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88
#187화
서릿발 같은 기세를 내뿜는 수백의 무인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걸어오는 한 사람.
저벅, 저벅.
구경을 위해 찾아온 양민, 낡은 무복을 걸친 이름 없는 무림인, 마지막으로 산서성을 움직이는 힘 있는 자들까지.
모든 이가 숨을 죽인 채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진위경을.
‘영화의 한 장면 같네.’
은빛 비룡이 수놓아진 무복을 걸친 진위경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당당한 풍채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위엄이 좌중을 압도한다.
진위경이 불러온 정적은 그의 목소리로 깨졌다.
“본가가 태원에 뿌리를 내린 지 어언 삼백 년.”
심후한 공력을 담은 외침이 멀고도 넓게 퍼져 나갔다.
“시작은 분명 초라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다고 했다. 천재지변이 이어졌고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은 힘을 잃었다. 수많은 군웅이 천하 곳곳에 깃발을 세우고 왕을 자처하자 전쟁이 일어났다.
물 대신 피가 메마른 땅을 적시고 추수되어야 할 곡식은 말발굽에 짓밟혔다.
그 길었던 전란의 끝에서, 천하를 떠돌던 한 사내가 폐허가 된 옛 왕조의 수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것이 태원(太元) 진가(進家)의 시작이다.
“선조이신 진무량 조사께서는 고아를 받아들이고 미망인과 노인들을 돌봤다. 비록 무(武)를 기치로 세웠으나 인(人)을 잊은 적은 없었다.”
작은 씨앗은 금세 싹을 틔웠다. 태원진가의 깃발 아래 모인 이들은 가지요, 줄기였고 단단하면서도 깊은 뿌리가 되었다.
초라하게 시작했던 가문은 산서성 전체를 아우르는 거목으로 성장했다.
“허나 본가도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변해 갔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거목은 시들기 시작했다.
수뇌부의 그릇된 선택, 외적의 침입, 동맹의 배신,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
어느새 그 많던 가지는 꺾였고 무성하던 잎은 떨어졌다.
“그러나!”
순간 터져 나온 천둥 같은 외침. 이어지는 목소리는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가지와 잎이 꺾이고 떨어져도 뿌리는 온전했다.
“흔들릴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았다.”
뿌리가 남아 있다면 나무는 다시 자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를 띄고 풍성한 잎사귀를 틔워 낼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태원진가의 소가주로서 맹세한다.”
쿵!
수백 개의 병장기가 바닥을 찍었다. 하나같이 한쪽 무릎을 꿇은 태원진가의 무인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열기가 피어올랐다.
“우리는! 태원진가는!”
태원진가에 속한 수많은 식솔,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와 아직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적들에게 하는 맹세다.
“삼백 년 전에도, 삼백 년 후에도 변함없이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
쿵! 쿵!
“모두에게 묻겠다!”
화염을 쏟아 내는 두 개의 눈동자가 좌중을 쓸어 보았다. 흥분과 기대감, 두려움과 죄책감이 뒤섞인 얼굴들을 눈에 담은 진위경이 외쳤다.
“본가와 함께 새로운 초석(礎石)을 다질 준비가 되었는가!”
태원진가의 무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충(忠)!”
쿵, 쿵쿵쿵쿵쿵!
바로 그때, 어디선가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도 태원진가가 가고자 하는 그 길에 함께할 수 있습니까?”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내가 자리한 상석도, 그 아래의 귀빈석도 아니었다.
대연무장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군중이 길을 열자 목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은…….’
하늘하늘한 궁장 대신 편한 무복,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외모의 그녀가 진위경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항산검문의 이소월, 소가주님의 부름을 받고 지금 도착했습니다.”
그녀, 이소월의 곁에 철탑처럼 서 있던 중년인도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일장로 철무백이 태원진가의 소가주를 뵙소.”
이어 두 사람의 뒤에 시립한 항산검문의 무인들이 외쳤다.
“소가주님을 뵙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동요와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멸문 직전의 상황에 처한 항산검문의 등장.
신임 문주의 정체는 죽은 혈랑검의 하나뿐인 여식이요, 그녀의 곁에서 일장로를 자처하는 자는 항산호 철무백이다.
그러나 모두가 놀라워하는 이 상황 속에서 진위경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바로 그가 내게 원단 초대장을 들려 보낸 장본인이니까.
“소저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구려. 지난번에 보낸 배첩(拜帖)은 잘 받았소?”
“예. 거기에 더해…….”
침착하게 대답한 이소월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응시했다.
“감히 갚기 힘든 은혜도 입었고요”
날아드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린다.
나와 진무경이 항산검문을 구원한 일은 산서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니 당연한 반응이다.
내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진위경을 바라봤다.
“앞서 여쭈었던 물음에 대한 답을 듣고 싶습니다.”
이소월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저희도…… 태원진가와 함께할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진위경의 대답에는 한 톨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이오.”
“……!”
“이번에는 내가 묻지. 본가와 함께 갈 준비가 되었소?”
털썩.
이소월은 대답 대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철무백과 휘하의 무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산검문의 이대 문주 이소월이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한때 산서 무림을 호령하던 항산검문. 그 적통을 이은 신임 문주가 진위경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니, 태원진가에 무릎을 꿇은 거다.
“본문은 태원진가를 위해 충정을 바치겠습니다.”
“충!”
숫자는 적었지만 외침은 우렁찼다. 진위경이 이소월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켰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바뀐 말투와 함께.
“허락한다.”
원단 첫날. 태원진가가 항산검문을 가신(家臣)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 * *
“와아아아아!”
“태원진가! 태원진가!”
환호, 그리고 환호.
천여 명에 달하는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태원진가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듣는 이로 하여금 피가 끓어오르게 만드는 연설에 이어 항산검문의 충성 맹세까지.
‘엔딩 한 번 끝내주네.’
아직 진짜 연회는 시작도 안 했지만, 이 자리의 모두는 깨달았을 것이다.
태원진가야말로 강력한 힘과 자비를 겸비한 산서성의 패자(霸者)임을.
옆자리에 앉은 철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어.”
단순무식하고 자존심만 강해 보이던 녀석은 정말 탄복한 표정이었다.
‘자식이 뭘 좀 아네.’
유치하지만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도 태원진가의 일원일뿐더러 오늘 이 자리가 있기까지 내 공도 적지 않았으니까.
“흠, 흠. 좀 감명 깊었나 봐?”
“정말 대단했다. 보는 내내 가슴이 뛸 정도였어.”
철우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찌 저리 아름다울 수가!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태원진가가 산서성에서 이 정도로 잘나가는…… 뭐라고?”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나는 망설임 끝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우리 큰형 말하는 건 아니지?”
“뭐?”
“왜 그런 거 있잖아. 저 남자의 근육이 탐난다. 저 사람과 벤치 프레스를 들며 서로의 언더아머를 벗겨 주고 싶다. 뭐 그런…….”
“그게 무슨 개소리지?”
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다행이고. 난 또 게이인 줄 알았네.”
“게이? 그건 또 뭐냐?”
“그, 비유하자면 한 쌍의 디그다가 만나 닥트리오가 되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군. 간단하게 설명해 봐라.”
나는 가장 간단한 단어 하나를 떠올렸다.
“남색(男色).”
“이 자식이……!”
당장 주먹을 추어올리려던 철우가 멈칫했다. 바로 옆에 사형인 백무성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화산일학 버프 개꿀.
나는 실실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뭐가 아름답다는 건데?”
“여인 말이다! 항산검문에서 왔다는 저 여인!”
“아, 이소월 소저?”
엄밀히 따지면 문주지만 아직은 소저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
제법 친숙한 내 태도에 철우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 아는 사이냐?”
“약간의 인연이 있지.”
“어떤 인연?”
성추행 파문으로 시작해서 프러포즈로 끝나는 인연이라고나 할까.
“귀찮아. 다 말하기에는 워낙 파란만장한 이야기라서. 그런데 너 혹시…….”
두루뭉술하게 말을 흐린 나는 철우를 바라봤다.
“이 소저한테 관심 있냐?”
“관심이라니!”
철우가 펄쩍 뛰는 모습을 보자 살짝 안심이 된다.
“그렇지? 난 또 네가 가슴이 뛰네, 어쩌네 하길래 진짜 관심 있는 줄 알았…….”
“관심이 아니다! 이건 사랑이야.”
“…….”
“아이는 셋이 적당하겠지. 남아 둘, 여아 하나.”
“……어. 어디 한 번 계속해 봐.”
“황구(黃狗)도 한 마리 키울 거다. 내 들어 보니 어릴 때부터 개와 함께 키우면 아이들의 정서 성장에 좋다더군. 행복한 가정이 되겠지.”
병신이라고 욕해 주려다가 문득 멈칫했다.
‘이 장면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왠지 모르게 어디가 쿡쿡 찔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현실에 있을 송이 씨와 꺽정 아저씨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거 참 이상하네.’
나는 의문을 뒤로하고 입을 열었다.
“다 끝났냐?”
“아직 안 끝났다.”
“그럼 끝난 셈 치고 내 얘기 들어. 중요한 거니까.”
진지한 목소리에 철우가 멈칫했다.
“중요한 거?”
“그래. 너 나이가 몇이야?”
“스물다섯이지.”
“이 소저 나이 알아?”
“모른다.”
“열일곱이야. 아, 해가 넘어갔으니 열여덟이군.”
“그래서?”
“그래서는 뭔 그래서야, 이 천인공노할 새끼야! 일곱 살 차이는 둘째 치고 급식, 야자! 어? 이제 문과 이과 결정해야 할 애를! 내신 성적은 또 어쩔 거야!”
내 분노에 철우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혼인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아, 미안. 너무 흥분했다.”
아무래도 급식 여동생을 둔 오빠로서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가 무림이라는 걸 자꾸 깜빡깜빡하는 거지.
“아무튼 잘 생각해 봐. 일시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아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철우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어졌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느꼈다. 일평생 멈춰 있었던 내 심장이 뛰기 시작한 것을.”
“……그럼 이십오 년 동안 죽어 있었던 거냐?”
“죽어?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나는 시체나 다름없었지.”
“진짜 죽으면 안 되냐? 제발 죽어 줘.”
“안 된다. 나는 이제 그녀의 허락 없이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와, 지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무성과 은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시작이군.”
“오라버니, 작년에 삼대 제자 중에 예쁘장한 애한테도 비슷한 말 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상습범이야?
‘아니 무슨 연쇄 고백마도 아니고.’
은향의 흑역사 폭로에 철우가 벌컥 성을 내려던 그 순간이었다.
“진 공자님.”
듣기 좋은 미성이 귓가에 닿았다. 고개를 돌리자 계단을 올라오는 한 여인, 아니지. 소녀가 보였다.
‘이소월.’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