로도 진무경의 검은 쉬지 않았다. 지쳐 녹초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 * *
무림에서는 단전을 기해라고 부른다.
기해(氣海). 기의 바다. 몸 안의 모든 공력이 시작되고 모이는 곳. 누가 만들었는지 참 적절한 단어다.
띠링.
– [운기조식]을 시작합니다.
– [진가심법]의 구결을 따라 공력을 운용하십시오.
어느덧 팔 성에 오른 진가심법이다.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넘게 반복했던 그 길을 따라 45년의 공력을 흘려보냈다.
‘뜨겁다.’
열화신단을 복용함으로써 얻은 열양지기(熱陽之氣)는 자그마치 반 갑자.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강대한 기운이 전신의 혈맥을 휩쓸었다. 그 거침없는 기세를 보아하니 사뭇 기대감이 든다.
‘지금이라면 가능할지도…….’
운기조식을 할 때마다 항상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철문처럼 굳게 잠긴 채 공력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두 개의 혈도.
그곳을 임독양맥(任督兩脈)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임독양맥. 소설에서 많이 봤지.’
무협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한 번쯤 거치는 단계 아닌가?
무협 소설에선 임독양맥 뚫는 건 기본이요, 환골탈태는 옵션이다. 물론 난 주인공은커녕 조연도 안 되는 놈이라 번번이 물러나야 했다.
‘그랬었지. 지금까지는.’
고작 15년의 공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에어백도 안 터지는 소형차를 바위에 돌진시키는 꼴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반 갑자의 열양지기가 더해진다면 소형차는 군용 전차로 탈바꿈한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하지.’
아니, 해내야 한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나는 기세가 최고조에 달한 공력을 끌어 올려 임맥과 독맥, 두 갈래로 쏘아 보냈다.
쿵!
혈도와 공력의 충돌음이 천둥처럼 들렸다. 동시에 찌르르한 고통이 척추와 아랫배를 울린다.
충돌하는 힘이 강해진 만큼 반발력도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이를 악물고 연이어 부딪쳐 갔다.
쿵! 쿵! 쿵!
‘와, 씨. 뭐냐 이거.’
나도 나름대로 몸뚱이 험하게 굴린 놈이다. 칼 맞는 건 예사고 내장까지 망가진 적도 있다.
하지만 이건 고통의 종류가 다르다.
‘허리 아픈 건 그렇다 치고, 거기는 왜 아픈 건데!’
남자에게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부위가 욱신거린다. 마치 누군가가 힘껏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임독양맥만 뚫으면 엄청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만 견디면 절정 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력을 부딪쳐 갈수록 눈앞이 노래진다.
“으헉!”
삐빅!
– [운기조식]에 실패했습니다.
– 공력이 흐트러지며 혈도가 미세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 [근맥]이 1 하락합니다.
불알 아픈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근맥까지 떨어졌다. 나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그 부위를 붙잡고 침상 위에 엎드렸다.
“억! 어어억!”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남자는 급소가 아플수록 허리를 숙이는 법.
기도드리는 심정으로 한참을 엎드려 있자 점차 통증이 사그라든다.
“훅, 후욱.”
하마터면 홍진 될 뻔.
땀범벅이 된 채로 침상에 드러누워 있는 그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조장!”
“은인!”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온 혁무진과 청풍이 나를 보고 멈칫했다.
“무슨 일…… 헐.”
“은인, 뭐 하시는 거예요?”
“응? 뭐가?”
되묻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지금 어떤 꼴인지를.
“아.”
밀폐된 방. 한겨울임에도 어쩐지 땀으로 흠뻑 젖어 침상 위에 누운 채 손은 그곳을 붙잡고 있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
음. 확실히 오해의 소지가 있군.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오해야.”
잠깐의 침묵 끝에 혁무진이 눈웃음을 쳤다.
“압니다. 다 알아요.”
“아니라니까.”
“어허, 왜 이러십니까, 선수들끼리.”
“선수는 무슨 선수야, 이 미친놈아.”
“끝까지 모르는 척하시네. 제가 그리 속 좁은 놈으로 보이십니까?”
“아, 진짜 아니라고!”
“좋으셨어요? 어떻게, 아직 안 끝나셨으면 자리 비켜 드려요?”
“시작도 안 했어!”
“아,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하려고 하셨구나. 끝나면 다시 올까요?”
“안 해! 할 생각 없어!”
“괜찮습니다.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저도 상태 좋은 날에는 하루 다섯 번도 하는데요, 뭘.”
“그거 진짜냐…… 아니, 근데 이 새끼가.”
혼돈. 파괴. 망가.
시간이 지날수록 오해만 깊어져 가는 대화를 듣던 청풍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가 오해예요? 뭘 알아요?”
“청 소협, 진짜 몰라요? 조장님이 저러고 계신 이유를?”
“몰라요. 소피가 마려우셔서 그런 건가?”
“허어, 어찌 이럴 수가. 딱 한 번만 알려 드릴 테니 마음에 새기십쇼. 이게 다 피와 살이 되는 거예요. 인생이 달라진다니까요.”
“네!”
“지금 조장님의 손이 어디에 있습니까? 대답해 보세요.”
“아랫도리요.”
“그렇죠. 그럼 아랫도리에는 뭐가 있을까요?”
“속곳이요.”
“속곳! 좋습니다. 거의 다 왔어요. 그럼 속곳에는 뭐가 있을까요?”
“어? 그런데 지금은 아랫도리에 없어요.”
“예?”
“은인의 손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헉.”
쫙! 털썩.
정확히 아래턱을 조준한 귀싸대기다. 편안한 표정으로 스르륵 무너지는 혁무진을 청풍이 받아 들었다.
“아직 다 못 들었는데.”
“……그거 들어서 뭐 하시게?”
“한 번 들으면 피와 살이 되고 인생이 달라진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이미 기절한 성교육 선생님을 시무룩한 얼굴로 바라보던 청풍이 물었다.
“그런데 아랫도리 붙잡고 뭐 하고 계셨어요?”
“…….”
남들이 들으면 진짜 오해하겠다.
* * *
“……이렇게 된 겁니다.”
팩트로 꽉꽉 채운 설명이 끝나자 어느새 깨어난 혁무진이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후우, 너 진짜 오늘 죽도록 맞아 볼래?”
“아, 그건 사양하겠습니다. 지금도 골이 울려요.”
혁무진이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임독양맥은 왜 건드리신 겁니까? 조장님이 절정 내가고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간 큰 분도 아니시잖아요.”
“……그냥 한 번 건드려 봤다.”
“예?”
“됐어. 시끄러우니까 입이나 다물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혁무진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나흘 전 진무경과 청풍의 비무를 보고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기에는 너무 낯부끄럽다.
“아무튼, 보기 좋게 실패했다는 것만 알아 둬. 거기가 아파서 제대로 못 하겠더라. 이거 왜 이러는 거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의원도 아니고, 또 누구 같은 절정 고수도 아니니까.”
나와 혁무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옮겨 갔다. 앞서 말한 ‘누구 같은 절정 고수’가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음, 할아버지한테 들은 적이 있어요.”
이제는 혁무진도 청풍의 신분을 안다. 우리는 동시에 기대감 어린 탄성을 토해 냈다.
“오오.”
“오오오.”
검성 매종학은 천하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 무공에 관한 한, 그가 한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다.
“뭐라고 하셨는데요?”
“임맥은 자칫하다가는 사내구실 못 하게 되고, 독맥도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또 뭐라고 하셨더라? 아, 맞다!”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청풍이 이마를 탁 쳤다.
“시간 지나면 알아서 뚫리니까 얌전히 놔두라고 하셨어요. 두 개 다 잘못 건드리면 병신 된다고.”
“……?”
“……?”
저게 뭔 소리야.
나와 혁무진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부딪쳤다.
“원래 임독양맥이 시간 지나면 뚫리는 거였냐?”
“글쎄요, 저도 처음 듣는 말인데.”
“그렇다고 허튼소리일 리는 없잖아. 검성씩이나 되는 양반인데.”
“그렇죠. 혹시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얼마나 필요한데?”
“저야 모르죠. 저희 아버지가 내일모레 환갑이신데 한번 여쭤볼까요?”
“아, 임독양맥 뚫리셨냐고?”
“네.”
“무인이셔?”
“혁가 포목점 주인이신데요.”
“너는 될 수 있으면 말하지 마라. 듣는 사람 속 터지니까.”
“네.”
이런 놈을 수하라고 데리고 다니는 내가 불쌍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청풍에게 말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설마 조부님께서 그것만 딱 말씀하시진 않았을…….”
“딱 그것만 말씀하셨어요.”
“……진짜요? 토씨 한 글자 안 틀리고?”
“저는 은인께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하긴, 청풍은 거짓말 칠 정도로 약은 놈이 아니다.
천성인지, 아니면 성장 환경 때문인지 나쁘게 말하면 멍청해 보일 정도로 솔직하고 해맑다.
청풍이 억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저희 할아버지도 거짓말을 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저도 기다리니까 뚫렸는걸요. 임독양맥 전부는 아니고 독맥 하나뿐이지만.”
“검성 어르신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게 아니라……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요?”
“청 소협.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임독양맥을 뚫으셨다고요?”
“어, 일단은 독맥 하나만요. 아직 제가 어려서 그런가 봐요.”
나는 더듬더듬 물었다.
“어, 어떻게 뚫으셨는데요?”
“재작년에 그냥 수련하다가 기분이 묘해지고, 꽝!”
“꽝?”
“그렇게 뚫었어요.”
“…….”
“…….”
“신기해서 할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그게 깨달음이란 거래요. 헤헤.”
안 되겠다. 달라도 너무 달라.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임독양맥을 타통 할 거라는 검성의 말은 정확했다.
문제는 오직 청풍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눈앞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이놈은, 애초에 나 같은 놈과는 종(種)이 다른 신인류나 다름없다.
‘천재. 하늘이 내린 재능이다, 이거지.’
청풍도, 진무경도. 애시당초 나와는 타고난 재능이 다르니 답이 없다.
말문이 막혀 한동안 가만히 있자 청풍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폈다.
“은인, 제가 뭐 잘못한 거예요?”
“아뇨. 잘못한 거 없어요.”
“그래요?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청풍을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저기…….”
“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젠장, 이거 막상 말하려니 입이 잘 안 떨어지네.
나는 철판이 두껍다. 뻔뻔하다는 소리도 들어 봤고, 염치없다는 소리도 들어 봤다.
하지만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힘들까.
“은인?”
나는 어렵게, 정말 어렵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제 수련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럼요. 물론이죠.”
“네?”
“도와드릴게요. 수련.”
녀석의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본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왜 망설였는지.
그건 호승심이었다.
이 녀석에게만큼은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호승심.
싫어서가 아니라 오롯이 내 힘으로 꺾고 싶은 상대라서 생기는 감정이었다.
“……너무 쉽게 승낙하시는 것 아니에요?”
“은인한테는 빚을 많이 졌는걸요. 제가 좋은 거 여러 가지 많이 가르쳐 드릴게요. 아, 물론 할아버지한테 주의받은 무공은 빼고!”
가르쳐 준다고?
내 좁쌀 같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그리고 확실해졌다.
나는 이 녀석을 꺾고 싶다.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배워야지, 뭐.
나, 생각보다 낯짝 두꺼운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