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58
#157화
예로부터 명산(名山)의 주인은 영물(靈物)이라고 했다. 중원 오악으로 불리는 화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의 발이 닿기 전, 드높고 광활한 산림을 지배하던 것은 호랑이였다.
왕의 위엄과 짐승의 흉성을 지닌 이 영물은 자신들의 영역이 침범당하자 분노했고, 이내 허락받지 않은 불청객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와아, 그래서요?’
‘인명 피해가 극심해지자 화산파에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지. 복호권(伏虎拳)은 그렇게 탄생했다.’
호랑이를 굴복시키는 권법. 복호권.
청풍은 오래전 복호권을 배울 당시 할아버지가 해 주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풍아, 복호권은 산중제왕을 굴복시킬 만큼 강맹한 무공이다. 이것 하나만 잘 익혀도 네 또래에 널 대적할 녀석은 없을 것이다. 알겠느냐?’
‘네!’
어린 시절의 청풍은 할아버지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십 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
퍽!
“어우, 아파라.”
“……어라?”
그는 처음으로 할아버지도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청풍과의 비무를 시작한 지 사흘째. 나는 마흔다섯 번째 비무에서 처음으로 말을 더듬는 녀석을 목격할 수 있었다.
“으, 은인. 괜찮으세요?”
“알아요. 복호권 맞죠?”
눈으로 보고, 직접 맞으면서 겪어 보기까지 했다.
명치에 복호권을 얻어맞고 뻗었던 것이 어제의 일이다.
복호권을 시전 할 때의 청풍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밟는 보법과 어깨의 위치, 이어지는 투로까지 눈에 담고 머릿속에 새겼다.
하지만 그러고도 공격을 허용했으니 확실히 청풍은 나보다 한 수 위다.
“방금 그거, 초식 이름이 뭡니까?”
내 물음에 청풍이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일권복호(一拳伏虎)요.”
한 주먹에 호랑이를 쓰러트린다? 확실히 그럴 만한 파괴력을 지닌 초식이다. 비무를 겪을 때마다 쭉쭉 상승하는 맷집이 아니었다면 어제처럼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제보단 많이 나아진 걸 위안 삼아야 하나?’
올라간 것은 맷집뿐만이 아니다. 청풍의 무공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자, 다시 갑시다.”
하지만 청풍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피하신 거예요?”
“예?”
“정확히 봉미혈(鳳尾穴) 부근을 노렸는데…….”
봉미혈이라면 늑골 어림이다. 나름 피한다고 몸을 틀었다가 복부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거다.
상대의 목적에서 벗어났으니 이것도 어떻게 보면 피하긴 한 셈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대라도 안 맞아 보려고 몸부림쳐 본 거죠, 뭐. 결국은 얻어맞았지만.”
“투로가 보였나요?”
며칠 동안 두들겨 맞다 보니 어렴풋이 보이긴 한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또 다음 초식이 어떻게 이어질지.
‘아직 서툴러서 문제지.’
나는 욱신거리는 복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맞은 짬이 있는데 그 정도는 읽어야죠. 일부러 맞을 때마다 눈 부릅뜨고 봤습니다.”
얻어맞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 것, 상대의 투로를 파악하는 것의 기본 아닌가?
“어어, 이상하다. 복호권은 몇 번 안 썼는데.”
“그래서 다른 것보다는 좀 더 걸리더라고요.”
“다른 거요?”
“네. 매화권 같은 건 나름 쉽던데? 비무에서 가장 많이 썼던 거라 그런지 대충 알겠더라고요.”
청풍이 감탄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와아, 보여 주실 수 있어요?”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나는 어설픈 자세로 짝퉁 매화권을 펼쳤다. 보법도, 동작도 영 엉성하지만 모두 청풍이 비무 때마다 펼치던 매화권의 초식들이다.
‘이 정도쯤이야, 뭘.’
무공을 익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깨달았다.
식(式)에는 무공에 대한 이해와 그에 걸맞은 공력 운용이 필요하지만, 형(形)을 따라 하는 건 쉽다는 사실을.
‘여기서는 이렇게 움직였지, 아마?’
일 초식부터 칠 초식까지. 간혹 버벅거리긴 했지만, 무리 없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펼쳐 보인 뒤 고개를 돌렸다.
“일단 이 정도인데…… 저기 청 소협?”
“아, 네. 은인.”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왜 그래요?”
“아뇨, 그게…….”
어쩐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청풍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요.”
“검성 할배, 아니 조부님이요?”
“네. 저를 도둑놈이라고 부르셨거든요.”
“괜찮아요. 저도 어릴 때 엄마 지갑에서 몰래 천 원 빼 갔다가 뒤지게 맞았어요.”
“그게 아니라…….”
청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공을 가르쳐 주시면서 늘 그러셨어요. 저보고 무공 빼먹는 도둑놈이라고.”
“아.”
이거 칭찬 맞지? 청풍 같은 재능충에게 칭찬을 받다니.
얼떨떨해하는 내게 청풍이 말했다.
“은인은 무공의 천재가 분명해요.”
“천재요? 제가?”
“네.”
천재는 무슨……이 아니고, 맞긴 맞다.
따져 보면 고작 두세 달 만에 일류 무공인 진무보법과 창법을 대성했으니까.
물론 전부 시스템 빨이지만.
“그냥 편법이에요. 제가 몸 쓰는 건 잘하는 편이라. 눈도 좋은 편이고. 흐흐.”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무공은 눈이 칠, 발이 삼이라고.”
“그 말은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전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을걸요?”
그런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원체 운동신경이 좋아서 무슨 스포츠건 잘하는 편이긴 했는데. 굳이 무공이라고 할 만한 건…….
‘어, 하나 있네.’
내 표정이 변하자 청풍이 그거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적 있죠?”
“있긴 있네요. 태권도라고.”
“태권도요?”
“무술 비슷한 겁니다.”
초딩 시절에 휴대용 게임기를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등록한 태권도 도장.
고등부 형들의 태권도 시범이 있었고, 정확히 두 번 만에 태극 1장부터 8장까지 따라 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두 살 많은 중학생 형을 때리고 잘렸지만.
‘설마 그게?’
그러고 보니 F급 헌터 시절에도 뭐든 곧잘 따라 하긴 했었다.
다만 허접한 신체 능력이 발목을 잡았을 뿐.
나 같은 최하급 헌터가 중급 헌터의 움직임을 따라 하다가는 파괴력도 안 나올뿐더러 가랑이만 찢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넘치는 공력. 뛰어난 신체 능력. 그리고 무림에서 익힌 무공.
이제 보니 무공의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내게 제법 재능이 있긴 한 모양이다.
“청 소협은 매화권 익히기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한 달이요.”
“한 달?”
직접 해 본 바로는 매화권이 화산파의 무학이긴 하나 그 정도로 복잡한 무공은 아니다.
그런데 저 녀석이 한 달 걸려서 익힌 걸 사흘 만에 얼추 따라 하게 됐다고?
‘미쳤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환히 웃는 내게 청풍이 덧붙였다.
“대성(大成)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고 할아버지한테 호되게 혼이 났죠.”
“…….”
그럼 그렇지.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며 청풍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누가 내 무공을 따라 한다는 거.”
심상치 않은 기세가 피어올랐다.
* * *
혼절에서 깨어난 혁무진은 멍하니 연무장을 바라봤다.
‘끝내주네.’
연무장은 이미 반쯤 초토화된 상태였다.
산서성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석공들이 정성 들여 깔아 놓은 청석은 절반 이상이 박살 났고, 지금도 빠르게 망가지는 중이었다.
캉! 카카카캉!
계절이 무색하게도 연무장 중앙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불꽃을 터트리며 격돌하는 창과 검.
병장기를 쥔 주인들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이며 주고받는 합은 일류 고수인 혁무진의 눈으로도 따라가기 버거웠다.
‘어떻게 저렇게 빠를 수 있지?’
흰 무복을 입은 청풍과 검은 무복을 걸친 진태경.
한눈에도 극도로 대비되는 그들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청풍 저 인간은 괴물 수준이군.’
적당한 체구에 선한 인상. 당장 태원 거리에 반나절만 있어도 또래의 비슷한 젊은이를 서너 명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저 평범한 청년에게는 아무도 쉽게 예상하지 못하는 신분이 감춰져 있다.
‘검성 매종학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후인.’
쐐애애애액! 쉭!
높이 솟은 태양 아래 진태경의 창날이 번득인다.
무겁고 간결한 초식, 그러나 힘과 속도가 더해지니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지는 극쾌의 창술로 변모했다.
‘만약 저 창이 나를 노린다면?’
혁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끄럽지만 일다경 이상 버틸 자신이 없다. 아니, 어쩌면 그 생각마저도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위안일지 모른다.
하지만 청풍은 달랐다.
쉬익, 쉬쉬쉬쉭!
사방을 점하고 달려들던 창날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손쉽게 모든 공격을 피해 내는 청풍의 얼굴은 평온했다.
이어 그의 손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한 줄기 빛이 공기를 갈랐다.
쐐애애애액! 쾅!
“흡!”
굉음과 함께 진태경이 신음을 토해 냈다. 가까스로 검을 막아 낸 그를 향해 장대비 같은 검격이 쏟아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혁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유려하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청풍의 움직임은 경지에 오른 화공의 붓놀림처럼 섬세하고 부드러웠고, 계절의 끝에서 너울너울 떨어지는 꽃잎을 닮았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혁무진이 문득 중얼거렸다.
“매화검법…….”
그는 지금까지 화산파의 무공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청풍의 몸놀림 하나하나에 화산파 무학의 정수(淨水)가 스며들어 있음을.
‘괴물이군. 말 그대로 괴물이야.’
그러나 괴물은 청풍 한 명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쉬쉬쉬쉬쉭!
카가가강!
검성의 제자가 펼치는 매화검법을 모조리 막아 내는 또 다른 한 사람.
장대한 체구와 선 굵은 잘생긴 외모의 청년이 빠득, 이를 갈았다.
“씨이벌, 화산파 무공 진짜 개같이 만들었네!”
화산파가 들었다면 뒤집혔을 만한 걸쭉한 욕설을 내뱉은 진태경의 몸에서 거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청풍의 유려함을 순간적으로 억누를 만큼 패도적인 기세는 곧 반격으로 이어졌다.
후우우웅! 쾅!
강맹한 일격.
굉음과 함께 창을 막아 낸 청풍의 신형이 훨훨 날았다. 단 한 수로 청풍의 공세를 떨쳐 낸 진태경이 인상을 찡그렸다.
“으, 따가워.”
스스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입고 있던 검은 무복이 길게 갈라졌다.
살이 드러난 가슴팍에는 몇 줄기의 상흔과 핏물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이건 무슨 무공입니까?”
“천응조(天鷹爪)요.”
“없는 게 없네.”
“알려 드릴까요?”
“알려 줘도 됩니까?”
“어, 지금 생각났는데 할아버지께서 외인한테는 알려 주지 말라고 하셨어요.”
“또? 내 그럴 줄 알았지.”
“화산파에 입문하실래요?”
“안 해!”
고함을 내지른 진태경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하게 무공의 형태를 지키면서도 맹수와도 같은 본능적인 움직임. 혁무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 인간은 어째 갈수록 더 무서워지네.’
사람에게는 저마다 기세라는 것이 있다.
진태경의 기세는 끈질기고 치열하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지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무공의 문제가 아니야.’
현재의 진태경도 물론 충분히 뛰어난 고수지만 검성의 제자이자 당당한 절정 고수인 청풍만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몇 달간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혁무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인간이지.’
어떤 지옥에 던져 놔도 진태경은 살아 돌아올 것 같다는 확신.
지금까지 세 명의 절정 고수가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쓰러진 것은 그들이었다. 무림에서는 살아남는 자가 강자이며, 진태경은 거기서 끝끝내 살아남았다.
게다가…….
‘조장의 성장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왔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일문일살 조필을 처절한 혈투 끝에 쓰러트린 그때부터 청풍과 맞서 싸우고 있는 지금까지.
진태경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다.
‘그건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청풍이 쏟아 내는 화산파의 절기들 앞에 불과 백여 초를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혁무진이 직접 지켜본 것만 삼백여 초가 훌쩍 넘어갔다. 화산파의 본산 제자들만 익힐 수 있다는 천응조에 당해 놓고도 ‘앗, 따가워.’가 고작이다.
‘괴물이지. 괴물.’
비슷한 또래에 다들 절정, 초일류.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 어째 주위에 하나같이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것 같다.
한숨을 푹 내쉬던 혁무진은 며칠 전 벽호공을 수련할 당시 진태경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소중한 걸 잃기 싫다면 지금 목숨 걸고 해. 숨이 붙어 있을 때 죽도록 노력하는 게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 말이 맞다. 그렇게 죽도록 노력해야 살아남아 강자가 된다. 무림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선 촌각이 아쉽다.
가만히 두 사람의 비무를 지켜보던 혁무진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새끼발가락으로 끝낼 순 없지.’
강해져야 한다. 진태경의 오른팔, 혹은 심장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혁무진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정도로.’
그는 검갑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