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91
#190화
쿠당탕!
백무성의 신형이 튕기듯이 솟구쳤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무성뿐만 아니라 이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뭐야!”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진태경은 생각 이상으로 훨씬 뛰어난 실력을 보여 줬지만 결국 철우의 권기(拳氣)에 병장기를 잃었다.
창을 잃은 창수와 절정의 권사. 승패는 명백했다.
아니, 명백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그게…….”
이소월의 물음에 백무성이 입술을 움찔거렸다. 아직도 쉽사리 믿기지 않지만, 그는 순간 진태경의 움직임을 놓쳤다.
희끗한 뭔가를 본 것이 전부였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침묵하던 백무성이 입술을 열었다. 이윽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부끄러움이 묻어 나왔다.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파장이 일었다. 그들 중 누구보다 백무성이라는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봐 온 은향이 눈을 크게 떴다.
“오라버니, 아니 대사형.”
“사실이다. 아무 말 말거라.”
다섯 살에 화산파에 입문, 천검진인의 제자가 되어 화산제일의 기재라 불리는 그다.
아직 이립이라는 젊은 나이지만 그 위상은 장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도 남았다.
‘화산제일의 기재……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고소를 머금은 백무성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해맑게 웃고 있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십 년 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백무성은 깨달았다. 화산제일의 기재는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청풍 사숙.”
“말씀하세요, 사질.”
청풍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대연무장에 고정된 그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알려 주십시오. 그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두의 시선 속, 청풍의 입이 열렸다.
“빨랐어요.”
사람들은 맥이 탁 풀렸다. 빨랐다니,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백무성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뜻으로 여쭤 본 것이 아닙니다.”
“알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인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은인은 오직 하나의 보법과 창법을 익혔어요. 투박하지만 실전적인 무공들이죠. 하지만 그중 신공(神功)이라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청풍이 환하게 웃었다.
“그냥 빨랐던 거예요. 철우 사질보다 훨씬 더.”
백무성은 말문이 막혔다.
신공절학을 익힌 것도, 그렇다고 절세의 공력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에게 있어 진태경은 뛰어난 무재를 지닌 변방 무가의 후기지수였을 뿐이었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사람의 육신에는 한계가 있다. 무림인이 특별한 것은 무공과 공력으로 그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한데 청풍은 진태경이 별다른 무공 없이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었다.
백무성은 자신도 모르게 강한 부정을 내뱉었다.
“불가능합니다.”
청풍은 고개를 저었다.
“가능해요. 은인은.”
“……!”
“이틀 만에 복호권(伏虎拳)의 투로를 읽고 반격하더군요. 철우 사질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복호권을, 이틀 만에 말입니까?”
복호권은 두말할 것 없는 상승무공이다. 호랑이를 굴복시키는 무공답게 강맹하며 그 초식 또한 대단히 촘촘하다.
이미 한차례 재능을 인정받은 화산파의 제자들도 복호권의 형태와 초식을 익히는 데에만 족히 일 년이 걸린다.
그런데 고작 이틀이라니.
‘둘째가 질 수밖에 없었군.’
백무성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눈앞의 젊은 사숙이 왜 진태경의 곁에 머무르려 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괴물이 하나 더 있었어.’
산서잠룡 진태경.
그는 말 그대로 잠룡이었다. 비록 지금은 변방의 그늘에 가려져 있으나 머지않아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너무 오만했다.’
백무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고통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컸다.
화산파라는 이름에 취해 있었던 것일까?
비무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어 있었다.
‘사제들에게 늘 겸손하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이 그러지 못했구나.’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백무성이 진위경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진 대협. 앞서 범한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아, 아니오.”
사과를 받는 진위경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백무성이 알기로 그는 자신의 두 아우를 보물처럼 아낀다고 했다. 그런 사람의 면전에서 진태경을 깎아내렸으니 화가 날 수밖에.
백무성은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제 사제도 크게 한 수 배웠습니다. 이제 승패가 결정 난 것 같으니 비무를 끝내도 될 듯합니다.”
“그래야겠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진위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 사이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와, 이게 되네.”
설마 진짜 이길 줄은 몰랐던 진위경이었다.
* * *
대연무장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고요했다. 양민들은 물론이고 무림인들까지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이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철우도 비슷한 얼굴일 것이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녀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어떻게?”
“잘.”
“호, 혹시 이형환위(移形換位)?”
“이 형이 좀 빠르긴 하지. 놀랐어?”
“복호권을 그렇게 쉽게 피하다니…….”
“네 사숙보단 한참 느리던데. 너 돌아가면 수련 열심히 해야겠더라.”
사실이다. 철우가 펼쳐 낸 복호권은 청풍의 것에 비하면 한참 느리고 동작도 컸다.
투로가 뻔히 보이는데 못 피할 이유가 없다. 300을 돌파한 [민첩] 스탯이라면 더더욱.
“파괴력은 빠르고 정확한 동작으로 상대방을 맞췄을 때 의미가 있는 거다. 알았냐?”
“……감히 어디서 훈계질이냐.”
“감히? 훈계질? 너 아직 사태 파악이 안 되는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강철 단소로 철우의 뒷목을 쿡 찔렀다.
예리한 단면이 살갗을 파고들자 녀석의 거구가 부르르 떨린다. 아이, 재밌어.
“화산파 연쇄고백마는 태원진가 단소 살인마가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
“이 자식이!”
“어허, 움직이지 마. 피 보기 싫다.”
“너, 넌 내려오기만 하면 죽었어.”
“글쎄, 일단 비무는 끝난 것 같으니까 다음 기회를 노려 봐.”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는 진위경의 모습이 보인다.
철우의 성격상 먼저 항복할 리가 없으니 이쯤에서 비무를 끝내려는 모양이다.
이윽고 공력을 실린 목소리가 대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둘 다 잘 싸워 주었다!”
“와아아아아!”
정신을 차린 군중들이 거센 함성으로 응답했다.
돈 주고도 보기 힘든 절정 고수들의 비무를 눈앞에서 관전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 이제 끝. 수고했다.”
생각 이상으로 수월한 퀘스트였다.
내가 산뜻한 웃음과 함께 철우의 목에서 강철 단소를 뗀 그 순간.
덥석!
솥뚜껑만 한 손아귀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어?”
“아직 안 끝났다!”
잠시 깜빡했다. 철우가 어떤 놈인지.
사랑에 눈먼 놈. 이십오 년 동안 죽어 있다가 심장이 뛰기 시작한 놈. 이소월의 허락이 없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놈…….
한 마디로 미친놈이다. 유의어로 시벌놈이 있다.
‘그런 놈이 쉽게 포기할 리가 없지.’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 힘 하나는 신력(神力)을 타고난 놈이다. 청풍도 이놈 앞에서는 한 수 접어 줘야 한다.
철우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나한테 한 번 잡힌 놈은 그걸로 끝이야.”
내가 방심한 것도 있지만 이놈 매너가 아주 똥인데?
아, 사랑에 눈먼 자여.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철하다. 추우야.”
“그게 유언이냐?”
“아니. 띵언.”
“틈만 나면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이 소저를 포기해라. 그럼 이쯤에서 봐주지.”
“혹시 내가 말했었나?”
“뭐?”
“나, 이 소저한테 청혼받았다.”
“이 개애애애색!”
군중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신의 근육에 핏대가 불뚝 솟은 철우가 어마어마한 힘으로 나를 땅에 메다꽂았기 때문이다.
아니, 꽂으려고 했다.
“뭐 하니?”
“흐으으으읍!”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하얗게, 이내 보랏빛으로 물든다.
엄청난 힘이 손목을 끌어당겼지만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 힘 좋네.”
일시적으로 상승한 [승부사]의 칭호 효과와 새롭게 부여한 포인트까지. 현재 내 몸에 깃든 힘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거대한 체격과 신력을 타고난 철우마저도.
“이 정도면 근력 스탯 200은 가뿐히 넘겠는데.”
“이, 이게 무슨!”
“새끼.”
경악 어린 녀석의 눈동자에 씩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비친다.
“형은 근력만 300이 넘어요. 포인트 분배 전에도 너보단 셌어.”
권기? 안 닿으면 그만이다. 힘, 속도. 모든 면에서 내가 앞섰다. 그대로 싸웠어도 최종 승자는 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포인트 분배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 같은 놈은 제대로 밟아 줘야 다시 안 까불거든.”
“이런 개……!”
빡!
전광석화처럼 내지른 주먹이 녀석의 관자놀이에 정확히 꽂혔다. 근육질의 거구가 비틀거리더니 이내 풀썩 쓰러진다.
쿠웅!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띠링.
– 퀘스트, [한 남자가 있어, 널 너무 사랑한]을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보상으로 대량의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퀘스트 보상으로 대량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 레벨 업!
– 레벨 업!
“꺼-억. 잘 먹었습니다.”
잠깐의 정적 후.
어마어마한 환호가 대연무장을 뒤덮었다.
* * *
대연무장에서 이백여 장 떨어진 태원진가의 대문. 쩌렁쩌렁 울리는 환호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하급 무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방금 들으셨습니까?”
대문에 삐딱하게 기댄 누군가가 대답했다.
“들었다.”
“삼공자님이 패화권을 꺾었답니다!”
“그래.”
“……반응이 왜 그러십니까? 패화권이라고요, 화산파의 매화삼절!”
“나도 알아, 자식아.”
“그런 패화권을 삼공자님께서 이겼다니까요? 조장님은 놀랍지도 않으세요?”
“응. 이제 놀랍지도 않다.”
태원진가의 수문조장, 혁무진이 하품을 쩍쩍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저 양반 따라다니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봤어. 패화권 정도는 꺾어 줘야 이 몸의 주군이라 할 수 있지.”
“헉! 벌써 줄 서신 겁니까?”
“줄을 서긴 무슨.”
혁무진이 피식 웃었다.
“어느 날 주군께서 나한테 그러시더군. 이보게, 혁 무인. 내 오른팔이 되어 주게. 자네 없이는…….”
하급 무인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삼공자님 맞습니까? 말투가 영 아닌데.”
“너 지금 내 말 잘라 먹었냐?”
“조장, 그게 아니고요.”
“확 씨. 너 그 양반이랑 친해? 나보다 잘 알아?”
“아뇨.”
“자식이 말이야. 내가 인마! 같이 생사도 넘고! 밥도 같이 먹고! 다 했어 인마.”
“……예. 마저 얘기하시죠.”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아무튼 그때 주군께서.”
누그러진 혁무진이 말을 이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회합치고는 지나치게 소란스럽군.”
“제깟 놈들이 뭘 알겠습니까. 기분이 좋다고 개나 소나 다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쯧쯧.”
어느새 내려앉은 옅은 어둠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혁무진은 혀를 차며 하급 무인에게 물었다.
“명단에 있는 귀빈들은 다 온 거 아니었어?”
“어, 일단 오늘 방문하기로 하신 분들은 전부 도착했습니다.”
“그럼 뭐야, 그냥 소문 듣고 찾아온 사람인가?”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습니까?”
“우선 명단부터 재확인하고 있어라.”
“옙.”
혁무진은 내심 투덜거리며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네 명의 인영을 향해 외쳤다.
“정지. 태원진가의 수문 조장 혁무진이오. 귀하의 신원과 목적을 밝히시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노호검객.”
“노호검객이라. 사문은 어디요?”
“종남파.”
“종남파로군. 다른 분들도 얼굴을 확인해야 하니 가까이 오시……오.”
목판에 종남파라는 세 글자를 휘갈기던 혁무진이 멈칫했다.
서서히 고개를 들자 비쩍 마른 늙은이와 오만한 표정의 중년 무인 셋이 보였다.
“조, 종남파?”
선두에 선 노인이 타오르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응시했다.
“진태경, 청풍. 이 두 놈에게 당장 안내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