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74
#173화
“그럼……?”
청풍의 놀라움이 섞인 눈빛에 화왕(火王) 적천강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나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느냐?”
“할아버지께서 가끔 말씀해 주셨어요.”
“오호. 그 친구도 나를 잊지 않았나 보구나. 뭐라 하더냐?”
“무공은 강한데 성격이 좀, 많이 더럽다고 하셨는데요.”
“…….”
사실 적천강은 사교성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사실 끔찍한 수준이다.
어린 시절 온갖 험한 꼴을 겪은 터라 사람에 대한 불신이 뿌리에 박혀 있었고, 그 후에는 괴팍한 성격의 사부 밑에서 자랐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정마대전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시비가 붙으셨다고 하던데. 당시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은 한 대씩 다 때려 보셨을 거라고…….”
“크흠, 다 때리긴 누가! 그리고 그때는 젊었으니 그런 것이다. 원래 혈기왕성할 때는…….”
“당시 환갑이셨던 걸로 아는데요.”
“커흐흐흠!”
본전도 못 건진 적천강이 헛기침만 하고 있을 때, 청풍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알고 보면 선한 분이니 혹 뵙게 되거든 당신을 대하듯이 하라고 하셨어요.”
적천강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음, 매종학 그 친구가 역시 나를 잘 알아.”
적천강이 정마대전에서 활약한 기간은 일 년 남짓.
초절정 고수인 두 사람이 같은 전장에 참여하는 일은 드물었고, 매종학과는 열 번 정도 만났을 뿐이지만 지기(知己)라 부를 수 있는 관계인 것은 확실했다.
‘손자 교육도 아주 잘 시켜 놨군.’
한데 잠깐, 그가 혼인을 했던가?
적천강은 청풍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봤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매종학의 얼굴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친손자는 아닌 것 같은데…….’
뭐, 상관없는 일이다.
핏줄이 섞였건 안 섞였건 녀석이 그의 후인인 것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특히 하는 행동이나 말본새를 보면 피가 아니라 영혼이 섞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천강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청풍에게 말했다.
“내 오늘 아주 든든한 손주 하나가 생겼구나. 자, 그럼 이 할아비에게 큰절 한 번 올려 보거라.”
“네?”
고개를 갸우뚱거린 청풍이 되물었다.
“왜요?”
“……왜요라니?”
순간 당황한 적천강이 말을 더듬었다.
“매종학이 그 친구가 자신을 대하듯 나를 대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인석아, 그럼 손주가 할아비를 봤으면 큰절을 올려야지.”
“저희 할아버지는 그런 거 신경 안 쓰세요. 앞뒤 꽉 막힌 노인네들이나 허례허식에 집착한다고 하셨어요.”
“……!”
졸지에 앞뒤 꽉 막힌 노인네가 된 적천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얼마 전에 배웠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청풍이 이마를 탁 쳤다.
“아, 맞다. 꼰대!”
“꼰, 뭐?”
“꼰대요. 비슷한 말로 꼰머가 있대요.”
뭐? 꼰대? 꼰머? 듣기에도 별로고, 어감도 별로다.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맥락은 알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산에만 틀어박혀 있었나.’
장강의 뒷물결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렇다고 하나뿐인 지기의 손주 놈을 두들겨 팰 수도 없고…….
적천강은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요즘 젊은 놈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뭐 그런 거냐?”
“몰라요. 저도 얼마 전에 처음 들었어요.”
“누구한테?”
“은인이요.”
적천강은 청풍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실눈을 뜨고 있는 젊은 놈과 눈이 딱 마주쳤다.
“마, 이리와 봐.”
* * *
봤나? 순간 눈이 마주친 것 같긴 한데…….
아냐, 못 봤어. 절대 못 봤어. 바로 눈 감았는데 그걸 어떻게 봐? 나는 눈을 감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치 내상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혹시 몰라 신음도 추가했다.
“끄으읍!”
“마, 이리 와 보라고.”
침착하자.
그냥 넘겨짚는 말이다. 여기서 냉큼 넘어가면 삼류다.
이럴 때일수록 항문에 힘을 빡 주고 열연을 이어 가야 절정 고수다.
“흐으으읍!”
“억지로 힘주지 마라. 그러다가 똥 나오는 놈 여럿 봤다.”
그것도 그러네. 적천강의 꿀팁에 나는 살짝 힘을 풀었다.
“허으으읍!”
“허어, 그놈 참. 마지막이다. 네가 올래, 노부가 갈까?”
마지막. 겨우 이런 단어에 속으면 안 된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텨야 한다.
“노부가 가지 뭐. 넌 오늘 죽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눈을 떴다. 불길이 활활 쏟아지는 두 눈이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실로 화왕(火王)이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모습이다.
‘시바, 화왕이라니.’
형이 여기서 왜 나와…….
열 번, 스무 번을 생각해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저 땅딸막한 노인이 바로 천하에서 스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초절정 고수, 화왕이다.
‘어쩐지 처음부터 촉이 오더라.’
모르긴 몰라도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의 정체를 가장 처음 알아차린 사람이 나일 것이다.
적천강의 내력이 밀려 들어온 순간, 시스템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으니까.
띠링.
– 당신의 [열양지기]가 열렬히 호응합니다.
– 신체 내부에 침투한 공력과 동화됩니다.
– 공력이 미약하게 상승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처음에는 산 채로 통구이가 되나 싶었는데, 금방 국밥 한 그릇 먹은 것처럼 뱃속이 뜨뜻해지더니 공력까지 상승했단다.
‘뭐여, 이게.’
처음에는 얼떨떨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지,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 태평할 때가 아니었다.
‘잠깐만. 내 열양지기는 열화신단을 먹고 생긴 건데.’
같은 열양지기라고 해서 타격을 안 받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흡수까지 해 버렸다.
잠깐 치열한 고민이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 동류(同流)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건 저 노인네가 열화문 소속이라는 말인데, 내가 알기로 열화문은 일인전승이며 당대 문주가 아마…….
‘화왕……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지. 사십 년 가까이 잠수 타고 있던 양반이 여길 왜 와?’
그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암 환자가 거치는 5단계의 심리 중 첫 단계는 ‘부정’이라더라.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5분도 채 되지 않아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검성이랑 절친 사이에 정마대전 당시 구화산에 살았고 마교도들이 불을 질러서 싹 다 죽여 버렸고…….’
시벌, 화왕이네?
적천강과 청풍의 대화를 들을수록 정체가 확실해졌다.
당사자의 입으로 자신이 직접 화왕이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이건 모르는 게 병신인 수준이다.
그렇게 마침내 수용 단계에 다다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좆 됐다.’
내 일섬으로 몸의 절반이 날아간 채 죽은 조필의 모습이 떠오른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이름 없는 검]과 [화염신장]의 비급도 마찬가지.
심지어 열화신단은 이미 꿀꺽해서 단전에 잘 보관하고 있다.
‘아, 속 쓰려.’
조필이 저 노인네의 제자여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다.
머릿속이 복잡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떼는 내게 적천강이 손가락을 폈다.
“셋을 센다. 하나.”
쐐애애액!
혼신의 힘을 다해 쇄도했다. 화왕이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
“넵!”
“깜짝이야, 귀 안 먹었으니까 작게 말해!”
빡!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뒤통수가 얼얼해진다. 무림에서 이런 식으로 얻어맞아 보는 건 처음이다.
물론 항의할 생각 따위는 없다. 상대는 성질 더러운 초절정 고수니까.
입을 꾹 다무는 나를 바라보는 적천강의 눈이 가늘어진다.
“이놈 보게. 아까보다 훨씬 얌전해졌는데?”
“아닙니다.”
“아니기는. 노부를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눈깔 뜨는 것부터가 다른데.”
곁에 있던 청풍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은인, 몸은 괜찮으세요?”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죽어 간다.
나는 반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라고?”
깜빡이도 안 켜고 고개를 쑥 내민 적천강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흠. 그러고 보니 한 식경은 꼼짝 못 하고 운기를 해야 할 놈이 왜 이렇게 멀쩡해?”
왜 멀쩡하긴. 열화신단을 흡수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수상쩍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입 안이 바짝바짝 탄다.
“아까부터 볼수록 묘한 놈일세. 네놈이 어디 문하라고?”
“태원진갑니다.”
“태원진가…… 분명 어디서 들어 봤는데.”
미간을 좁히고 있던 적천강이 아, 하고 탄성을 토했다.
“화양검(火魎檢)이었던가? 맞아, 진백양인가 하는 그 녀석이 태원진가 출신이었지.”
화양검 진백양. 바로 대장로다.
저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나는 입술을 핥았다.
“맞습니다.”
“오다가다 몇 번 마주쳤는데 괜찮은 녀석이었어. 어딘가 음울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뭐 그때야 다들 그랬으니까. 예의도 깍듯했고.”
사람에게 남는 건 추억밖에 없다. 특히 적천강처럼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라면 더더욱.
‘그런데 왜 하필 그 추억이 대장로냐.’
심지어 썩 괜찮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장로가 그런 일을 벌이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정마대전 당시의 그는 유력한 가주 후보에 꼽힐 정도로 고강한 무공에다가 인망도 두터웠으니까.
“네 녀석도 성취를 보아하니 태원진가의 핏줄 같은데. 화양검과는 무슨 관계더냐?”
“제 작은 조부님 되시는데요.”
실상은 죽고 죽이는 관계였지만, 결코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한 핏줄이라는 말에 적천강의 눈빛이 한결 누그러졌다.
“오호. 그래?”
“옙.”
“나이는 몇인고?”
“올해로 스물, 약관입니다.”
“보아하니 열양지기를 익힌 것 같은데. 화양검에게 한 수 지도받은 것이냐?”
“……예.”
지도받긴 했다. 두어 달 전쯤 팔천협에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지도를 해 주던지, 하마터면 검기에 정수리가 쪼개질 뻔했지.
“나이에 비해 성취가 상당히 뛰어나구나. 석년의 화양검보다 훨씬 나아.”
이제는 덕담까지 해 주는 적천강이다.
전체적으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다음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래, 그는 잘 지내고 있느냐?”
“어…….”
그게, 무덤에서 잘 지내고 있긴 한데요.
“무공도 제법 늘었겠군. 이참에 얼굴이나 보고 갈까?”
“그…….”
방문은 되는데, 얼굴은 못 볼걸요.
대장로의 무덤은 태원진가의, 말하자면 가문 공동묘지 한구석에 있다.
가문의 중진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진위경이 밀어붙였다. 조부인 전대 가주의 실수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다.
“술이나 한잔해야겠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박대하진 않겠지.”
대장로의 무덤가에 술을 뿌리는 적천강의 모습을 상상했다.
젠장, 더 이상은 무리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무엇이냐? 어디 말해 보거라.”
“돌아가셨습니다.”
“……응?”
“두어 달 쯤 전에, 그만.”
잠깐 말이 없던 적천강이 중얼거렸다.
“아직 팔팔한 나이에 벌써?”
“…….”
팔팔하긴. 팔순이 넘었는데.
물론 고강한 공력의 소유자였으니 가만히 있었다면 이십 년은 더 살았을지 모르겠다.
“어쩌다가?”
“전사(戰事)하셨습니다.”
“전사라고?”
적천강의 눈빛에 언뜻 노기가 드러났다.
“혹시 마교 놈들인가?”
“그건 아닙니다. 일이 워낙 복잡하고 예민해서 말씀드리기가 좀.”
“어떤 놈이 죽였는지는 알고?”
“…….”
“원수는 갚았나? 태원진가 입장에서는 뼈째로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인데.”
듣고 있으니 뼈가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다.
내가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한 적천강이 말을 멈춘다.
좋아, 완벽했어. 혁무진이 기절해 있던 게 신의 한 수였다.
그놈이 깨어 있었으면 아까부터 나를 힐끔거리면서 이놈이 범인이에요. 이놈이 죽였어요. 뭐 그런 티를 팍팍 냈을 테니까.
‘됐어. 이 자리만 벗어나면 빨리 튀자. 아예 로그아웃을 해 버리든가 해야지.’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어? 화양검 진백양이면 은인이 죽인 사람 아니에요? 맞죠?”
저 새끼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