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95
#194화
“아따, 시원하다.”
잠시 소피를 보고 온다던 적천강이 돌아온 것은 일각이 지난 후였다. 어쩐지 수상쩍은 느낌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을 왜 그따위로 뜨느냐?”
“정말 소피보고 오신 거 맞아요?”
“냄새라도 맡아 봐야 믿겠느냐?”
“일각이나 걸리셨는데. 혹시.”
“노부가 한 정력 하느니라.”
“…….”
대체 얼마나 정력이 좋으면 소변을 15분이나 보는 거야.
그 정도면 소변이 아니라 소방 호스 아닌가. 내가 어이없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적천강이 눈을 치켜떴다.
“뭐, 불만 있어?”
“그럴 리가요.”
불만이라니.
오늘 그에게 받은 도움을 생각하면 백 번을 절해도 부족하다.
‘그리고 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흩어 버렸다.
열화문의 신물, 화왕의 제자. 아까부터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목소리들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제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만난 지 하루 된, 그것도 자식처럼 끔찍이 아끼던 제자를 죽인 놈을 새로운 제자로 받아들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비록 그 제자가 천하의 개썅놈이라도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진위경이 다가와 적천강에게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무림 말학 진위경이 천하에 위명이 자자하신 화왕 적천강 대협을 뵙습니다.”
“진가?”
진위경을 위아래로 스캔한 적천강이 감 잡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자네가 이놈 애비 되는 사람인가?”
“예?”
“자식 교육 좀 똑바로 시키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욱해서 사고나 치고 다니고 말이야. 말투도 영 싸가지가 없어.”
진위경이 지금까지 본 가장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제 아우입니다.”
“응?”
“제가 태경이 큰형 되는 사람입니다.”
적천강이 정색했다.
“농담하지 말게. 젊어 보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욕심이 너무 과하면 천벌 받아.”
“사실입니다. 태원진가의 소가주 진위경이 바로 접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나?”
“해가 바뀌었으니 올해로 서른여섯입니다.”
적천강이 불신의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마흔 여섯은 되어 보이는데.”
나이에 비해 좀, 상당히, 많이 삭은 얼굴이긴 하지. 처음에는 나도 아버지로 착각했을 정도니까.
그나마 머리카락은 풍성한데, 세월을 160km 패스트볼로 맞은 얼굴은 해결책이 안 보인다.
슬픔에 잠긴 진위경의 표정에 적천강이 애써 위로했다.
“괜찮아. 사내는 능력일세. 예쁜 색시에 귀여운 자식 놈들이 있으니 됐지 뭘. 허허.”
“아직 홀몸입니다.”
“……서른여섯인데?”
현대에서야 슬슬 결혼 생각할 나이지만 조혼(早婚)이 흔한 무림에서는 서른여섯이면 손자도 볼 수 있는 나이다.
싱글남 진위경이 짧게 대답했다.
“예.”
“…….”
이번 침묵을 좀 길다. 미간을 찡그렸다가, 폈다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던 화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젠장, 술 땡기네.”
나는 피식 웃었다. 오늘 같은 잔칫날에 술이 빠져서야 쓰나, 주위에 널리고 널린 게 술이다.
“한 잔 드려요?”
내 말에 적천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되바라진 놈을 봤나. 지금 노부랑 장난하는 것이냐?”
“예?”
“동이째로 가져오너라.”
* * *
원래 분위기라는 것은 불씨 같아서, 한 번 꺼지면 다시 타오르기 힘들다. 하지만 종남파의 불청객들이 찬물을 뿌리고 난 후에도 불씨는 죽지 않았다.
아니, 화왕이라는 존재로 인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우와아아아!”
“마셔! 마시자고!”
“내가 살면서 화왕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화왕이 당황하면 우화왕 좌화왕!”
“…….”
누군지는 모르지만 방금 저 새끼가 불씨 꺼트릴 뻔했네.
내 눈짓에 대기하고 있던 혁무진이 분위기 살인마를 색출하기 위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사이 적천강은 수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적 대협! 이렇게 뵙게 되어 일생의 영광입니다!”
“추후에 꼭 저희 문파에 들러 주시면…….”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말 그대로 인산인해.
화왕 적천강이라는 이름은 살아 있는 전설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수십 년간 행적이 묘연한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화왕이 나타난 것이다. 중원도, 구화산도 아닌 바로 이곳 산서성의 태원진가에.
‘난리가 날 수밖에 없지.’
팝의 황제라 불리던 전설적인 가수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 정도일까 싶다.
하지만 산서성 현지 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천강은 영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진위경도 그런 낌새를 느꼈는지 전음을 보냈다.
– 막내야.
괴팍한 성격인 적천강과 그나마 길게 말을 섞을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청풍밖에 없는데, 청풍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결국 내가 메신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세요?”
“노부의 꼴을 봐라. 네 녀석 같으면 안 불편하겠느냐?”
적천강이 옆에 놓인 술동이를 노려봤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얼마 비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술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마실 틈이 부족했던 거다.
“염병할. 술 한 잔 마시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다짜고짜 제자로 받아 달라는 사람, 귀빈으로 모시고 싶다는 문주들과 상인들.
심지어 어떤 만삭의 여인은 코를 만져 봐도 되냐고 묻기까지 했다. 화왕의 기운을 받아 큰 인물을 낳고 싶다나 뭐라나.
‘돌하르방인가.’
보는 사람도 실소가 새어 나올 정도인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사실 적천강의 성격에 이 정도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거다.
“그럼 미리 준비해 둔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거긴 조용한데.”
“끄응. 됐다.”
“불편하시다면서요.”
“아, 됐다면 된 거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투덜거리면서도 끝끝내 자리를 뜨지 않는 적천강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만난 시간은 짧지만 그의 성격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시끄러운 곳 싫어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귀찮아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니 일평생을 구화산에서 살았던 것이고.
‘그런데 왜?’
나는 유심히 적천강의 모습을 살폈다.
그의 앞에는 산서성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상회(商會)의 주인이 허리를 굽실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적천강 대협! 천하를 떨어 울리는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얼마나 대협을…….”
“본론만 말하게.”
“평소 마음 깊이 대협을 흠모하던 터라 약소한 성의를 준비했습니다.”
“약소한 성의?”
“예. 얼마 전에 얻은 물건이온데, 역시 주인을 따로 있나 봅니다.”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낸 상인이 뚜껑을 열었다. 투명한 옥이 박힌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독지환(避毒指環)입니다.”
“제법 귀한 물건이군. 구하기 힘들었을 터인데?”
상인이 과장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적 대협의 존안을 뵙게 되었는데 가격이 문제겠습니까! 은자 천 냥 정도밖에 안 합니다. 헤헤.”
저런 반지 하나가 은자 천 냥이라니. 지금까지 태원진가에 들어온 예물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가격이다.
하지만 적천강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일단 주니까 고맙게 받지. 어디에서 온 누구라고?”
“양천상회를 맡고 있는…….”
“양천상회? 양천이면 하북이랑 인접해 있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말이 끊겼지만 상인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 하북팽가와 거래를 트려고 합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이게 상인의 본론이다. 결코 약소하지 않은 약소한 성의를 보이면서까지 적천강을 찾아온 이유.
요컨대 하북팽가와의 거래를 도와달라는 청탁인 것이다.
“팽가라. 지금 가주가 누구지?”
“철혈도(鐵血刀) 팽철영 대협이십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벽력도왕(霹靂刀王)의 자식인가?”
“예, 예. 벽력도왕께서 일선에서 물러나시며 가주 직을 승계했습니다.”
“노부가 소싯적에 벽력도왕이랑 술 한잔했지. 일단 알았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상인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목함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목함 아래에는 방금 전까지 안 보이던 전표 다발이 깔려 있었다.
나는 상인이 물러난 틈을 타 속삭였다.
“벽력도왕과도 아는 사이세요?”
별호로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적천강과 같은 십왕(十王)에 속해있는 초절정 고수다.
적천강이 술을 홀짝이며 대답했다.
“말했잖느냐. 술 한잔했다고.”
“우와.”
벽력도왕을 무슨 동네 친구 만난 것처럼 얘기하네. 이럴 때마다 새삼 적천강의 대단함을 깨닫게 된다.
내가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하자 적천강이 우쭐거렸다.
“석년에 그놈 코를 주저앉혀 놨지.”
“……예?”
“검성이랑 같이 술 한잔하는데 말도 없이 끼어들더니 시비를 걸지 뭐냐. 한 판 붙어서 혼쭐을 내 줬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치, 친구 사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놈이랑?”
적천강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무식한 놈하고 상종해서 뭐 해. 그 후로 서로 얼굴 볼 일도 없었다.”
“…….”
“나중에는 별 괴상한 소문까지 돌더군. 노부와 팽가 놈이 백여 초를 겨룬 끝에 서로를 인정하고 물러났다나 뭐라나. 분명 하북팽가 놈들이 수작을 부린 거겠지.”
그 말에 나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기가 막혔다.
벽력도왕과의 스토리도 어이가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앞서 받은 상인의 청탁도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 그럼 양천상회는 하북팽가와 거래 못 하지 않나요? 적 대협 이름을 대 봤자 역효과만 날 텐데.”
적천강이 눈을 깜빡거렸다.
“양천상회? 그게 무엇이냐?”
“……?”
“아아, 방금 그놈? 그걸 왜 내가 신경 써?”
“아니, 하북팽가랑 거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만나 달라고 해서 만나 준 것뿐이다. 벽력도왕이랑 술 마신 것도 사실이고. 노부가 한 말에 일말의 거짓이라도 있느냐?”
“…….”
그건 모르겠고, 일말의 양심은 확실히 없어 보인다. 나는 그의 뻔뻔함에 존경심마저 들었다.
‘화왕, 휴먼입니까.’
피해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적천강의 공수표를 믿고 ‘약소한 성의’를 보인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구라였음을 깨닫고 땅을 칠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면 집단 사기인데.’
하지만 피해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화왕 적천강에게 준 거 돌려받겠다고 찾아오는 용자는 없을 테니까.
“조만간 꼭 본문에 들러 주십사…….”
“음. 언제 한 번 들르지.”
나중에 죽어서 구천을 떠돌게 되면 들르겠다는 소리다.
“이건 제 작은 성의…….”
“잘 받겠네.”
아냐, 그거 진짜 받기만 하는 거야.
나는 산처럼 쌓여 가는 각종 보물과 영단, 전표들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이걸 위해 남아 있었던 건가.’
노년에 한탕 크게 쓸어 가려는 큰 그림이 분명하다.
이윽고 수십 명의 흑우를 처리한 적천강이 입을 열었다.
“음, 꽤 모였군. 더 없나?”
진위경이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예. 일단 찾아올 만한 사람들은 다 온 것 같습니다.”
“아쉽군. 더 뜯어낼 수 있었는데.”
노인네 탐욕 보소.
땀 대신 술을 마셔 가며 번 전리품들을 바라보던 적천강이 기지개를 쭉 켰다.
“어이고, 고되다.”
“…….”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느냐?”
적천강의 고리눈에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그냥 존경스러워서.”
“노부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진심인데요. 재물이 많아서 나쁠 건 없잖습니까.”
“그래?”
피식 웃은 적천강이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네가 가져라.”
“예?”
“네 녀석에게 전부 준다는 말이다.”
“저걸…… 다요?”
“노부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네게는 다르지. 길거리에 뿌리건 말건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받아 둬라.”
뭐지, 이 상황?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적천강을 바라봤다.
‘갑자기 왜?’
이미 큰 도움을 받았다. 나와 태원진가에 이토록 과한 호의를 베푸는 의도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말, 진심으로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적 대협, 혹시…….”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난 적천강이 취한 얼굴로 말했다.
“아따, 취한다. 이만 들어가서 쉴 테니 내일 보세.”
“…….”
나는 비틀비틀 멀어지는 적천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술동이로 시선을 돌렸다.
채 반의반도 비워 내지 않은 술동이에 달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