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76
#175화
낡은 객실 안, 작달막한 체구의 노인이 침상에 누워 있는 청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원진가의 진태경이라.’
아직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진태경의 얼굴은 평온했다. 얼핏 보면 깊은 잠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화염신장에 당하고도 겨우 이 정도란 말이지.’
노인, 적천강은 내심 혀를 찼다.
다름 아닌 자신의 손으로 펼친 초절정 무공이다.
비록 힘을 조절했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제 막 절정의 벽을 넘어선 어린놈이 감당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답은 하나뿐이었고, 적천강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이 녀석, 나와 같은 종류의 열양지기를 익혔다.’
열양지기라고 해서 다 같은 열양지기가 아니다.
공력은 어떤 면에서 병장기와 닮았다. 본질은 하나지만 그 형태는 여러 가지다.
상승의 내공심법의 경우 화산파의 자하신공처럼 각각의 특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적천강이 당대 문주로 있는 열화문(烈火門)에도 부합되는 사실이었다.
‘저놈이 열화신공(烈火神功)을 익혔을 리는 없다.’
열화문은 지난 수백 년간 일인전승의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 왔다.
계승하는 과정에서 일체의 유출이 없었다는 것은 당대 문주인 적천강도 잘 아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태경에게서 사문의 흔적이 보인다는 것은…….
‘역시 그것이겠지.’
열화신단(烈火神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뿐이다.
적천강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를 아는 이들이 봤다면 제 눈을 의심할 만큼 쓸쓸한 표정으로.
“결국 그리되었나.”
노쇠한 목소리는 낡은 객실 안을 공허하게 맴돌다 흩어졌다. 한참 동안이나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뭔가를 쫓던 적천강의 시선이 진태경의 얼굴에 닿았다.
악몽에라도 시달리는 듯,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노부가 네 녀석을 어찌해야 할까…….”
그때, 진태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으으응, 기모찌이.”
“…….”
기모, 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듣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불쾌해진다.
연신 몸을 움찔거리며 기모찌를 연발하는 진태경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상한 놈 같으니라고.’
그가 자리를 뜬 것은 ‘기모찌’가 ‘야메떼’로 바뀐 후였다.
더 이상 불쾌감을 버티지 못하고 객실을 뛰쳐나온 적천강의 팔뚝에는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역시 사술인가.’
의심이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 * *
눈을 뜨자 낡은 천장이 보인다. 붉게 흔들리는 호롱불과 어둑해진 창밖 풍경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우.”
살았구나. 미약한 내상을 입긴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다.
아니, 상대가 화왕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기적이나 다름없다.
‘진심으로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건가?’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화왕한테는 안 된다. 그건 청풍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이렇게 침상에 누워 있다는 건…….
“일어나셨어요?”
“으헉!”
나는 잉어처럼 펄떡 뛰어올랐다. 어두운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뭔가가 슬그머니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잖아, 이 미친놈아!”
혁무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한두 번 보는 얼굴도 아닌데.”
“네 얼굴을 좀 봐라. 적응이 되나.”
“제 얼굴이 뭐가 어때서요? 이만하면 잘생겼죠. 제가 어릴 때는 부모님께서도 걱정하셨다고요.”
“그 얼굴로 살기 힘들까 봐?”
“아뇨. 사내아이치고 너무 예쁘장하게 생겨서 납치당할까 봐서요.”
제정신인가.
저 정도 인상이면 납치를 걱정할 게 아니라 납치범이 될까를 걱정했을 텐데.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드려라.”
“나중에요.”
어기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오던 혁무진이 헉,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아, 아악! 잠시만.”
“뭐야, 왜 그래?”
혁무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쥐, 쥐 났습니다.”
“……오늘 진짜 가지가지 하는구나. 너 무인 맞냐?”
“오래 앉아 있으면 그럴 수도 있죠. 제가 누구 때문에 저 구석에 박혀 있었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인데.”
“자꾸 이상한 소리 하셨잖아요. 기목지, 야맥대.”
그건 마치 영혼에 새겨진 언어.
익숙하다 못해 친숙하기까지 하다. 흠칫한 내가 물었다.
“……내가?”
“예. 소름이 끼쳐서 밖에 나가 있었더니, 적 대협이 불에 타 죽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들어가 있으래요. 조장님 깨면 바로 보고하라고.”
혁무진이 서러움에 북받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술일지도 모르니까 귀 막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도 조장님은 계속, 막. 어? 아아, 기목지, 기목지 그러시고.”
“……그만해, 인마.”
이건 진짜 역대급 수치 플레이다. 어쩐지 일어났을 때 기분이 짜릿하더라니, 상당히 좋은 꿈을 꾼 모양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이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음. 클린해. 아무 문제 없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다른 문제에 신경을 쓸 차례다.
사안의 중요성으로 따지자면 바로 앞선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문제다.
무려 목숨이 달렸으니까.
“그 노인네. 지금 어디 있어?”
누구를 가리키는 단어인지는 명백하다. 혁무진이 한껏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 층에 있습니다. 청 소협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중이에요.”
“그래? 얼마나?”
“그건 저도 깬 지 얼마 안 돼서 정확히는 모르고, 아까 점소이한테 슬쩍 물어보니 세 시진은 넘었답니다.”
굳이 공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절정의 경지에 오르며 한 단계 예민해진 청력은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고성방가를 또렷하게 전달해 왔다.
‘신나서 날뛰는 것 보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먹부터 날리는 노인네, 눈치 없이 끼어들어서 지금 같은 불상사를 만든 놈.
맘 같아서는 당장 술병으로 저 불한당들의 뚝배기를 깬 뒤 정의 구현을 외치고 싶지만 참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참을 수밖에 없는 거지만.
“후우.”
힘없는 게 죄다, 죄.
한숨을 푹 내쉬는 내게 혁무진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기, 조장.”
“왜?”
“이제 슬슬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내려가긴 어딜 내려가.”
“아까 적 대협께서 조장 정신 차리면 바로 내려오라고…….”
“적 대협 같은 소리 하네. 저 노인네가 어떻게 대협이야?”
“조장도 막상 앞에 있으면 대협이라고 하실 거잖아요.”
“…….”
그건 그렇지.
하지만 지금 시키는 대로 내려갔다가는 호랑이 아가리에 뛰어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나는 탁자 위에 걸쳐져 있는 옷가지들을 빛의 속도로 입기 시작했다.
“뭐 하세요?”
“튈 준비.”
“예?”
“튄다고. 왜, 너도 따라올래?”
혁무진이 당황한 얼굴로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니, 왜 도망쳐요?”
“저 노인네가 언제 수틀려서 날 태워 죽일지 모르는데, 너 같으면 안 튀고 싶겠냐?”
“아까 그 일 때문에 그러세요?”
“아까 그 일이라면, 대장로?”
“예. 그거라면 이미 저와 청풍 소협이…….”
나는 단호하게 녀석의 말을 잘라냈다.
“진작 다 설명했겠지. 오해는 풀렸을 거고.”
“어, 알고 계시네요.”
“내가 바보냐?”
정오 무렵에 기절했으니 적어도 반나절이 흘렀다. 적천강이 아무리 다혈질인 노인네라고 해도 진상을 파악하려는 조사 정도는 했을 게 분명하다.
청풍과 혁무진도 나름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을 테고.
내 말을 들은 혁무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요.”
일분일초가 아깝다. 나는 빠르게 품을 뒤지는 척, 인벤토리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흔들었다.
“옜다, 이유.”
[화염신장]낡은 서책의 겉면을 확인한 혁무진이 중얼거렸다.
“아, 시바…….”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열화문의 무공인 화염신장의 비급을 갖고 있던 조필과 적천강은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요?”
“…….”
“슬슬 너도 감이 오지? 사제지간이라는 것에 내 손모가지와 전 재산 다 건다. 넌 뭐 걸래?”
혁무진은 아무것도 걸지 않았다. 그 대신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필사적인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자, 잠깐만요. 두 사람이 사제지간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사제지간이 아니면 뭔데. 부자지간? 성격 지랄 맞은 거 보니까 그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긴 하다. 그치?”
“조필이 적 대협의 물건을 훔친 걸 수도 있잖습니까.”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얼마나 세게 뀌었는지 코딱지가 튀어 나갈 정도였다.
“화왕이 동네 할아버지냐? 누가 저 노인네 물건을 훔쳐?”
집 근처에 불 질렀다고 천 명의 마교도를 죽여 버린 게 바로 화왕이다.
조필이 미친놈이었긴 해도 간에 보톡스를 맞지 않는 이상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혁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제자라고 쳐요.”
“무조건 제자라니까. 그리고 안 따라올 거면 빨리 손 놔. 나 바빠.”
혁무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설령 조필이 적 대협의 제자라고 해도 저희는 본분을 다했을 뿐입니다. 심지어 먼저 죽이려고 달려든 것도 조필이잖습니까.”
“그래, 어차피 너나 청풍은 무사할 테니 나 대신 그렇게 전해 줘.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조장!”
“자, 무진아.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 절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저 성질 더러운 노인네가 제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냥 넘어가 준다고 쳐.”
나는 팔뚝을 붙잡은 녀석의 손을 하나씩 떼어 내며 물었다.
“그럼 조필이 훔쳐 나왔던 건 다시 돌려줘야겠지?”
혁무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꿀꺽했다가 불에 타 죽을 일 있습니까?”
“그런데 못 돌려준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예? 조장 혹시, 지금 화염신장이 탐나서…….”
“내가 미쳤냐?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내 인생 지론이야. 그래서 일부러 똥도 그렇게 싸!”
평소 같았으면 더러운 얘길 한다며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을 놈이지만 지금은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킨다.
“그럼 뭐가 문젠데요?”
“조필이 갖고 있던 게 화염신장의 비급만이 아니었으니까 문제지.”
나는 손가락 세 개를 쫙 펴고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하나, 화염신장. 둘, 만년한철 검. 그리고 마지막 셋.
“열화신단.”
만년한철 검에서 이미 입을 딱 벌리고 있던 혁무진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혹시 그때 그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공력을 엄청나게 증진시켜 주는 대신 몸이 활활 불탄다는?”
“응. 오래전에 화염신장의 비급이랑 같이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거.”
“그거, 그거 지금 어디 있어요?”
“무진아.”
나는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북쪽, 항산검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우리 지난번에 항산검문 갔던 거 기억나지?”
“갑자기 그건 왜.”
“적풍단주, 그놈이 생각 이상으로 세더라고. 철무백 그 양반에 진무경까지 꺾은 놈을 내가 무슨 수로 이겨?”
“자, 자, 잠시만요. 그럼 그때?”
“응. 약발 좋더라.”
나는 이제 막 임신 테스트기를 확인한 3주 차 임산부의 마음으로 배를 쓰다듬었다.
“여기 넣어 놨어. 열화신단.”
“…….”
“그거 열화문의 비전 영단이라더라. 돌려주려면 배 가르고 피 뽑아야 돼.”
“…….”
“그러니까 날 더 이상 막지 마라.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살길을 찾아 떠나…….”
그 순간, 혁무진은 그 어느 때보다 민첩하게 움직였다.
타다다닥, 휙!
늘 갖고 있던 행낭을 꼭 끌어안은 채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는 녀석의 모습에서, 나는 한 마리 새를 보았다.
‘아니, 저 새끼가.’
감히 나보다 먼저 탈출을 시도해?
그것도 은자랑 식량까지 든 행낭까지 챙겨서?
“야, 혁무진!”
숨죽인 외침을 토해 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해탈한 눈빛으로 나를 쓱 돌아본 녀석의 신형이 이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이런 시벌.”
나도 빨리 도망가야 한다.
황급히 뛰어가 창문 밖으로 몸을 날리려던 그때였다.
빡! 털썩!
어느새 열심히 뛰어가던 혁무진이 총에 맞은 것처럼 픽 쓰러진다.
녀석의 관자놀이를 명중시킨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닭 뼈?”
그리고 다음 순간.
저 아래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놈. 닭과 오리도 구분 못 하느냐?”
저벅, 저벅.
작은 그림자가 객잔 입구의 호롱불을 따라 흔들린다. 이내 불쑥 나타난 주름진 얼굴이 창가에 몸을 걸친 나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어디 가는 길이었느냐?”
나는 14,000,605개의 미래를 본 끝에 가장 적절한 대답을 도출해 냈다.
“측간이요.”
“피똥 싸고 싶으냐?”
“아뇨.”
그래, 안 통할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