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87
#186화
진위경과 위팽.
이야기를 이어 갈수록 두 사람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경악, 불신. 그리고 다시 경악.
“그, 그게 정녕 사실이더냐?”
하도 길게 이야기를 했더니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나는 피곤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순도 십 할의 진실이니까 믿으세요.”
아까부터 넋이 나가 있던 위팽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삼공자. 이게 다 거짓말이면 진짜 나 죽고 당신 죽는 겁니다.”
“십 할이라니까요. 십 할!”
“아니, 그래도…….”
“아, 거짓 한 톨 안 섞인 십 할의 진실이라고요. 이런 십 할!”
“…….”
왠지 기분이 더러운데, 하는 얼굴로 멈칫한 위팽을 향해 검과 비급을 흔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곱씹어 볼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정 의심이 가시면 직접 살펴보세요. 화염신장의 비급, 만년한철로 만든 검!”
“허억! 치우십시오. 어서!”
뱀파이어한테 십자가를 들이밀어도 이 정도 반응은 안 나올 거다.
“왜 그래요?”
위팽이 기겁한 얼굴로 대답했다.
“화염신장의 비급을 확인해 보라니, 본가를 멸문시키려고 작정했습니까?”
“아, 맞다. 그랬었지.”
화왕의 독문무공을 훔쳐봤다가는 뜨거운 맛을 보게 될 거다. 온몸이 불탈 정도의 뜨거운 맛을.
“어쨌든 전부 사실입니다. 여기 증인들도 있어요. 그렇지?”
죽은 듯이 구석에 앉아 있던 혁무진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외람되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종류가 뭔지도 모르는 다과를 쑤셔 넣던 청풍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오와어오!”
“…….”
저 증언은 별로 효력이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저놈의 다과는 도대체 언제까지 처먹는 거야. 화수분인가?
“이보게 위팽, 아무래도 태경이의 말이 사실인 것 같네만.”
진위경의 말에 위팽도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군요.”
“화왕, 바로 그 화왕이란 말이지.”
진위경이 긴 숨을 내뱉었다. 망설이던 그의 손이 탁자에 올려 둔 [이름 없는 검]을 집어 들었다.
스릉.
투박한 검갑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새하얀 검신. 서릿발 같은 예기를 뿜어내는 그것을 바라보던 진위경이 중얼거렸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잠시 잊고 있었다. 진위경이 태원진가의 소가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검객이라는 것을.
나처럼 아이템 설명창을 보지 않고도 병기의 상태를 정확히 읽어 낸 그는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태경아.”
“예.”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진위경이 나를 ‘막내’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진중한 이야기를 할 때라는 의미다.
“이것들이 어떤 물건인지 아느냐?”
“귀물(貴物) 아닌가요? 천금을 들여도 얻기 힘든.”
천하를 오시할 수 있는 초절정 무공과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희대의 명검.
내가 아는 무림인이라는 족속은 이것들을 얻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 것이다.
진위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다.”
“네?”
“이것은 귀물(鬼物)이다. 사람의 혼을 빼놓고 미치게 만드는.”
“아.”
“그 귀신의 이름을 아느냐?”
나는 작게 뇌까렸다.
“탐욕.”
“그래, 탐욕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아주 끈질기고 위험한 놈이지.”
안다. 직접 겪어 봤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수년 전 그날, 내 마음에 탐욕이란 놈이 깃들었고 그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야 했으니까.
“화왕이 어떤 의도로 네게 이런 위험한 물건들을 맡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에 관한 모든 것들을 철저히 불문에 부쳐야 한다. 알겠느냐?”
시선과 자세는 오로지 나를 향하고 있지만 이 방 안의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나와 혁무진, 마지막으로 청풍까지.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대답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소가주님.”
“아우하해호, 마아하해오.”
……저놈의 주둥이를 확 그냥.
* * *
진위경은 두꺼운 천을 걷어 올렸다. 격자무늬 창밖으로 멀어지는 진태경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 뒤에 매어져 있는 투박한 검갑에 부딪친 햇살이 산산이 부서졌다.
“날씨 한 번 빌어먹게 좋군.”
“아까는 끝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땐 그때고. 어차피 비슷한 말이야.”
“이번엔 느낌이 좀 다릅니다만.”
“다 알면서 말꼬리 좀 잡지 말게. 그러고 보니 아까 간다던 사람이 왜 아직도 있어?”
위팽이 힘 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군이야말로 말꼬리 잡지 마십시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하니까요.”
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다. 진위경이 십 년은 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일 년, 아니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태원진가에 벌어진 일들을 돌이켜 보면 마(魔)가 낀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하다 하다 이제는 화왕까지 나오는군.”
“듣기로는 여간 괴팍한 성정이 아니던데, 본가에 화가 미치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겠지.”
진위경이 찻잔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상념에 잠긴 듯했지만, 그의 입술은 미세하게 달싹이는 중이었다.
– 그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나?
전음의 의미를 알아차린 위팽은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차가 식었군요. 다시 내오라 할까요?”
– 아직 알아낸 바가 없습니다.
“괜찮네. 아직 마실 만해.”
– 살아남은 잔당들은?
“그러다가 몸 상하십니다.”
– 심문 과정에서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내 몸 생각해 주는 건 자네밖에 없군.”
– 그래서, 몇 명이나 남았나?
“저라도 신경 써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모(主母)도 안 계시는 마당에.”
– 셋입니다.
진위경의 손가락이 우뚝 멈췄다. 뜻밖의 소식에 순간 말을 이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을 정도였다.
– 고작 셋?
위팽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금제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입니다.
– 자네 잘못이 아닐세. 본가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지.
– 명을 내려 주십시오.
진위경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 심문은 중단하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명줄을 단단히 붙들어 놔. 지금은 놈들만이 유일한 물증일세.
– 존명.
그는 차갑게 식어 있는 찻잔을 움켜쥐었다.
잘게 떨리는 찻물의 표면 위, 형체를 알 수 없는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마치 놈들처럼.
‘암천(暗天)…….’
어디서, 어떻게,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허공만 휘젓고 있는 상황.
그러나 진위경의 뇌리에는 한 가지 추측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매우 위험한 놈들이다. 산서성을 노린 건 시작에 지나지 않아.’
대장로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수십 년의 대계(大計)라고 하기에는 그 결과가 너무 초라하다.
진위경은 승리의 기쁨이 가신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건…… 너무 쉽다.’
한 성을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 그러나 암천은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면 족하다는 듯이.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이냐.’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자신이 놈들을 과대평가했기를 바랄 뿐.
“주군?”
“아.”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객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위팽의 부름에 진위경은 단숨에 찻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이만 가세나.”
태원진가를 위한 자리다. 지금은 승자의 기쁨을 마음껏 누려도 좋으리라.
* * *
겨울의 낮은 짧다. 태원진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석양이 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간 운기조식을 제외하면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네.’
몸도 풀 겸, 전각에 딸린 연무장에서 무공을 수련 중이던 내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은인!”
“은인!”
“……?”
메아리야, 뭐야.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왔어요!”
입가에 뭔지 모를 양념을 잔뜩 묻힌 채 활짝 웃고 있는 청풍. 그리고…….
“은인! 저 소천입니다!”
“오랜만이오. 진 소협.”
“어?”
삭주지부의 생존자들, 공야청과 소천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에 불쑥 반가움이 솟구쳤다.
‘그런데 뭐가 하나 빠진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그들 앞을 가로막은 돌담 아래서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소율이도 아저씨 볼래!”
“기다려 보거라.”
공야청이 뭔가를 집고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웠다. 자그마한 여자아이, 소율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저씨!”
“오, 많이 컸는데.”
“아저씨도 많이 컸어!”
“그거 고맙네. 근데 나 아저씨 아냐.”
“누가 봐도 아저씨야!”
“……어, 그래.”
아저씨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실소를 흘린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다들 잘 지냈어요?”
공야청이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오.”
아직 핼쑥해 보이긴 해도 혈색이 좋다.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던 과거와는 확연히 나아진 모습이다.
‘애들도 잘 지내는 것 같고.’
한창 성장기인 소천은 못 본 사이 신장이 반 뼘은 더 커졌고, 소율은 볼이 통통하다.
그리고 청풍은 잘 먹었는지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
그래. 잘 먹고 잘 커라.
스무 살이면 한창 클 때지.
“그런데 다들 어쩐 일로 왔어요?”
소천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혁 무사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곧 연회가 시작되는데 근무를 서러 가야 하니 은인께 대신 좀 말씀을 전해 달라고.”
“아, 연회.”
아까 얼핏 들었던 것도 같다. 저녁에 성대한 연회가 있을 예정이라고.
그때 입가에 묻은 양념을 핥아 먹고 있던 청풍이 깜짝 놀랐다.
“헛, 진짜요?”
“……뭐야, 알고 온 거 아닙니까?”
“네. 알면 좀 적게 먹었을 텐데!”
소율이도 충격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들고 있던 당과가 툭 떨어진다.
“안 대! 소율이도 배부른데!”
“…….”
반응을 보아하니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났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뭐, 그래서 언제 시작한대요?”
“한 식경도 남지 않았습니다, 은인.”
“은인, 빨리 가요. 저 연회 처음이에요!”
“장소는?”
“이번에 새로 마련된 대연무장 앞입니다. 은인.”
“대연무장 앞이래요, 은인!”
“아, 거기.”
나는 들고 있던 수련용 창을 내려놓고 옆에 풀어 둔 보퉁이를 단단히 등에 고정시켰다.
물론 보퉁이에 든 물건은 화왕이 맡긴 검이었다.
“다들 가시죠.”
발걸음을 떼려다 멈칫했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말인데…….”
“말씀하십시오, 은인.”
“왜요, 은인?”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한 사람만 은인이라고 해. 헷갈려.”
두 마리의 앵무새가 따로 없다. 두 은인무새들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은인.”
“알았어요, 은인.”
“…….”
아니, 생각 좀 하고 대답하라고.
* * *
대연무장. 말 그대로 가문 내에서 가장 큰 연무장인 그곳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뭐야, 왜 이렇게 많아?”
초청받은 손님만 들어오는 게 아니었나? 의문을 해결해 준 건 청풍이었다.
“아까 숙수 아저씨한테 들었는데요, 소가주님께서 이런 좋은 날에는 다 같이 함께해야 한다고 밖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받아들이라고 하셨대요.”
“그 사람들을 전부 다?”
“네. 그래서 숙수 아저씨가 굉장히 화냈어요. 소가주님이 생각이 없다고, 요리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말 함부로 뱉는다고요.”
야무지게 당과를 빨아먹고 있던 소율이도 동조했다.
“맞아! 어디 가서 말하지 말라고 소율이한테 당과도 줬어!”
“……근데 그걸 왜 말하니?”
“합!”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태원진가의 무인이 다가왔다.
“두 공자님만 따로 모시겠습니다.”
“저는 아무 데서나 봐도 상관없는데. 아마 안 되겠죠?”
“예. 소가주님의 명입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어쩔 수 없다. 나는 공야청 일행과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마련된 자리로 이동했다.
극소수의 귀빈들만이 앉을 수 있는 상석(上席) 중 하나가 내 자리였다.
물론 그 말인즉슨…….
“청풍 사숙, 진 공자. 금방 다시 뵙는군요.”
매화삼절도 그중 하나라는 뜻이지.
제법 친근하게 알은척을 하는 백무성의 양 옆자리에는 그의 사제들이 앉아 있었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 못 했죠? 은향이라고 해요.”
[Lv.75 은향]기껏해야 동생인 하연이랑 비슷한 나이려나? 그녀와 인사를 마치자마자 불퉁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젠장. 네놈이 내 옆자리냐?”
자리가 좁아 보일 정도의 거구. 철우였다.
“왜, 싫어?”
“너 같으면 좋겠냐?”
“나도 싫어서 하는 소리지. 마음이 통했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그럼 자리 바꾸든가.”
“어디로?”
“너 말고 거기 앉고 싶은 사람 많아. 저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아무하고나 바꿔.”
“이 개자식이!”
“지금 내 부모님 욕 한 거냐? 태원진가에서 진룰라 한 거야?”
몸을 부르르 떠는 철우를 백무성이 질책했다.
“이 녀석! 이게 무슨 망발이냐!”
“아니, 사형. 그게…….”
“시끄럽다. 진 소협, 사제를 대신해 사과드리겠소. 청풍 사숙께도 사죄드립니다.”
아까부터 내 뒤에 숨어 있던 청풍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전 괜찮아요. 사질.”
나도 부드럽게 웃었다.
“저도 괜찮습니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 아닙니까. 이해해야죠.”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놈이 뭐가 어째?”
“백 소협. 실례지만 자리 좀 바꿔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서워서 옆에 앉기가 좀…….”
“둘째야!”
“후우, 후우우.”
나는 콧김을 뿜어내는 녀석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우철우 좌청풍.
위치 한 번 기가 막히는군.
‘그런데 진위경은 어디 있지?’
아무리 둘러봐도 진위경과 위팽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 그때.
쿵!
대연무장을 둘러싼 태원진가의 무인들이 병장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무려 삼백이 넘어가는 그들에게서 칼 같은 기세와 파도 같은 기백이 휘몰아쳤다.
쿵! 쿵! 쿵!
흡사 전장의 북소리를 닮은 그것은 점점 커지며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이내…….
쿵!!
그 어느 때보다 큰 굉음과 함께 인(人)의 장막이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