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7
#16화
“후우, 드디어 끝났군.”
진위경이 붓을 내려놓으며 한 말이었다. 언제나처럼 문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위팽이 고개를 들었다.
“점점 일 처리가 빨라지시는군요. 오늘도 고생하셨…….”
위팽이 말꼬리를 흐렸다. 아직 탁자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정오 무렵밖에 되지 않았다. 저 정도 양의 업무를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잘못 들었나?’
“좋아. 이 정도면…….”
이번엔 환청이 아니었다. 서류 더미 위로 불쑥 솟은 진위경의 얼굴이 그 증거였다.
“위팽, 이리 와 보게. 아주 중요한 일이야.”
너무나도 진지한 음성에 위팽은 살짝 걱정되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서류에서 심각한 비리가 발견됐다거나,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장로원에서 큰 사건을 터트렸을 수도 있다.
‘큰일이군. 아직 항산검문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잠시 후, 진위경이 내민 문제의 서류를 받아 든 위팽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뭡니까, 이게?”
“보면 모르나? 그림이지.”
진위경의 말대로였다. 위팽이 생각한 문제의 서류는 온데간데없고, 건네받은 것은 그림이 그려진 화선지 한 장이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난데없이 이게 무슨…….”
진위경이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잘랐다.
“자세히 보게. 평범한 그림이 아니야.”
평범한 그림이 아니다? 순간 위팽의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릿속에는 무림에 떠도는 온갖 전설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우화등선한 도사. 오래된 동굴의 벽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은 절대 고수!
한참 동안 화선지를 누비던 위팽의 시선이 어느 순간, 벼락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것은 설마……!”
“알아차렸군. 맞네.”
진위경이 후후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의 비무를 그려 봤네.”
“…….”
“쓰러진 이소군과 당당히 서 있는 태경이! 훗날 천하제일인이 될 젊은 영웅의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
“…….”
“일부러 밑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로 그렸는데, 자네 소감은 어떤가. 잘 그렸지. 응? 잘 그렸지?”
화선지를 붙든 위팽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구기고, 찢고, 그 위에 일주일 치 대소변을 갈긴 다음 잘 말린 후 불태우고 싶었지만.
“……잘 그리셨군요.”
위팽은 이성적인 사내였다.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의 위대한 정신력을 발휘해 냈다.
물론 그에겐 정신 상태가 의심되는 주군을 질책할 만한 용기도 있었다.
“지금 밀린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겨우 이 그림 한 장 그렸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당연히 말이 안 되지.”
“그걸 아시는 분이…….”
“내가 세 시진 동안 하나만 붙잡고 있었을까 봐?”
“예?”
“당연히 하나 더 그렸지. 나중에 보여 주려고 했는데 역시 눈치가 빠르구먼.”
위팽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진위경이 건네는 화선지를 받아들었다. 진위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그림 설명을 시작했다.
“비무 직후 상황을 그려봤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수련동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젊은 영웅! 그리고 그 모습을 우러러보는 사람들!”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삼공자, 정말 많이 변했더군요.”
“그렇지? 나도 깜짝 놀랐지 뭔가.”
이소군과의 비무에서 승리한 진태경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수련동으로 돌아갔다. 전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진위경의 눈동자가 몽롱해졌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막내는 천응(天鷹)이야. 위팽, 자네에게는 들리지 않나? 태경이의 힘찬 날갯짓 소리가…….”
“날갯짓 소리는 모르겠고, 헛소리는 들립니다.”
위팽이 모든 걸 포기한 한숨과 함께 화선지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푸드득.
“헉.”
“거봐! 들리잖아!”
황급히 고개를 돌린 위팽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막 내려앉은 매 한 마리가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발목에는 작은 통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전서응(傳書鷹)입니다.”
새끼 때부터 고도의 훈련을 거쳐 투입된 연락용 매.
태원진가에도 두 마리밖에 없는 전서응은 극히 긴급한 일에만 날리게 되어 있었다.
“문제가 생겼군.”
진위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 * *
“한엽이라고 합니다.”
“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뜬금없는 자기소개였다. 물론 아는 얼굴이긴 했다.
수련동에 들어온 이후 가장 자주 본 사람이었으니까.
‘수련동 경비원이라고 해야 하나?’
경비원. 경비무사. 용어가 어찌 됐건 눈앞의 NPC는 수련동을 담당하는 태원진가의 무사였다. 내게 식사와 탕약을 가져다주는 것도 그의 임무 중 하나고.
‘그런데 갑자기 웬 통성명?’
지금까지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NPC다. 내게 악감정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아, 예. 저도 반가워요.”
떨떠름한 대답에도 경비원, 아니 한엽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저도 어제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자리? 아.”
비무를 말하는 거구나. 워낙 많은 사람이 몰렸으니 그중 한엽이 있었다고 해도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지요. 그 악랄한 항산검문의 이소군에게 맞서 싸우던 공자님의 영웅적인 모습을!”
악랄해? 영웅적인 모습?
‘그게 그렇게 되나?’
솔직히 현대인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그놈이 그놈이다.
아니, 오히려 이소군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을 정도다. 나도 한 사람의 오빠로서, 내 여동생 성격이 아무리 지랄맞아도 진태경 같은 놈이랑 연애질한다고 하면 눈 뒤집힐 것 같거든.
물론 항산검문의 태도나 제안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싸운 거고.
“보는 내내 가슴이 떨렸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한엽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이거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느 타이밍에서 멈춰야 할지 모르겠다.
“저도 한때 공자님을 오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문의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 무슨 진실?”
“그건…….”
한엽이 잔뜩 숨죽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에 닿은 뜨거운 숨결은 둘째치고, 그 내용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니까, 그 내용인즉슨.
“내가 태원진가의 비밀 병기다?”
“네, 네!”
한엽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의 모습은 모두 위장이고, 어릴 때부터 뼈를 깎는 수련을 거치며 문무겸전에 덕과 의를 갖춘, 잠. 잠……”
이 말만은 도저히 못 하겠다. 오그라드는 손발을 보호하려는 나를 대신해 한엽이 나섰다.
“산서잠룡! 지금 가문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자님께서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물에 몸을 숨긴 산서성의 잠룡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 제발. 살려 줘. 큰 소리로 외치지도 말아 줘.
잠룡이라니. 가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
‘만약 내가 죽는다면 사인은 수치사다, 수치사.’
극심한 심적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게, 한엽이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사실이지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저한테만 살짝…….”
안 되겠다. 누가 뿌렸는지 모를 이 말도 안 되고 오그라드는 헛소문을 진압하기로 다짐하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였다.
띠링.
– 태원진가에 [잠룡]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 소문에 의한 영향으로 명성이 10 오릅니다.
– 소문을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명성이 상승합니다.
나는 근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역시! 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환희에 찬 얼굴로 떠나는 한엽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시발…….’
아, 엄마 보고 싶다.
* * *
이소군과의 비무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나는 강하다.’
게임 초기, 튜토리얼 NPC로 나온 천력부를 일격에 쓰러트린 일이 있었다. 당시의 짐작이 지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강하다. 30레벨인 이소군을 어렵지 않게 쓰러트릴 정도로. 전투 경험의 차이도 영향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능력치가 월등하다.
‘힘, 체력, 민첩. 모두 비슷하거나 내가 약간 앞섰지.’
스탯(Stat). 즉 능력치의 차이다. 이 게임 속에서 나는 유저고, 시스템을 이용한 성장을 거듭해 왔다.
무공 습득, 수련과 여러 가지 퀘스트를 통해 빠른 속도로 스탯을 올렸고 그 결과는 비무에서 드러났다.
그리고 두 번째.
‘공력이 부족해.’
공력 하나만큼은 이소군이 나보다 앞섰다. 아니, 월등했다.
뭘 먹고 컸는지 창대로 수십 번을 후려쳐도, 마운트 자세에서 일방적으로 때려도 놈은 견뎌 냈다. 반격까지 하고 마지막 순간에도 공력을 끌어 올렸다.
‘현재 내 공력은 십 년.’
이소군은 내 두 배인 이십 년은 될 거다. 여기서 세 번째 사실을 깨달았다.
‘공력의 차이가 무공의 단계를 가른다.’
나는 일류인 이소군을 꺾었다. 하지만 시스템이 표시하는 내 경지는 여전히 이류다.
나는 그 이유가 공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부족한 단 하나의 능력치를 올렸을 때, 그때 비로소 내 경지도 오르지 않을까?
거기까지 정리를 마치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이거 완전히 헌터 등급 나누기네.’
최초 각성자는 반드시 지정된 센터에서 보유 능력과 적성 직업, 마나량을 체크받아야 하는데, 신체 능력이 아무리 높아도 마나량이 부족하면 등급 심사에서 찬바람을 맞는다.
마법사들이 최하 D등급부터 시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법사들은 직업 특성상 기본 마나부터가 빵빵하니까.
‘그래도 게임이 현실보단 낫네.’
여긴 그나마 성장이라도 하지. 현실은 그런 거 없다. 나만 해도 7년 동안 뭐 빠지게 굴러서 E급들 사이에 낀 거지, F급 헌터인 건 변함없었으니까.
아무튼 이제 대략적인 스케치는 그려졌다.
‘스탯은 충분. 공력은 시간 날 때마다 진가심법 돌리고, 경험치 위주로 퀘스트를 받자.’
이 빌어먹을 게임에 갇힌 지 일주일이 넘었다. 현실에서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지는 몰라도 구조받기는 글렀다.
확실하게 준비해서 끝내야지.
“퀘스트창 오픈.”
띠링.
퀘스트
[로그아웃]이제 당신은 이 험난한 무림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욱더 강해지고, 유명해지십시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등급 : 메인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일류] 경지 달성 (미완료)
Lv.30 달성 (17 / 30)
명성 500 달성 (70 / 500)
보상 : [로그아웃]
“아, 빡세다.”
나는 가부좌를 틀었다. 폐관 완료까지 이틀. 최대한 공력을 끌어모을 생각이었다.
– [잠룡]에 대한 소문의 영향으로 명성이 3 상승합니다.
틈틈이 울리는 명성 상승 메시지가 한줄기 위로가 되었다.
* * *
늦은 밤. 대회의장에 불이 켜졌다. 소가주인 진위경의 요청에 의해 비밀리에 이루어진 가로회의였다.
워낙 늦은 시각이었고, 갑작스러운 소집이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중진들도 있었다.
“갑자기 소집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그러니까. 이유도 안 알려 주고 이 늦은 시각에.”
“소가주가 아직 젊어서 그래. 절차와 예의를 몰라.”
“어제 일로 상당히 기세등등해졌나 봅니다. 하긴, 유일한 약점이 사라진 셈이니까요. 삼공자가 그 정도일 줄은 아무도 예상 못 했습니다.”
“장로원에서 김 좀 샜겠군. 삼공자 건으로 크게 한번 터트리려고 준비 중이었을 텐데.”
“허어, 지금이라도 대장로께서 나서서 가문을 바로 잡으셔야 할 터인데.”
“어허. 말조심…….”
그때,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회의실의 문이 양옆으로 열리고 진위경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중진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분분한 소가주였지만 진위경의 등장과 동시에 내려앉은 침묵은 그에게 우두머리의 자질이 있음을 알려 주는 증거였다.
“늦은 밤에 소집에 응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상석에 앉은 진위경은 첫 마디를 꺼냈지만 쉽사리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한단 말인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제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그 순간이었다.
“항산검문 때문이겠지.”
그건 기이한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늙은이의 그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젊었으며 거칠거나 부드러웠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설마.’
진위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았던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미끄러지듯이 걸어 들어오는 다섯 명의 노인. 그리고 가장 앞에 선 노인을 확인한 모두가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노야(老爺)를 뵙습니다!”
노야. 수년간 두문불출하던 대장로의 등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