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66
#165화
똑똑똑.
진위경에게 부탁했던 정보는 생각 이상으로 빨리 도착했다.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심부름꾼의 정체다.
“엥,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주군께서 보내야 할 서신이 있다고 하셔서 왔습니다.”
“직접이요?”
진위경의 서신을 전하러 온 것은 다름 아닌 위팽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한마디를 툭 던진다.
“사실이었군요. 벽을 넘어섰다는 것이.”
낮은 언덕에서는 높은 봉우리 위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봉우리에 선 자는 발밑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위팽도 마찬가지였다.
뛰어난 절정 고수인 그는 한눈에 내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고, 경외와 불신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어…….”
이걸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관한 헛소문을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위팽은 아니다.
그는 태원진가의 형제들과 더불어 진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다.
‘말도 안 되긴 하지.’
삼류 양아치가 불과 두세 달 만에 절정 고수가 됐다니.
아무리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해도 믿기 어려운 불가해(不可解)의 영역. 그건 어쩌면 사람들이 헛소문을 믿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차라리 그게 더 현실성이 있으니까.’
내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위팽이 손을 내저었다. 아직 옆에 있는 혁무진의 귀도 신경 쓰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군요.”
위팽이 여전히 심란한 표정으로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앞서 진위경에게 부탁했던 정보다.
서신을 받아 펼치자 위팽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름은 장태보. 십여 년 전까지 철기방(鐵技房) 소속이었습니다.”
“철기방?”
“호북에 위치한 방파인데, 방도들 대부분이 무인이 아닌 솜씨 좋은 장인들로 구성되어 있죠.”
쉽게 말해서 대장장이 길드라는 소리다.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실력은요?”
“그는 철기방의 방주였습니다.”
“오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실력 있는 장인들이 득실거린다는 철기방에서 방주까지 했다면 이미 명장(名匠)이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나는 장태보에 관한 정보가 적힌 서신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사는 곳과 거리도 가깝네요?”
“정양 인근의 마을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지난번에 상산왕의 초청장을 받았던…….”
“아, 거기구나.”
보름 전쯤인가? 태원진가의 정예와 함께 개선장군처럼 행진하던 그곳이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혁무진이 입을 열었다.
“말고삐를 늦추지 않는다면 해 떨어질 때쯤 도착할 것 같은데요?”
“그렇지?”
“네.”
“근데 넌 뭐 해?”
“……뭐가요?”
“가서 출발할 준비해야지. 말도 기운 좋은 놈으로다가 두 마리 빼놓고. 가면서 먹을 것도 좀 챙기고.”
“아니, 무슨…… 제가 하인입니까?”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어. 너 지금 하인 무시한 거야? 태원진가 하인들 싹 다 불러 모은 다음에 입 좀 털어 줘?”
“아이고,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하십쇼!”
등쌀을 못 견딘 혁무진이 투덜거리며 방에서 나가자 위팽이 혀를 찼다.
“수하의 태도가 영 불손하군요.”
“…….”
글쎄, 내가 볼 때는 당신도 만만치 않던데.
틈만 나면 일하라고 들들 볶는 게 시어머니 김치 싸대기를 때릴 정도다.
‘내로남불 보소.’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위팽이 재차 입을 열었다.
“어쨌건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는 오셔야 합니다. 이틀 후에 원단인 것은 잊지 않으셨겠지요.”
“아,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태원진가 전체가 시끄럽다. 하인과 시비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광경은 이미 익숙해질 정도다.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적어도 사흘 넘게 이어지는 대연회인 만큼 당연했다.
‘그만큼 큰 행사긴 하지.’
태원진가가 산서성의 지배자임을 확인하는 자리다.
수많은 이들이 행차하는 만큼 빈틈없는 일처리를 위해 가문의 모두가 불철주야 노력 중이었다.
물론 나는 빼고.
“설마 늦기야 하겠어요? 어차피 끽해야 반나절 거리인데.”
위팽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요한 일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시리라 믿습니다.”
“눈빛은 전혀 못 믿으시는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착각.”
“부탁 하나만 하고 바로 올 거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 삼공자의 행적을 보면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으니 영 틀린 말은 아니군.
하지만 이제는 나도 어엿한 절정 고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 받기에는 머리가 한참 굵어졌다.
“제가 이래 봬도.”
“혹시 이제 나도 절정 고수니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라. 뭐 그런 말을 하시려던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귀신이야, 뭐야. 나는 황급히 말을 삼켰다.
“……당연히 아니죠.”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무림입니다. 장태보, 장 방주에게도 예의를 갖춰서 행동하시고요. 철기방은 구파일방과 상당한 친분이 있고 현 철기방주가 장태보의 제자입니다. 심기를 건드리면 좋지 않습니다.”
“제 취미가 효도고 특기가 노인 공경인데요.”
“대장로에게 쌍욕을 퍼붓던 삼공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니, 그건 다른 얘기지!”
“뭐, 그렇다는 말이죠. 왜 이렇게 성을 냅니까? 이제 절정 고수 되셨다고 제가 만만합니까?”
눈빛 봐라. 비무라도 한 판 붙자고 할 기세다.
물론 붙어 봤자 깨지는 건 나겠지.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안 바쁘세요? 일 많이 밀려 있으실 탠데.”
위팽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빨리 가 봐야 합니다. 대동 부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대동이면…… 북부 고원?”
“마적 놈들이 또다시 어슬렁거린다는군요.”
“아니, 적풍단 박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른 위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다시 뵙는 건 내일 정오가 되겠군요.”
마지막까지 내일 정오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준 위팽이 방을 나가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리고 이건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네?”
위팽이 황당한 표정으로 흉하게 박살난 문을 가리켰다.
“이거, 상태가 왜 이런 겁니까? 분명히 완공된 지 며칠 안 됐을 텐데.”
“누가 그랬을 것 같아요?”
나, 당신, 그리고 모두가 짐작하는 한 사람이지, 뭐.
범인을 짐작한 위팽이 한숨을 푹 내쉬고 방에서 빠져나갔다. 살벌한 뒷모습을 보아하니 진위경을 한바탕 쪼아 댈 것이 분명하다.
“자, 이제 나도 나가 볼까.”
나만의 커스텀 무기를 맞추러 가는 길이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 * *
“준비 끝났냐?”
마구간 앞, 안장을 점검하고 있던 혁무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직이요.”
“아직도?”
“네.”
뭐 이렇게 오래 걸려?
가까이 가서 보니 말 옆구리에 매단 짐이 한가득이다. 냄새를 맡아 보니 전부 음식이었다. 조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뜨끈했다.
“이건 뭐야?”
“뭐긴 뭐겠어요. 먹을 거지.”
“내가 몰라서 물어본 것 같니? 응? 무슨 음식을 저렇게 많이 챙겼냐고. 육포랑 물이나 좀 챙기면 되지.”
내 구박에 혁무진이 서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챙긴 거 아닌데요.”
“네가 아니면 누가 챙겨?”
“누구겠어요.”
혁무진이 손가락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묵직한 보퉁이를 주렁주렁 매단 한 청년이 우다다다 뛰어오고 있었다.
청년, 청풍이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는다.
“앗! 안녕하세요, 은인!”
“……아, 예.”
안녕은 한데,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자 입이 열렸다.
“마구간 오는 길에 마주쳤어요. 따라가겠다는데 제가 어떡합니까?”
청풍이 열정적으로 외쳤다.
“은인!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도 여행 가고 싶어요!”
“이거 여행 아닌데요?”
“어, 진짜요? 오늘 가서 내일 온다고 들었는데…….”
오늘 갔다가 내일 오면 죄다 여행이냐?
내가 정양에 있는 대장장이를 만나러 간다고 설명하자 청풍의 눈이 번쩍 빛난다.
“우와! 대장장이!”
나와 혁무진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대장장이 처음 보시는구나?”
“대장장이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
“…….”
그걸 모르는 게 더 신기하지. 청풍을 하루라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다.
“아무튼, 저도 데려가 주세요.”
“뭐, 따라오셔도 상관없기는 한데…….”
“와오!”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 이 인간아.”
아, 기 빨린다. 이게 바로 인싸 텐션인가.
나는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안장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단단히 매어 둔 음식 보따리를 미리 빼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툭 떨어지는 보따리를 본 청풍이 비명을 질렀다.
“앗! 그거 오향장육인데!”
“아니, 오향장육을 왜 챙겨! 금방 간다니까!”
“안 돼! 내 오향장육!”
“……시벌.”
심지어 내 것도 아니었네. 기어코 음식들을 다 챙긴 청풍이 헤헤 웃었다.
“이제 가요!”
진짜 가고 싶다. 너만 빼놓고.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말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등 뒤에서 쩝쩝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 * *
겨울의 낮은 짧다. 고원의 수평선 너머로 해가 자취를 감추자 거한의 입술 사이로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때가 되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둠 속에서 수백의 인영이 일렁였다.
온갖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두른 그들은 휘어진 곡도(曲刀)와 단궁(檀弓), 그리고 돌격창으로 무장한 채 각자의 말에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 생겨난 사백여 기의 기병대가 거한을 응시했다. 다시 한번 바짝 마른 음성이 이어졌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거한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핏줄이 도드라진 팔뚝과 새어 나오는 입김은 맹수의 그것 같았다.
“죽이고, 짓밟는 것.”
곳곳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껏 날뛰어도 된다는 우두머리의 허락이 떨어졌다. 천풍단(天風團)에 소속된 사백여 명의 마적들이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거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해볼 수 있겠군.’
자신의 의형(義兄)인 흑사가 내놓은 계책은 천재적이었다.
물론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적들을 죽이고 약탈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역할은 가장 중요했고, 가장 단순했다.
‘피가 끓어오르는구나.’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적풍단이니 뭐니 하는 오합지졸과는 차원이 다르다.
십 년을 넘도록 한솥밥을 먹으며 전투를 치른 그들은 백전을 치른 정예였다.
‘흐흐, 기다려라. 태원진가고 뭐고 죄다 짓밟아 주마.’
거한, 천풍단주의 입에서 천둥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가라! 모조리 죽이고 빼앗아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도륙하고 불태워라!”
“와아아아!”
“가자!”
잔뜩 고양된 사백여 기의 마적들이 남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린 그 순간이었다.
“이런 썅노무 새끼들. 태우긴 뭘 태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작달막한 인영.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의 손은 시리도록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