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52
#151화
현재 내가 머물고 있는 전각은 완공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다.
진무경이 태원진가로 복귀한 첫날, 거하게 난장판을 쳐 놓은 바람에 기존의 전각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중요한 건 연무장이 생겼다는 거지.’
동생들이라면 껌뻑 죽는 진위경이 허투루 만들었을 리 있나.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잘 꾸며 놓은 전각 내부도 내부지만 이제는 나만의 전용 연무장이 생겼다.
“인근에서 내로라하는 목공, 석공들을 초빙해서 만들었답니다.”
“그래?”
부동산 업자 같은 혁무진의 설명을 들으며 연무장을 둘러봤다.
타인의 시선을 막아 주는 높은 담장과 넓은 연무장. 그 한구석에는 이른바 십팔반병기라 불리는 수련용 무기들이 거치대에 놓여 있었다.
“특히 여기. 연무장 바닥이 푸르스름하죠?”
“그러네. 돌 같아 보이는데?”
“예, 청석(靑石)이라는 물건인데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닙니다. 한 번 보실래요?”
쾅! 쾅!
“야!”
갑자기 있는 힘껏 발을 내리찍는 혁무진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이 자식이 자기 연무장 아니라고 아주 미쳤구나.
하지만 혁무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닥을 가리켰다.
“어허, 화내시기 전에 바닥을 보세요. 멀쩡합니다.”
진짜네?
혁무진의 레벨이라면 그럭저럭 일류 소리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약간의 흠집 정도로 끝난 걸 보면 돈푼깨나 쓴 모양이다.
“질 좋은 청석은 아주 단단해서 어지간해선 깨지지 않습니다.”
“올.”
“우와, 이런 것도 있구나. 전 항상 흙바닥에서만 수련했었는데.”
신기한 듯이 바닥을 톡톡 치던 청풍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콰직!
“어? 깨졌는데요?”
“…….”
“…….”
너 이 새끼, 누가 발에 공력 실으래.
나는 제대로 써 보기도 전에 박살 난 연무장 바닥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혁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저는 잘못한 거 없습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방금 눈으로 욕하셨잖아요.”
“입으로도 해 줘?”
“……아뇨. 그럼 전 이만. 중요한 볼일이 생각나서.”
스리슬쩍 발 움직이는 것 보소.
나는 눈치를 보며 내빼려는 녀석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왜, 왜요?”
“어디 가. 할 것도 없잖아.”
“할 게 없다니, 제가 무슨 한량입니까? 중요한 볼일이 있다니까요.”
“그런 놈이 이틀째 내 전각에서 죽치고 있냐?”
“…….”
“너 포상 휴가 받았다며. 큰형한테 들었어.”
청풍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와, 포상 휴가! 저도 받아 보고 싶어요!”
“……청 소협, 지금 저 놀리십니까?”
“댁은 박살 난 청석 조각이나 좀 치우고 계세요.”
“앗, 넵!”
거, 쓸데없이 해맑은 놈일세.
한편 내게 붙잡혀 발을 버둥거리던 혁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우, 됐습니다. 그냥 시원하게 한 대 때리십쇼.”
“내가 널 왜 때려.”
“때리려고 붙잡으신 거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내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릴 만큼 폭력적인 놈으로 보여?”
“네.”
“누구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넌 주둥이로 천 대를 버는구나.”
빡!
“커흑.”
“자식, 엄살은.”
혁무진이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한 대 맞았으니까 됐죠? 전 이만 가렵니다.”
“가길 어딜 가. 여기 있어.”
“제가 여기 있어 봤자 뭐 합니까. 잔심부름이나 시키실 게 뻔한데.”
내가 딱히 대답하지 않고 빤히 보고만 있자 혁무진이 투덜거리며 말을 이었다.
“조장께서 잊고 계셔서 그렇지, 저도 무인입니다. 수문각주 되려면 빡세게 수련해야 해요.”
“누가 수련하지 말래?”
“예?”
멍청한 건지, 아니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건지. 나는 아직도 감을 잡지 못하는 혁무진을 보며 혀를 찼다.
“여기서 같이 하자고.”
“……제가요? 여기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와 청풍을 번갈아 쳐다보던 녀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안 될 거 없지. 괜찮아요, 청 소협?”
용케도 짜 맞춘 청석 조각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던 청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상관없어요. 대신 나중에 빙당호로 많이 사 주세요.”
“……거, 혹시 빙당호로 못 먹어서 죽은 귀신 붙었습니까?”
“귀신이요? 은인, 지금 저한테 귀신 붙어 있어요?”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고.”
“와! 귀신이다! 귀신!”
“와, 환장하겠네.”
이거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청풍에게서 시선을 뗐다. 혁무진은 여전히 얼떨떨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래서 어쩔 거야? 하기 싫어?”
퍼뜩 정신을 차린 녀석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좋죠, 엄청 좋은데…… 정말 제가 끼어도 됩니까?”
“된다니까. 뭐 죄지었냐?”
“그래도 본인의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않는 건 무림의 불문율인데…….”
무림뿐만 아니라 헌터들 사이에서도 그렇다.
인간들끼리 죽고 죽이는 무림보다 덜할 뿐, 내 모든 실력을 보여 주는 것을 꺼리는 심리는 헌터들 사이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상위 헌터일수록 더더욱 그렇고.’
고만고만한 하급 헌터들이야 돈이 없으니 동네 헬스장마냥 옹기종기 모여서 수련하지, 돈푼깨나 있는 중급 헌터쯤 되면 개인 트레이닝 룸부터 마련하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조장님이나 청풍 소협은 각자 사문의 비전을 이어받은 고수들이지만 저는 다릅니다. 두 분께서 수련하시는 것에 별 도움도 안 될 거예요.”
“음. 그렇긴 하지.”
“……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혁무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잘 배워서 도움을 주라고.”
“네?”
“언제까지 줘 터지고 다닐래? 수문각주가 네 인생의 목표야? 나랑 더 넓은 물로 나아가려면 너도 강해져야 할 거 아냐.”
“……!”
“그냥 열심히 배워. 자격이니 뭐니 따질 시간에 입에 자물통 채우고, 얼굴에는 철판 깔고 잠자는 시간도 아껴 가면서 수련하라고.”
내가 그랬다. 지난 수년간, 하루라도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
선배 헌터들의 수발까지 들어 가며 하나라도 더 빼먹기 위해 애썼고, 피나는 노력 끝에 배운 것들을 나만의 것으로 녹여 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혁무진의 머뭇거림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저 정도면 재능도 뛰어난데.’
무인과 헌터는 다르다. 헌터는 하루아침에 능력을 부여 받지만 무인은 자신의 실력을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런 의미에서 혁무진의 재능은 상당한 편이다.
‘당장 산서오문의 쭉정이들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지.’
무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힌 그들.
그러나 혁무진은 이미 근골이 굳어진 늦은 나이에 무공에 입문, 오 년 만에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
물론 단순히 레벨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지만, 당장 실전에서 붙는다 해도 놈들 정도야 가뿐하게 눌러 줄 수 있을 것이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독기가 있어.’
포목점 아들이 일류 고수가 되기까지의 시간, 오 년. 혁무진은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본가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좀 무공을 늦게 시작했거든요.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면 별수 있겠습니까. 열 배, 스무 배로 노력하는 수밖에요.’
말이 쉽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피나는 노력을 이어 왔다는 뜻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와 혁무진은 분명 닮은 구석이 있다.
‘문제는 열등감까지 닮았다는 거지만.’
나와 청풍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좋은 기회라는 걸 아는데, 나처럼 별것 없는 놈이 여기 끼어도 될까, 싶은 마음.
그런 감정들이 혁무진의 발목을 잡는다. 나는 녀석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제안했고, 결정은 네가 한다. 이대로 간다고 해도 안 말려.”
“……저, 혹시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약간의 침묵 끝에 혁무진이 입술을 뗐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겁니까?”
“네가 내 오른팔이라며? 아니, 심장인가?”
“예?”
“예, 는 무슨. 네 입으로 그렇게 말하고 다녔잖아.”
“그럴 때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해 본 소리지. 내가 너 싫어했으면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겠냐?”
“그냥 심심해서 그러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가끔 손 근질근질할 때 때리는 맛도 있고.”
“…….”
이 자식은 나를 도대체 어느 정도의 쓰레기로 보고 있었던 걸까.
내가 눈을 부라리자 혁무진이 황급히 딴청을 피웠다.
“커흠. 커흐흠…….”
“인마, 애초에 키울 생각 없었으면 진작 혼자 다녔어. 너 같은 짐짝 들고 다녀서 뭐 해?”
“짐짝이라뇨. 이렇게 쉽게 말을 바꾸셔도 되는 겁니까? 방금은 오른팔이니 심장이니 하시더니.”
“오른팔 같은 소리 하네. 지금 네 수준이면 새끼발가락 정도는 시켜 준다.”
“와, 너무하십니다. 정말.”
섭섭하다는 듯 말하지만 자꾸만 위로 솟구치는 입꼬리는 감출 수 없다.
오른팔이건 새끼발가락이건,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신체 부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어쩐지 낯부끄러워진 나는 버럭 소리쳤다.
“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사실 제가 무공의 천재라 다 베껴 갈 수도 있습니다. 괜찮으세요?”
“지랄한다. 베껴, 능력 되면.”
“정말요?”
“한 번 더 물어보면 매우 아프게 맞을 줄 알아라.”
혁무진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한 꺼풀을 벗어던진 것처럼 홀가분한 목소리였다.
* * *
나와 혁무진은 연무장 바닥에 앉아 청풍을 바라봤다. 본격적인 강의 시작에 앞서 착석은 기본이다.
“자, 시작하시죠.”
“잘 부탁드립니다. 청 소협.”
“네, 네! 후욱, 후욱…….”
청풍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차가운 겨울 공기로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쟤 갑자기 왜 저래?
“저기,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요?”
“앗. 저어, 그게.”
머뭇거리던 청풍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굴 가르치는 게 처음이라 너무 설레고 흥분되어서…… 어후, 잠시만요.”
“…….”
“…….”
내 이럴 줄 알았지. 여전히 긴장되는지, 청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시작할게요.”
“너무 딱딱하게 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가지세요.”
“펴, 편하게요?”
“네. 편하게. 청 소협이 익숙한 방식으로 가르쳐 주시면 돼요.”
“제게 익숙한 방식이라면…….”
“조부님께서 청 소협을 가르치실 때 쓰셨던 방식이요.”
“아. 그런 쉬운 방법이!”
나와 혁무진은 기대와 궁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청풍을 바라봤다.
자그마치 검성의 교육 방식이다. 그 위대한 무인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 천재를 키워 냈을까?
‘달라도 뭐가 다르겠지.’
그때,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청풍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교육 방식이었던 모양이다.
“아, 하나 생각났다. 아마 이 수련은 두 분께도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오오.”
“오오오. 뭡니까?”
“저거 보이시죠?”
우리는 청풍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혁무진이 먼저 입을 열었고, 내가 말을 받았다.
“저건…….”
“수련동이네.”
연무장에서 대략 이백여 장 정도의 거리다. 대충 어떤 수련인지 짐작이 간 나는 피식 웃었다.
일명 찍고 땡. 목적지까지 찍고 오기를 죽어라 반복하는 고전적인 방법 아닌가.
‘검성이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별로 다를 것도 없네.’
분명 고전적이긴 하지만 지구력과 하체 단련에 있어서 괜찮은 수련인 건 맞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다녀오면 되나요?”
청풍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해 보셨나요?”
“질리도록 해 봤죠.”
“아, 그러시구나. 다행이다.”
해맑게 웃은 청풍이 나와 혁무진을 차례대로 지목했다.
“그럼 각각 반 시진, 한 시진씩 드릴게요.”
“……?”
“……?”
“왜요?”
나는 혼란을 느끼며 물었다.
“반 시진이라뇨? 그게 무슨?”
“질리도록 해 봤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정도면 충분하실 텐데.”
“그렇긴 한데…… 아, 알겠다. 반 시진 동안 쉬지 않고 왕복해야 하는 건가요?”
“아뇨. 우선은 한 번이면 돼요. 그럼 저는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정상이요?”
“네. 저기요.”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높이 솟구친 청풍의 손끝이 수련동 뒤 절벽을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나와 혁무진은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시벌, 저게 뭐여.’
실로 까마득한 높이. 눈대중으로 살피기에도 수백여 장 높이의 가파른 절벽에 눈앞이 캄캄해지고 손발이 떨려 온다.
나도 이런데 혁무진이야 말할 것도 없다.
“저곳을…… 올라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마침 제가 어릴 때 매일 오르던 곳이랑 높이가 비슷해서 골랐어요.”
“…….”
“…….”
“아, 옛날 생각 난다. 중간에 떨어져서 두 번 정도 죽을 뻔했거든요. 그때 진짜 아팠는데.”
“……!”
“……!”
미쳤다. 검성도 미쳤고 이 새끼도 미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