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62
#161화
“말귀가 어두운 친구로군.”
사내, 인도(人屠)의 말에 테무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담담한 목소리 속, 비수처럼 도사린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인간 백정이라더니, 무슨 놈의 살기가…….’
그러나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 자리를 위해 데리고 온 부족원들, 그리고 한족 출신의 마적들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부족장으로서의 명예와 한 줄기 남은 이성이 충돌했다.
검을 뽑을 것인가, 말 것인가. 갈등하는 테무르를 구해 준 것은 다음 순간 들려온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역시 천하의 호걸들이시오. 나처럼 담 작은 소인배는 무서워서 끼어들 수도 없겠어.”
테무르가 웃음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당신은 누구요?”
“나 말이오?”
반백의 중년인이 푸근하게 웃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두르지만 않았더라면 마음씨 좋은 상인처럼 보일 만큼 온순한 인상이었다.
“내 이름은 두 개인데, 하나는 고향을 떠나며 버렸고 다른 하나는 초원에서 만난 벗들이 만들어 주었지. 그중 뭐가 궁금하오?”
테무르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도가 그의 정체를 대신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흑사(黑砂), 시답잖은 잡설은 적당히 하지.”
“어이쿠. 이렇게 까발리는 게 어디 있소? 한창 재밌어지던 참인데.”
“하나도 재미없다.”
“그러니 당신이 백정 소리를 듣는 거요. 쯧쯧.”
과장되게 혀를 차는 중년인의 정체를 깨달은 테무르와 칭겐이 눈을 크게 떴다.
“흑사? 흑사대?”
“당신이 바로 그?”
안대를 쓴 중년인, 흑사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흑사요.”
“……!”
“……!”
흑사대. 오직 한족으로만 이루어진 그들은 거친 초원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이다.
숫자는 고작 일백이지만 하나하나가 마상무예의 달인이며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인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흑사대의 수괴가 이처럼 경박한 사내였다니.
칭겐은 혀를 내둘렀다.
‘그래서 저 포악한 인도가 백정 소리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던 거였군.’
그야말로 흑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인도에 의해 진작 혀가 뽑히고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한데…….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놀라움을 가라앉힌 테무르도 칭겐의 질문에 의구심 어린 눈빛을 던졌다.
“그에 관해서는 나도 물어보고 싶군.”
노골적인 경계심에 흑사가 빙긋 웃었다.
“혹 서신을 한 통 받지 않았소?”
테무르와 칭겐이 동시에 흠칫했다.
“서신?”
“어떻게 그 사실을?”
“내가 바로 그 서신을 보낸 사람이니까.”
“그럴 리가. 분명 서신에는 천풍단주의 인이 찍혀 있었는데.”
어리둥절해하는 테무르와는 달리,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끝낸 칭겐은 침잠한 눈빛으로 흑사를 바라봤다.
“천풍단주와는 어떤 관계요? 그는 지금 어디 있소?”
“당신이 칭겐이로군. 젊은 족장답지 않게 침착하고 눈치가 빠르다는 말은 들었소.”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오.”
“눈빛이 매섭구먼. 이래서야 무서워서 말이나 꺼낼 수 있겠나. 그래도 뭐, 이 자리에 온 이상 감출 비밀도 아니니 알려 드리리다.”
넉살을 떨던 흑사가 말을 이었다.
“천풍단주는 내 명령에 따라 대동 인근을 배회하며 시선을 끌고 있소.”
명령.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았군.’
천풍단주는 흑사의 수하가 분명하다. 머릿수가 물경 오백에 이르는 천풍단도 흑사대의 하부조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테무르와 칭겐은 말없이 눈빛만 주고받았다.
‘흑사대로도 충분히 강한데 천풍단까지 더하면……?’
‘초원의 판도를 바꾸기에 부족함이 없지.’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흑사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맺혔다.
“생각이 많으신가 보군.”
“솔직히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이오.”
“도대체 당신의 꿍꿍이가 뭐요?”
“꿍꿍이는 무슨.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를 하자는 것뿐이오. 서신을 읽었다면 알 텐데?”
테무르와 칭겐. 두 사람은 보름 전 받았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화살촉에 묶여 날아온 서신에는 짤막한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칸이 되고 싶다면 오시오.
칸! 초원의 지배자, 수많은 전사를 거느린 위대한 왕.
생각만으로도 피가 끓어오르는 단어다. 일족의 부흥을 꿈꾸는 젊고 강한 두 부족장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작금의 초원은 사분오열됐소. 과거 그대들의 선조가 세운 찬란한 대제국을 생각하면 믿기 힘들 정도지.”
흑사는 마유주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나를 도와준다면 나도 그대들을 돕겠소. 병장기와 말, 재물. 필요하다면 수하들도 보내 주지. 조각난 초원을 규합하시오. 적들을 무릎 꿇리고 절대적인 복종을 약속받으시오. 장담컨대 십 년 안에 대초원의 칸이 될 수 있을 거요.”
“말은 쉽군.”
빈정거리는 듯한 테무르와는 달리 칭겐은 침착했다.
“왜 하필 우리요?”
“젊고 유능하며, 야심이 넘치니까. 칸의 핏줄을 이었다는 정통성도 한몫했고. 어쨌든 내 제의는 간단하오.”
흑사는 점차 사그라지는 불길 속으로 딱딱하게 굳은 말똥을 밀어 넣었다. 순간 솟구친 불길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나와 함께 성(城)을 도모해 보지 않겠소?”
* * *
“성? 산서를 말하는 거요?”
“그럼 어디겠소?”
두 부족장은 그제야 그의 속내를 대충 감 잡았다. 항산검문이 무너진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려는 술수다.
문제는 칸이니, 지원이니 하며 거창한 포부를 운운한 것 치고는 그들에게 딱히 매력적인 제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들 표정이 영 아니군.”
칭겐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무주공산이 된 북부를 털어 보겠다는 생각이라면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소?”
“어째서?”
“태원진가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까. 북부 전역에 지부를 세우는 한편, 관에서도 나서고 있다고 들었소.”
그들에게도 정해진 선이라는 것이 있다.
상단을 습격하면 마적이지만 성을 침범해 양민들을 약탈하면 반란군이 된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만 명의 토벌군이 파견되기라도 한다면 대적할 방법이 없다.
“고향에서까지 쫓겨나고 싶지는 않소. 풍양처럼 개죽음당하기도 싫고.”
칭겐의 말에 테무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전적인 성격의 그였지만 현실은 인정해야 했다.
“심지어 풍양 그놈은 관은 건드리지도 않았지. 태원진가의 어린놈들한테 죽었어.”
“풍양의 수하들은 사백에 달했소. 그중 살아 돌아온 자들이 십 분지 일도 안 되오.”
그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인도가 불쑥 입을 열었다.
“풍양은 초원에서 도망친 놈이다. 밑에 있던 놈들도 급하게 끌어모은 떨거지들에 불과했고.”
“풍양을 본 적이 있소?”
“두어 번. 별거 없는 놈이었지. 단언컨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놈보다 약한 자는 없다. 아, 물론 저 얼간이도 포함해서.”
“이 새끼가!”
“목소리를 낮춰라. 목젖을 도려내 버리기 전에.”
“한족 놈이 입만 살았군. 할 수 있을 것 같나?”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스르릉.
두 사람의 허리춤에서 도신이 모습을 드러낸 그때였다.
“거 참. 적당히들 하시오.”
연배로나, 세력으로나 흑사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팽팽한 기 싸움 끝에 두 사람이 동시에 병장기를 집어넣자 흑사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칭겐에게 말했다.
“관은 걱정할 것 없소. 태원진가와 우리 사이의 문제로 끝날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누구도 반응 못 할 만큼 벼락처럼 해치우면 되지 않겠소?”
“그게 될 것 같소? 산서성은 이미 태원진가의 손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요. 대동을 돌파한다고 쳐도 그때쯤이면 태원진가의 본대와 수많은 중소문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모이기 전에 친다면 어떻겠소? 그것도 머리만 골라서.”
“……뭐?”
“사흘 후, 다가오는 원단에 산서성 모든 문파의 수뇌부들이 태원진가로 집결할 거요. 우린 대동이 아니라 하곡(河曲)을 통해 진입. 그대로 태원을 향해 돌격하는 거지.”
“……!”
“무장을 최소화하고 지구력이 뛰어난 초원마를 확보한다면 하루에 오백 리는 너끈하지. 짧으면 이틀, 길면 사흘 만에 적들을 칠 수 있소.”
산서성의 절반을 가로질러 상대의 머리를 친다니.
실로 담대하고도 무모한 계획에 칭겐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 잠깐. 놈들이 미리 알아차리고 방비한다면?”
“방비라…… 정확히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거요?”
“말했다시피 북부에는 태원진가의 지부가 속속 들어서고 있소. 일일이 전투를 치르면서 전진하면 기동력이 떨어지고, 무시하고 지나친다면 우리가 들이닥치기도 전에 소식을 알게 되겠지.”
“그 부분은 걱정 마시오. 우리는 단 하나, 하곡 지부만 박살 내면 되니.”
“하면 다른 지부들은?”
“그때쯤이면 놈들은 대동에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거요.”
“대동…… 아. 설마!”
“천풍단주가 제 몫을 톡톡히 할 거요. 그 날만큼은 사정없이 날뛰라고 일러두었거든.”
천풍단은 누구나 아는 북부 고원의 강자.
머릿수도, 개개인의 실력도 적풍단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반나절이면 북부에 존재하는 태원진가의 지부들이 텅텅 빌 거요. 급한 불이 났는데 뒤를 돌아볼 겨를이 있겠소?”
흑사의 말 그대로다. 지부는 천풍단을 막기 위해서 무인들을 박박 긁어모아 대동으로 보낼 것이고, 그 틈을 타 진짜 본대가 하곡을 넘어 남하한다.
막아서는 모든 것들을 말발굽으로 짓밟으며…….
“또 현재 태원진가는 북부 안정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소. 내 알아본 바로는 본가의 무인들은 일백이 될까 말까지.”
흑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산서성 모든 문파가 참석하는 자리요. 아무리 태원진가가 크다 한들 그들 모두를 먹이고 재울 수는 없는 법. 본가에 남아 있는 무인까지 다 합쳐 봐야 이백이나 될까?”
칭겐은 목이 바짝바짝 탔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의 휘하 병력만 합쳐도 삼백 명은 우습다.
아니, 밑바닥까지 긁어모은다면 그 두 배까지도 가능하다.
‘고수들끼리의 싸움도 밀리지 않는다.’
흑사. 인도. 테무르와 칭겐.
이 자리에 모인 넷은 하나같이 뛰어난 절정 고수들이다.
죽은 풍양을 직접 만난 적이 있다는 인도의 말에 따르면 이 중 풍양보다 무공이 떨어지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태원진가의 진천검과 산서잠룡은 합공한 끝에 겨우 풍양을 쓰러트렸다.’
이미 사실로 확인된 이야기다.
풍양이 노강호로 불리는 항산호마저 쓰러트린 덕분에 항간에는 북부 고원의 마적들이 웬만한 일류 무림인보다 강하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이거 어쩌면…….’
조용히 생각에 잠긴 칭겐을 흑사가 웃음기 띤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떻소?”
침을 꼴깍거리며 듣고 있던 테무르가 외쳤다.
“젠장. 그런 끝내주는 계획을 들려주고 물어보면 어떡하라고? 무조건 하겠소!”
“나도 응하겠소.”
마침내 생각을 끝마친 칭겐도 승낙하자, 인도가 흉흉한 웃음을 머금으며 끼어들었다.
“난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귀검(鬼劍) 위팽. 그놈만 내 몫으로 남겨 주면.”
“물론이지. 내 약속함세.”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띤 흑사가 세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진 이상, 그는 암묵적인 좌장(座長)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로 얻는 모든 것들은 정확히 사 등분.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다면 천하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목을 벨 걸세. 이의 있나?”
“없소.”
“나도.”
“서신에 적은 약속은 지키시오.”
“물론.”
시원하게 대답한 흑사가 빈 사발에 마유주를 가득 따라 돌렸다.
“자, 결의를 맺었으니 오늘은 흠뻑 취하세!”
“우와아아!”
“마시자! 술 더 갖고 와!”
유쾌한 함성이 객잔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마유주만큼이나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잔을 기울이던 그때였다.
끼이이이익.
시끌벅적한 소음 사이, 객잔의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