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85
#184화
수백이 아니라 천 명도 될 것 같다. 우리는 태원진가 무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엄청나게 몰려든 인파 속을 헤쳐 나갔다.
‘기분 끝내주네.’
중화권 스타가 된 기분이다. 한류 열풍 뭐 그런 거.
아니, 실제로 한국인이니까 틀린 말은 아닌가?
“산서잠룡! 여기 한 번만 봐 주시오!”
“꺄악! 진 소협!”
“응애애애!”
똥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했다.
아무리 매화삼절이 유명해도 산서성의 자랑, 태원의 아들을 홈그라운드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내게 철우가 속삭였다.
“입꼬리 올라간 것 봐라. 좋냐?”
“입꼬리 내려간 것 봐라. 우냐?”
“이 산서성 촌놈이.”
“네, 다음 자연인.”
“이런 개…….”
“뭐, 이…….”
다시 한번 불꽃이 튀려던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삼공자!
위팽이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당장 뺨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어 하는 얼굴이다.
철우에게도 비슷한 전음을 보냈는지 놈도 불만 섞인 얼굴로 한마디를 툭 덧붙였다.
“봐줬다.”
나는 코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을 듣고 철우, 저놈이 화산파에서도 제법 잘 나가는 후기지수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꽤 놀랐지만 그뿐이었다.
‘매화삼절이면 뭐, 어쩌라고?’
화산파의 무공이라면 이미 충분히 겪어 봤다. 내 옆에서 털레털레 걷고 있는 어떤 한 사람 덕분에.
“배고파. 배고파요.”
“…….”
언제 봐도 희한한 놈이지만 청풍이 화산파의 진산절학을 섭렵한 절정 고수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철우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더라도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놈이 나보다 앞서는 거라고는 화산파라는 배경뿐이다.
“…….”
아, 아니다. 방금 했던 말 취소.
다시 생각해 보니까 배경 차이가 심각하다. 태원진가의 위상이 아무리 올랐어도 구파일방은 압도적이다.
‘시벌, 졌네.’
내가 생각하는 구파일방, 천하오대세가는 무림의 기업 연합이나 다름없다. 안 그래도 힘센 대기업들이 연합체를 꾸려서 다구리를 놓으니 당할 놈들이 없는 거다.
다행히 나름 정파랍시고 골목 상권까지 침범하진 않아서 태원진가 같은 중소기업도 위로 치고 올라가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화산파가 이 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건 확실하고.’
화산일학 백무성.
혁무진이 떠들어 댄 것들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화산파 차기 장문인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화산파의 후기지수 중 그에 견줄 만한 유일한 상대가 있긴 한데…….
“은인, 저 진짜 배고파요. 혹시 만두 남은 거 없어요?”
“네. 없는데요.”
“앗. 아아아…….”
청풍은 안 될 거야, 아마.
저 인간이 화산파 장문인이 되는 것보다 화산파 도사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게 더 빠를 거다.
제삼자인 내 눈에도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은데 화산파 사람들이 보면 오죽할까.
‘나중에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하고 나면, 그때가 돼서야 화산파 장문인도 해 보고 싶다고 할 놈이지. 음.’
내가 상당히 신빙성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 철우가 짜증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거, 만두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소? 제발 입 좀 다물고 갑시다.”
“……?”
“……?”
“……?”
순간 나와 위팽, 혁무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철우가 흠칫 놀랐다.
“뭐, 뭔데?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 거요?”
“야, 너 혹시.”
“철 소협, 모르시오?”
“에이, 설마요. 명색이 매화삼절이신데 그걸 모르실 리가.”
줄줄이 이어지는 반응에 철우가 황소 같은 눈을 뒤룩뒤룩 굴렸다.
“뭐야? 왜 이러는 건데?”
왜 이러긴, 사문의 어르신도 못 알아보니 이러지.
항렬로 따졌을 때, 청풍은 검성의 제자이자 현 화산파 장문인인 천검진인의 막내 사제가 된다.
철우에게는 스승님의 사제, 즉 사숙(師叔)인 셈이다.
‘아, 생각해 보니 모를 수도 있겠네.’
청풍은 검성 매종학이 은거 중에 키운 제자다. 문파 내부에서도 극소수만이 그의 얼굴과 정체를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사숙을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 철우를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러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아냐,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이런 니기미, 환장하겠네.”
철우가 답답함에 가슴을 칠 때, 우리는 군중들의 환호를 뒤로하고 태원진가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동시에 사방에서 백여 쌍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날아들었다. 문밖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저 청년이…….”
“산서잠룡이군요. 듣던 대로 영준합니다.”
“패화권도 있군. 천검진인의 둘째 제자라지?”
“그런데 옆에 있는 두 청년은 누굽니까?”
“글쎄올시다.”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섞여 있는 백여 명의 사람들. 옷차림과 태도에서 그들이 가진 부와 여유가 묻어 나온다.
‘산서성의 실력자들.’
그들 중에는 일문(一門)의 문주들도 있고, 상계(商界)의 부호들도 있다. 이번 회합에 정식으로 초청받을 만큼의 세력과 능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얼핏 보면 귀족들의 무도회 같기도 하고.’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여 걸음을 옮겼다.
산서성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저들이 이 회합의 조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그리고 저들이 보내는 호기심과 선망 어린 시선에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하곡문(河曲門)이라는 자그마한 문파를 이끌고 있는 장세팔이라고 하오.”
“아, 네.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평소 태원진가와 산서잠룡의 명성을 마음 깊이 흠모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중년 무인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소인은 양천 근처에서 작은 무관을 운영 중인…….”
“예? 아, 예.”
“진 소협. 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자리를 옮기는 것이…….”
“지금이요? 그건 좀.”
“이 아이는 내 여식이오. 산서잠룡을 꼭 한번 보고 싶다기에 데려왔는데 혹시 마음에 든다면…….”
“예, 예.”
“오오, 그럼 바로 매파를 보내면 되겠소?”
“잠깐, 잠깐만요! 잘못 대답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사방에서 쏟아지는 악수의 요청, 아니 포권 세례에 혼이 쏙 빠질 지경이다.
때마침 위팽이 나서지 않았다면 온갖 미사여구가 들어간 청탁과 혼례 요청을 죄다 수락해야 했을 것이다.
“모두 자중하시오!”
공력이 실린 절정 고수의 외침에 사람들이 움찔한 틈을 타 자리를 빠져나왔다. 철우가 질렸다는 듯이 혀를 내두른다.
“극성이군. 산서성 사람들은 죄다 저런가?”
그럴 리가 있냐. 이번 경우가 좀 특수한 거지.
일행 중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위팽뿐이었다. 그가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자주 겪을 일이니 차차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오늘 같은 일을 자주 겪어야 한다고요?”
“삼공자는 태원진가의 직계니까요.”
“방금 혼인만 다섯 번 치를 뻔했어요.”
“반려자가 없는 전도유망한 후기지수에게는 당연한 일이죠.”
“아까 들어 보니 저랑 태중 혼약을 맺었다는 사람도 있던데…… 그거 사실입니까?”
“사실이면 어떻고 거짓이면 어떻습니까? 좋게 생각하십시오.”
머리털이 쭈뼛 선다. 현실에서 27년간 모태 솔로로 살았는데 난데없이 중매로 결혼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그것도 만리타향인 무림에서.
‘안 돼. 나한테는 송이 씨가 있어.’
나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외쳤다.
“아니, 혼인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걸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죠! 남녀 간의 사랑! 순수한 감정! 저한테는 그런 것도 없어요?”
“예. 없습니다.”
“왜! 어째서!”
위팽이 벌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그게 열여섯 살 때부터 기루에 들락거린 사람이 할 소립니까? 은자 뿌리면서 양심도 같이 뿌렸어요?”
“…….”
“조용히 갑시다.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라리 가 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기루는 시발, 헌팅 술집도 못 가 봤는데.
말도 못 하고 내심 피눈물만 흘리는 내게 철우가 슬쩍 물었다.
“사실이냐?”
“뭐가.”
“열여섯 살 때부터 기루 간 거.”
“알 거 없어. 그리고 갑자기 그딴 건 왜 물어봐?”
순간 흠칫한 철우가 횡설수설했다.
“그, 뭐랄까. 개인적인 호기심이랄까. 우직하게 무인의 길만을 걸어온 한 사내의…….”
“기루에 가 보고 싶다고?”
“커흐흠!”
“……무인의 길이나 마저 걸어라. 괜히 샛길로 빠지지 말고.”
한심한 감정을 가득 담아 대답한 그때였다.
“진 소협의 말씀이 백번 옳다. 본산에서 내려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무인의 본분을 잊은 것이냐?”
엄하면서도 웃음기가 담긴 말투.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말끔한 인상의 사내였다.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그 대상은 나도, 위팽도 아니었다.
“화산파 일대제자 백무성이 사숙을 뵙습니다.”
잠깐 침묵하던 청풍이 대답했다.
“누구세요?”
* * *
환갑쯤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키에 쭉 째진 눈매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거스러미가 돋아난 입술 사이에서는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름도 없는 무명 소졸에게 개망신을 당했다?”
“자, 장로님. 그것이 아니오라…….”
노인의 앞에 선 세 명의 사내는 땀을 뻘뻘 흘렸다.
종남삼수(終南三手)라 불리는 그들이지만 사문의 존장 앞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상대가 종남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이자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노호검객(怒號劍客)이라면 더더욱.
“그럼 무엇이냐? 아무리 들어도 노부의 귀에는 네놈들이 대 종남파의 이름에 똥칠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날카로운 눈빛에 종남삼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호검객의 불호령이 떨어지려던 찰나,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한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명 소졸이 아니었습니다.”
“뭐라?”
팔에 부목을 댄 사내, 공일혁이 말을 이었다.
“검성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어찌나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잠시 말을 잊고 있던 노호검객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검성?”
“예.”
“오래전부터 은거 중이던 검성이 제자를 키웠다고?”
“처음에는 저희도 의심했습니다만……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근거는?”
“화산파의 속자제자인 이풍이 산서성 군문에 몸담고 있습니다. 놈의 반응으로 보아 확실한 듯합니다.”
“이풍?”
안 그래도 주름진 미간이 찌푸려진다.
화산파의 속가제자 따위를 기억할 정도로 그의 기억력은 뛰어나지 못했다.
“그게 전부더냐?”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공일혁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약관의 나이에 화산파의 진산절학을 절정까지 익힌 놈입니다. 본산의 적전 제자들에게만 허락된 무공들을 줄줄이 펼쳐 내는데…….”
잠시 후, 당시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노호검객은 말없이 검갑을 문질렀다.
‘검성의 제자라, 검성의 제자.’
검성이 은거한 지 이미 수십 년이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제자가 갑자기 무림에 나오다니?
믿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기운 후였다.
‘적어도 확인 정도는 해 봐야겠지.’
한참 동안이나 침묵하던 노호검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들짝 놀란 종남삼수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안내해라.”
“어, 어디로 말입니까?”
“혹시 검성의 제자…….”
당황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공일혁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제자가 알기로, 놈은 태원진가의 자제와 동행중입니다.”
“태원진가의 자제라면, 아까 네가 말한 그 진태경인가 하는 놈이냐?”
“예. 이곳에서 한나절 거리지요.”
노호검객이 혀를 찼다.
“영악한 놈. 네가 노부를 찾아온 이유도 그것이겠지.”
“불민한 제자들로 인해 대 종남파의 이름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누구보다 본문을 아끼시는 분 아니십니까? 때마침 장로님께서 용무를 보러 근방에 와 계시다는 소식을 들어서…….”
“집어치워라. 어차피 네 얘기를 들어 보니 그 진태경인가 하는 놈도 여간 오만방자한 놈이 아니더군.”
“맞습니다. 그런 놈은 호되게 혼쭐을 내 줘야지요.”
공일혁이 막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마침 태원진가에서 회합이 열리고 있다 합니다.”
“회합?”
“산서성의 모든 문파들을 초청해서 위세를 과시하는 자리지요.”
“본문을 깔아뭉개고 회합을 열어?”
노호검객의 눈에 노기가 서렸다.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 앞장서라.”
“장로님의 명을 받듭니다.”
고개 숙인 공일혁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