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9
#18화
분위기는 점점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실은 비무가 정당했다는 것입니다!”
“정당? 요즘은 독을 쓰는 걸 정당하다고 하나? 여기가 무슨 사천당문이야?”
“본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소! 그리고 앞서 약왕당주가 말했듯이 이소군은 멀쩡했…….”
“삼공자야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그리고 저 돌팔이 말을 어떻게 믿어?”
“돌팔이? 이 새끼가 진짜!”
그때 잔뜩 흥분한 목소리 하나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필요하다면 삼공자의 목을 바쳐서라도 전쟁을 막아야지!”
……뭐?
“그 무슨 망발이오!”
“내 말이 틀렸소? 이제 그만 인정합시다. 항산검문은 본가보다 강하오. 전쟁이 시작되면 수백이 죽거나 다칠 테고, 최악의 경우에는 멸문이오. 모든 원인인 삼공자를 넘기면 끝나는 일 아닌가!”
저게 말이냐, 방구냐. 모처럼 대단한 개소리를 들었더니 뒷골이 당기고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나선 사람이 있었다.
“방금 뭐라 했소?”
나직한 목소리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오히려 나직하기에 더 선명하게 들린다.
진위경이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봤다.
“누구. 목을. 바치자고?”
한 음절씩 뚝뚝 끊어지는 음성에 서리가 꼈다. 나도 순간적으로 몸이 으슬으슬할 정도의 분위기인데, 백호당주가 냉큼 입을 열었다.
“그거야 당연히 이 일의 주범인 삼공자…… 아.”
저 새끼는 모발도 없는데 눈치까지 없네. 백호당주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래서, 확인되지도 않은 일로 삼공자의 목을 항산검문에 갖다 바치시겠다? 그게 가문 당주의 입에서 나올 말이오?”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백호당주가 진위경의 기세에 눌려 그의 눈을 피한다. 진위경이 가만히 백호당주를 노려보았다. 안 그러던 사람이 화가 나니 더 무섭다.
하얗게 질린 백호당주의 얼굴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위경은 냉엄한 얼굴로 좌중을 내려다봤다.
“이미 다들 알고 있소.”
진위경이 모두를 둘러보며 단호히 말했다.
“비무는 공정했고 이소군의 독살은 음모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저들에게 굴복하자는 거요?”
장로원 측 인사들이 시선을 회피했다. 진위경의 냉소가 더욱 짙어졌다.
“누가 쥐여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산검문은 명분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있소.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니면 이미 뽑혔는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되돌리기에는 늦었소. 방법은 단 하나. 맞서 싸우는 것뿐이오.”
“…….”
“살고 싶소? 가문을 지키고 싶소? 진정 그렇다면 무사들을 준비시키고 전쟁을 준비하시오. 아니면 나와 내 아우의 목을 베어 저들에게 바치시든가. 그저 부귀영화만을 바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지.”
숨 막히는 정적이 대회의장을 점령했다.
다음 순간, 한 사람이 입을 열지 않았다면 몇 시간이고 그 정적에 짓눌려 있었을지도 몰랐다.
“훌륭하다.”
지금까지 말없이 사태를 관망하던 한 사람.
대장로였다.
* * *
대장로.
요주의 인물이다. 가문의 최고 웃어른이자 장로원의 수장.
나는 앞서 들었던 진위경의 전음을 떠올렸다.
‘조심하라고 했었지.’
진위경이라는 NPC는 내게 있어 가장 큰 아군이자 조언자다.
나는 그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고, 틈틈이 대장로를 주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시바, 도저히 모르겠다.’
이 거지 같은 게임을 시작한 뒤 한 번이라도 마주친 NPC들의 숫자를 세라고 하면 족히 백은 넘어간다.
그들에겐 각자의 표정과 성격이 있었다. 기루에서 만난 하인은 삶에 찌든 영업용 미소를 지었고, 나를 데려다준 마부는 허당끼가 있었으며 가문에서 만난 중진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과격한 면모가 있다.
하지만 대장로는…….
‘표정을 못 읽겠어.’
그는 그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다.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도, 중진들이 각자의 파벌에서 고함을 내지를 때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짝. 짝. 짝.
대장로의 힘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리게만 생각했건만, 어느새 소가주가 이리 당당한 무인이 되었구려. 훌륭하오. 그래야 본가의 소가주라 할 수 있지.”
“못난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과한 겸손은 오만으로 비치는 법. 소가주는 사과할 것 없소.”
대장로의 칭찬에도 진위경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이 늙은이도 한마디 보탤까 하는데, 소가주의 생각은 어떠신가?”
“새겨듣겠습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대장로에게 수십 쌍의 시선이 꽂혔다.
가문의 최고 웃어른이다. 가문 내 권위나 입지로 치자면 진위경을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가장 큰 문제는 그가 반대 세력인 장로원의 수장이라는 거고.
‘시발, 좆 됐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슬금슬금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 내 귓가에, 대장로의 첫 마디가 파고들었다.
“썩어 빠졌구나.”
응?
고개를 홱 돌렸다. 대장로는 여전히 특유의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하지만 아니었다.
“하물며 짐승들조차도, 제 굴에 적이 들어오면 함께 힘을 합쳐 싸우는 법이다. 그런데 가문의 중진씩이나 되는 것들이 직계의 목을 바치고 전쟁을 막겠다는 걸 대책이라고 내어놓고 있구나. 허허. 이런 놈들이 본가의 가로회의에 앉아 있단 말이지.”
“노, 노야. 오해십니다. 그것은 그저…….”
“백호당주.”
서늘한 대장로의 부름에 백호당주가 바짝 긴장했다.
“내 외유가 너무 길었던 것인가? 아니면 가주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인가?”
“노, 노야.”
표정만 보면 밥 먹었냐 물어보는 헬스장 몸짱 할아버진데, 말하는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뭐야,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우리 편을 들어?
눈동자를 팽팽 돌려 봤지만, 사람들의 반응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양측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생각하시오, 소가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전쟁이 기정사실화되었다면 내부를 단속하는 것이 우선이겠지. 그러니 역도나 다름없는 저들의 목을 베는 게 우선일 텐데?”
얼어붙은 공기 속, 진위경은 한동안 물끄러미 대장로를 바라보다가 한숨처럼 대답을 토해 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휴우. 백호당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내 목을 갖다 바치느니 마니 했던 걸 생각하면 살짝 아쉽다.
……저 자식만 죽이자고 말해 볼까.
“저들은 가문의 직계를 모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적들에게 넘기자고 주장했는데, 너무 무른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나?”
“오랜 세월 본가에 충성한 이들입니다. 흥분해서 나온 실언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진위경의 대답에 대장로가 껄껄 웃었다.
“실언, 실언이라. 그래. 소가주의 그릇은 내 생각 이상으로 크구려. 과연 소가주요. 그렇다면 이들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기로 하지. 늙은이들의 실언을 담대하게 용서해 준 소가주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이어 대장로가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마주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노야. 아닙니다.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제발 이러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저희가 더욱 부끄러워집니다. 부디…….”
“노야……!”
살려 준 건 진위경인데 난리가 났다. 아주 생쇼를 해라, 생쇼를.
내심 혀를 차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순간이었다.
‘아니, 잠깐만. 쇼?’
정체 모를 위화감이 온몸을 감싼다. 나는 황급히 대장로 주위에 모여든 이들을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앞서 나를 몰아세웠던 장로원. 그들의 입가에 스치는 웃음을.
‘설마…….’
계획된 거라고? 이 모든 게 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뭘 위해서?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진위경은 뭔가 알고 있을까?’
고개를 돌려 찾을 필요도 없었다. 대장로가 진위경의 손을 번쩍 들고 외치고 있었으니까.
“가주가 자리를 비운 지금, 소가주가 가주나 다름없소. 이 일에 대해서 나는 소가주를 지지하겠소. 그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저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감히 진가를 넘볼 수 없을 것이오!”
달아오른 분위기, 사람들의 연호와 함성.
이걸 어디서 봤더라,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파르르 떨리는 진위경의 입꼬리와 대장로의 묘한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익숙한 느낌의 정체를 깨달았다.
‘선거 유세.’
대장로의 모습과 TV 속 정치인이 겹쳐 보였다.
* * *
상당히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 대장로가 진위경의 손을 들어 주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장로원 측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던 비무 관련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전쟁을 전제로 한 회의 내용이 주를 이뤘다.
“현재 가용 인원은 어떻게 되나?”
“외부 파견 중인 무사들까지 불러들인다면…… 이백 남짓입니다.”
이백 명이나 된다고? 나는 의외로 많은 숫자에 혀를 내둘렀지만 이어지는 대화에 입을 다물었다.
“일류 이상의 정예로 엄선한다면?”
“스물이 채 안 됩니다. 물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을 포함하면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중진들을 포함하면 일류 고수의 숫자는 3, 40명 남짓.
이곳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 정도면 양호한 수준인 것 같다.
역시 뿌리 깊은 명문세가. 200년을 이어 온 저력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항산검문 측은?”
“우선 확인된 무사들만 최소 삼백입니다.”
삼백. 그것도 최소로 잡았으니 백 명 이상의 차이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싸움은 머릿수로 하는 게…….
“그리고 일류는 오십 이상입니다.”
이 전쟁, 어렵다. 그래도 진위경과 위팽 같은 고수들이 있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다. 그들은 기감으로도 읽지 못하는 고레벨의 NPC들이니까. 아마 대장로도 그 범주에 포함되는 존재일 것이다.
“본가의 절정 고수는 소가주와 노야, 위 대협까지 총 셋입니다. 그리고 항산검문의 절정 고수는 다섯이지요.”
……거지 같아서 못 해 먹겠네. 진짜.
‘뭐? 뿌리 깊은 명문세가? 200년 역사?’
이 새끼들은 200년 동안 뭘 한 거야. 듣자 하니 항산검문의 역사가 30년도 안 된다는데, 전력 면에서 밀리다 못해 압살이다. 압살.
‘작년에 흑사병이라도 돌았나.’
흑사병이 돌았건 말건 당장 내가 돌아 버릴 것 같다. 나는 어느새 노래진 회의실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다짐했다.
‘튀어야겠다.’
새벽 네 시 정도면 적당하겠지. 다들 잠들어 있을 때 몰래 담을 넘어서 멀리 도망가는 거다.
지금의 나라면 천력부 정도의 수준은 대여섯이 덤벼도 손쉽게 해치울 수 있다.
보이는 산마다 싹 뒤지면서 경험치와 명성을…….
“항산, 항산검문에서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황급히 들이닥친 무사의 외침이었다. 누군가 돌돌 말린 종이를 받아 펼치자 피로 쓴 듯 붉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굳이 시스템이 번역해 주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글자였다.
不俱戴天
‘불구대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
진위경이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현 시간부로 본가는 전시 상황에 돌입한다. 내 인(印) 없이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세가 외 출입을 금하며,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이지 말라. 알겠는가!”
“옛!”
“…….”
넋이 반쯤 나간 내 귓가로,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항산검문]이 [태원진가]에 선전포고했습니다.
– [전쟁] 관계가 양측 진영에 성립되었습니다.
– [항산검문]이 당신을 문파 공적으로 지목합니다.
– 도망칠 경우 심각한 불이익을 받게 될 것입니다.
– [메인 퀘스트 – 전쟁]이 생성되었습니다.
……허허.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