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92
#191화
혼절한 철우가 실려 나가자 진위경이 나섰다.
“도전하려는 자, 더 이상 없는가!”
그토록 강하던 철우를 말 그대로 발라 버린 나다. 도전자가 있을 리 없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진위경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하면 이번 비무의 최종 승자는 산서잠룡 진태경이다!”
띠링.
– 돌발 이벤트, [태원진가 배 비무 대회]의 최종 승자가 되었습니다!
– 명성이 상승합니다!
–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 레벨 업!
– 이벤트 보상으로 보너스 포인트 10을 획득했습니다!
뜻밖의 알림음과 동시에 대연무장은 말 그대로 광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이야아아아!”
“태원진가 천세! 산서잠룡 만세!”
“산서잠룡이 패화권을 이겼다!”
“끼얏호우!”
끼얏호우는 누구야. 놀 줄 아는 놈인가.
어쨌건 장내의 분위기는 록 페스티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후끈 달아올랐다.
어린애는 들고 있던 당과를 허공으로 내던졌고, 백발의 노인이 괴성과 함께 지팡이를 무릎으로 박살 냈다.
“응애애애!”
“하이얍!”
무림인들의 반응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변방으로 취급받던 산서 무림이다. 나는 연쇄고백마 하나를 쓰러트렸을 뿐이지만 그들에게는 섬서 무림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모! 여기 화주 한 병!”
“이십 년 전 얹힌 만두가 쑥 내려간다. 여기 오늘 내가 다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시켜!”
주모 부르지 마. 다 시키지도 마.
어차피 전부 태원진가 주머니에서 나가는데 산서뽕을 제대로 맞은 사람들은 눈이 뒤집혔다.
‘미쳐 날뛰는구나.’
상당수가 무림인이다 보니 병장기 소지는 기본. 이러다가 뽕에 취해 문제가 생기진 않을지 걱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외쳤다.
“다들 검 뽑아!”
차차차창!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수백 개의 병장기가 뽑혀 나왔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흔들어!”
“우와아아아!”
차차차창! 차차차창!
아니, 여기서 파도타기가 나온다고?
시대를 앞서간 신진 응원 문화를 지켜보던 나는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히…….”
“개판이군.”
시작은 내가 했지만 이어진 말은 내가 한 게 아니다.
또렷하게 귓가를 파고든 늙수그레한 목소리. 주위를 살폈지만 시선에 닿는 것은 온통 신난 사람들뿐이다.
‘누구지?’
온갖 소음이 뒤섞인 난장판 속에서도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듯 들렸다. 고수, 그것도 심후한 공력의 소유자다.
나를 비롯한 몇몇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그 순간이었다.
“갈(喝)!”
고오옹.
무협 소설에서 읽었던 사자후(獅子吼)가 이런 걸까?
지면이 울리고 공기가 파르르 떨린다. 양민 중 심약한 이들은 기절하거나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꺄아아악!”
“으헉!”
축제 분위기였던 대연무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벌벌 떠는 양민들과 얼어붙은 무림인들. 폭탄을 맞은 것처럼 뿔뿔이 흩어진 인파 사이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 한 노인이 보인다.
“이제 좀 낫군.”
장신에 비쩍 마른 몸. 날카로운 눈빛으로 좌중을 쓸어 보던 노인의 시선이 나와 부딪쳤다.
비무대의 중심인 데다 젊은 놈이 멀쩡히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거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네놈이냐?”
“예?”
“청풍, 진태경. 둘 중 어느 쪽이냐?”
뭐지, 이 상황은.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짧은 순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내가 대답했다.
“둘 다 아닌데요.”
“아니라고?”
“예. 사람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잡아떼고 보자.
척 봐도 사이즈가 나온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한테 썩 좋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아닌 듯 보였다.
“그래?”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봅니다.”
노인이 뒤를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라.”
“예, 장로님.”
사람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네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교롭게도 모두 나와 일면식이 있는 이들이었다.
특히 한 사람은 모를 수가 없는 얼굴이다.
‘혁무진?’
아니, 근무 선다던 놈이 왜 저기 있어.
하얗게 질린 혁무진은 곁에 선 세 명의 중년인들에게 끌려오듯 걸음을 옮겼다. 그들 역시 기억에 남아 있는 얼굴들이다.
그런데 저놈들 별호가 뭐였더라?
‘아, 그래. 종남삼수.’
가까스로 엑스트라들의 별호를 떠올린 그때, 정체불명의 노인이 네 사람에게 말했다.
“놈들을 찾아내라.”
혁무진과 팔에 부목을 댄 중년인, 공일혁이 동시에 나를 가리켰다.
“조장님! 저 좀 살려 주십쇼!”
“저놈입니다! 저놈이 진태경입니다!”
“…….”
“…….”
어, 들켰네.
잠깐 침묵하던 노인이 내게 물었다.
“정말 네가 진태경이냐?”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태경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노인이 기막혀하던 그때. 휙 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사뿐히 착지했다.
진위경과 백무성, 그리고 청풍이었다.
“태원진가의 소가주, 진위경이라 합니다. 노선배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어흠. 태원진가의 소가주시라고?”
질문은 노인에게 했는데, 정작 나선 것은 공일혁이다.
그의 난입에 진위경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소만. 귀하는 누구요?”
“난 종남삼수 공일혁이오. 대종남파의 이대 제자이자 문주이신 풍운검군 공일중 대협께서 내 오촌 당숙 되시지.”
저놈의 오촌 당숙 어필은 아직도 꾸준하네. 백숙 뒷다리로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을 정도다.
공일혁의 정체를 알게 된 진위경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종남파?”
공일혁은 인맥만 믿고 까부는 낙하산이지만 종남파의 이름은 다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당금 천하 무림을 움직이는 거목들이니까.
기세를 탄 공일혁이 득의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이분은 본문의 장로님이신 송일 대협이시오.”
저 노인이 종남파의 장로라고?
고수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신분인 모양이다. 진위경과 백무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노호검객……!”
“무림말학 백무성이 송 노선배를 뵙습니다.”
황급히 예를 갖추는 두 사람을 노인, 노호검객이 가만히 내려다본다.
강자의 여유와 오만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무성? 네가 화산일학이더냐?”
“예, 과분한 별호입니다.”
“그런 것 같군. 네 스승의 소싯적보다 못해.”
노인네 말하는 싸가지 보소.
하지만 끗발이 대단하다는 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야겠다.
노호검객은 선망의 대상이나 다름없던 백무성을 만인의 앞에서 거침없이 깔아뭉갠 것으로도 모자라 화산파 장문인인 천검진인을 동네 친구 대하듯 불렀으니까.
무공만큼이나 무림에서의 배분도 대단히 높은 모양이었다.
“정진하겠습니다.”
“흠, 말은 제법 번지르르하게 하는구나. 한데 천검진인이 널 보냈다면…….”
별말 없이 고개를 숙이는 백무성의 모습을 바라보던 노호검객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의 시선은 멀뚱멀뚱 선 청풍을 향하고 있었다.
“저놈이로군. 검성의 후인이.”
청풍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 할아버지 아세요?”
“알지. 알다마다. 내 어찌 그를 모를 수 있겠느냐?”
표정을 보아하니 썩 좋은 인연은 아닐 것 같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진위경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빚을 받으러 왔다.”
“빚이라 하셨습니까.”
“그래, 감히 대종남파를 조롱하고 본문의 제자를 상하게 한 빚 말이다.”
칼날 같은 시선이 나와 청풍을 향해 쏘아졌다.
공일혁이 부목을 댄 팔을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이거 보이시오? 얼마 전 초청을 받고 방문한 상산왕부에서 당한 상처요. 의원에게 보여 줬더니 족히 반년은 요양해야 한다더군.”
청풍이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살살 쳤는데…… 많이 아프셨어요?”
잔인한 놈. 아주 두 번 죽이는구나. 공개 망신을 당한 공일혁의 낯빛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놈! 기습한 주제에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중얼거렸다.
“기습 같은 소리 하네. 먼저 멱살 잡았다가 역관광 당한 주제에.”
“닥치지 못할까! 너희 두 놈이 본문을 조롱하고 내게 한 짓을 생각하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다!”
원래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법이지.
진위경과 백무성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씹어 먹어? 지금 그거 우리 막내한테 한 소린가?”
“놈이라니! 공 대협, 언행에 주의하시오! 비록 문파는 달라도 엄연히 무림에서의 배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찌…….”
“클클클.”
노호검객의 거슬리는 웃음소리에 진위경과 백무성이 입을 다물었다.
“배분이라. 말 한번 잘했다.”
“…….”
“…….”
“노부는 본문의 장문인인 풍운검군의 사형이요, 화산파의 천검진인과는 같은 배분이니 아무 문제 없겠구나.”
배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수였다.
일신의 무공도 대단한데 짬으로 밀어붙이니 진위경과 백무성은 물론이고, 검성의 제자인 청풍도 당해 낼 수 없었다.
“노부의 말이 틀렸느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노호검객이 청풍을 향해 말했다.
“너는 종남파의 제자를 상하게 했다. 각오는 되었느냐?”
이래서 말이 무서운 거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없고 오직 결과만 있다. 백무성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노선배님, 이에 관해서는 시시비비를 명백하게 가려야 합니다.”
청풍도 잔뜩 위축된 자세로 중얼거렸다.
“저는 그냥 살살 툭 친 건데요.”
“하면, 네가 한 짓이 아니라는 말이냐?”
“그게 아니라요. 치긴 쳤는데 그렇게 다치실 줄은 몰랐어요.”
틈을 본 공일혁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명백한 살수였습니다!”
“들었느냐?”
“진짜 아닌데.”
청풍이 뭐라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노호검객의 날 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이번 일은 정식으로 화산파에 항의할 것인즉, 감히 발뺌할 생각은 말거라.”
“장로님, 관과 무림은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법. 더군다나 그 자리에 있던 관가의 인물들은 저들에게 우호적이니 혹여 거짓을 고할까 걱정됩니다.”
“네 말이 옳다.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미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다.
부당한 처사에 백무성이 입술을 질끈 깨물자 남은 화살이 향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태원진가는 본문에서 사람을 보낼 때까지 봉문(封門)해라.”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진위경이 대신했다. 아니, 주위에서 노호검객의 말을 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봉문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지?
내가 공일혁에게 약간의 망신을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공일혁에게 한정된 것이었을 뿐, 종남파를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말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겨우 그걸로 봉문을 시킨다고?
비록 종남파에서 사람을 보낼 때까지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그 자체로도 이미 치욕적이다.
“부당합니다!”
진위경의 외침에 노호검객이 눈을 치켜떴다.
“뭐라?”
“어떻게 된 일인지 시시비비를 따져 보기도 전에 봉문이라니. 이것이 구파일방의, 아니 종남파의 방식입니까?”
“네놈이 감히!”
“본가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스으으으.
노호검객의 전신에서 강대한 기세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한 자루의 검이 미간을 노리는 느낌. 살갗이 따끔거렸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테냐?”
“……!”
“이곳은 무림이다. 잊었느냐?”
순간 불쑥 짜증이 솟구쳤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미 지긋지긋하게 겪어서 알고 있다.
돈이 없어서 무시받고, 든든한 뒷배가 없어서 괄시받으며, 재능이 하찮아서 멸시받는다.
‘여기도 똑같구나.’
무림과 현대는 다르면서 참 닮았다.
힘 있는 자들은 거짓을 진실로 만들고 진실도 거짓으로 둔갑시킨다.
약자를 압박하고 찍어 누르는 것.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눈앞의 노호검객처럼.
뚝, 투둑.
어느새 꽉 움켜쥔 주먹에서는 핏물이 흘러나온다.
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을 노려보던 나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아, 시발. 개좆 같네, 진짜.”
감히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 내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을 모두가 들었다.
보이지 않은 뭔가가 쨍그랑, 깨져 나가는 듯했다.
노호검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욕을 한 건 실수였다.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게 사태를 좀 더 원활하게 수습할 수 있는 길이니까.
하지만…….
“좆 같아요. 좆 같다고. 이 시발새끼들아. 갑질도 적당히 해야지.”
더 이상은 못 참겠다. 생각 없는 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놈이라고 욕먹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현실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은 일들을 무림에서까지 리플레이 하고 싶은 악취미는 없으니까.
나는 진위경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좆 같아도 참아야 하는 일인 거 아는데, 너무 좆같이 구니까 두 배로 좆 같아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요.”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진위경이 표정이 참 변화무쌍하다.
일그러졌다가, 펴졌다가. 짧은 순간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 준 그가 마침내 피식 웃었다.
“사실 나도 좆 같았다.”
그 말이 방아쇠를 당겼다.
노호검객의 눈동자에서 용암보다 뜨거운 불길이 쏟아졌다.
“네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스르릉.
씹어 뱉어 내는 한마디와 함께 뽑혀 나오는 검. 새하얀 검신 위로 검기가 겹겹이 씌워졌다.
지금껏 봐 온 어느 누구의 검기보다 강하게 타오르는 그것이 나를 겨눈 그 순간이었다.
“그놈 죽이면 너도 죽어.”
어디선가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노호검객의 몸이 우뚝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