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00
#199화
“내 거에서 손 떼라고.”
적천강의 한마디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다음 순간, 내 어깨를 짚고 있던 악불군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적 대협. 저는 그저…….”
이어지려는 말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잘라 냈다.
“남의 것에 손대는 건 누구한테서 배워 먹은 버릇이냐?”
남의 것이라니.
사람을 물건 취급 하는 건 둘째 치고 그 대상이 왜 나인지 의문이다. 내가 무슨 적천강의 제자나 손자도 아니고.
천무학관이라는 좋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고민 중인데 이런 식으로 고춧가루를 뿌릴 줄은 몰랐다.
‘이 노인네 갑자기 왜 이래?’
당황하는 나와 달리 악불군은 침착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만, 저는 여기 있는 진 소협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기회? 기회는 개뿔이. 말은 그럴 듯해도 결국 이놈을 뒤로 빼돌리겠다는 것 아니냐. 노부가 그 시커먼 속셈을 모를 것 같더냐?”
“빼돌리다니요. 결코 아닙니다.”
“그럼?”
적천강의 고리눈에도 악불군은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산동악가의 식솔이 아니라 천무학관 교관으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수뇌부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 그 수뇌부라는 것들은 이놈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고 그따위 지시를 내렸단 말이냐?”
“실례지만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여쭤봐도 될는지요.”
“뭐라?”
적천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악불군을 쏘아봤다.
“노부는 저 녀석에게 본문의 신물을 맡겼다.”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터. 지금 노부를 우롱하는 것이냐?”
“어찌 감히 그런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다만…….”
악불군이 나와 적천강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도무지 스승과 제자 사이로는 보이지 않기에 조심스럽게 뜻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
“……!”
우리는 동시에 몸을 움찔거렸다. 하긴, 일반적인 사승(師承)관계가 얼마나 살갑고 정겨운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처럼 스승님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나를 대하는 적천강의 태도도 피차일반이었다.
‘예리한 것 보소.’
너무 안일했다. 슬쩍 옆을 보니 적천강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이런 우리의 반응에 악불군의 눈빛이 깊어졌다.
“진 소협도 제의를 듣고 망설이더군요. 적 대협의 제자라면 볼 것도 없이 거절했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말만 하니 반박할 수 없다.
천하에서 손에 꼽는 초절정 고수인 화왕의 제자가 미쳤다고 천무학관에 들어가겠나. 그거야말로 황금을 앞에 두고 예쁜 돌멩이를 집어 가는 격이지.
‘어차피 다 들통난 것 같은데.’
상석에는 우리 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들 눈으로는 다른 곳을 보고 있지만 귀는 쫑긋 서 있다.
오늘의 이야기가 퍼져 나가면 화왕의 제자라는 튼튼한 방패도 사라질 것이 뻔했다. 그럼 그 후에는?
‘온갖 놈들이 달려들겠지.’
얼마 전까지의 태원진가는 살점 하나 없는 뼈다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살이 제법 통통하게 올랐으니 이리 떼가 어슬렁거릴 것이다.
서로 눈치만 살피다가 때가 되면 달려들 것이 뻔하다.
이미 백 세를 넘긴 화왕의 죽음이, 바로 놈들이 이빨을 들이미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가장 처음 달려들 놈은 볼 것도 없이 종남파일 테고.’
그 전까지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곧 사라질 허상에 불과한 화왕의 제자라는 명함보다는 천무학관이 백배 나은 선택지다.
‘좋아. 천무학관 가자.’
이윽고 마음을 굳힌 나는 악불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여기 있는 적 대협과 아무 관계도 없고 그냥 약간 인연이 있을 뿐입니다. 천무학관에 꼭 들어가고 싶은데 저 같은 경우는 장학생인가요? 아, 혹시 산서성 농어촌 전형인가요? 등등.
하지만 폭포수처럼 쏟아 내려던 말들은 적천강의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내 제자가 맞다.”
“적 대협과 전 아무런 관계가……. 예?”
이게 뭔 소리야.
나는 홱 고개를 돌려 적천강을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황당해하는 내 시선을 무시한 적천강이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준비가 될 때까지 꽁꽁 감춰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군. 다들 이에 관련해 말이 많은 것 같으니 이참에 단단히 못을 박아야겠어.”
“아니, 잠깐만요.”
간신히 끄집어낸 목소리는 다음 순간, 공력이 실린 적천강의 외침에 파묻혔다.
“천하 무림에 고한다!”
가공할 기파가 땅을 흔들고 태원진가의 경내를 짓누른다.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수백 쌍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막을 새도 없이 벌어진 일.
검버섯이 핀 적천강의 목에 핏대가 솟았다.
“열화문의 십팔 대 문주, 적천강은 태원진가의 진태경을 제자로 받아들여 본문의 적통(嫡統)을 잇겠노라!”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의 말을 이해한 이들이 커다란 탄성과 환호를 토해 냈다.
그것은 내내 반신반의하던 짐작이 사실로 바뀌고, 한 노인의 완벽한 구라가 현실이 되어 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이 악 모가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진 소협, 자네에게도 사과하지. 천무학관에는 잘 전달하겠네. 누구도 감히 적 대협의 제자를 건드릴 수는 없으니 관주께서도 마음을 접으시겠지.”
천무학관에 진학할 수 있는, 아니 다른 사람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모든 길이 막혀 버렸다. 망연자실한 나를 보며 악불군이 허허 웃었다.
“이 친구 보게, 이 좋은 날에 왜 그런 표정인가?”
“…….”
그거야 당연히 적천강이 날 진짜 제자로 삼을 가능성이 1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지.
얻은 것 하나 없이 앞길만 막혀 버린 나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노인네.’
벌써부터 암울한 미래가 눈앞에 그려진다. 무공은 하나도 안 가르쳐 주면서 온갖 구박을 일삼고, 두들겨 패고, 거기에 잔심부름까지.
기껏해야 물건 맡기는 인벤토리 역할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엿 됐다.’
상석 곳곳에서 축하 인사가 쏟아졌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 나를 향해 적천강은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 스승이 한번 안아 보자꾸나. 제. 자. 야.”
“…….”
“어허, 요 녀석 보게. 사람들 앞이라고 부끄러움을 타는구먼. 허허허.”
껄껄 웃은 적천강이 사람들 몰래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 순간, 거부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발걸음이 그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허공섭물(虛空攝物)?’
이거 실화냐.
결국 자그마한 체구로 나를 꽉 끌어안은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마, 웃어라.”
“……예.”
“어깨동무해. 입꼬리 귀에 걸어.”
시바, 모르겠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
우리는 사이좋은 스승과 제자처럼 어깨동무를 한 채 활짝 웃었다. 카메라 불빛 대신 엄청난 환호가 쏟아져 내렸고, 그날 상산왕 주표는 화왕&산서잠룡이라는 초희귀 한정판 사인을 받았다.
* * *
짙은 어둠이 내리깔린 깊은 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태원진가의 어느 담벼락 뒤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자그마한 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태원진가 보호해 주는 거, 좋다 이겁니다. 종남파 놈들 쫓아내 주신 것도 감사해요. 그런데!”
“…….”
“이건 제 앞길을 막는 거잖습니까! 일이 너무 커져서 천무학관도 못 들어가고 누구를 스승님으로 모시려고 해도 이젠 못 해요! 왠지 아십니까?”
말없이 술을 병째로 들이켜던 인영, 적천강이 대답했다.
“제아무리 간덩이가 부은 놈이라고 해도 노부의 제자에게 접근하진 못할 테니까.”
“예. 그러니까요! 적 대협께서 완전히 제 앞길을 틀어막으신 겁니다!”
“그렇군.”
“그렇군이 아니죠. 아실 만한 분이 왜 그러십니까? 저도 좀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에요!”
꿀꺽. 꿀꺽. 꺼어억.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신 뒤 거하게 트림을 내뱉은 적천강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너는 알 만한 놈이 왜 그러느냐?”
“예?”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담벼락을 후려쳤다.
쉬쉬쉭, 콰쾅!
본디 쨍그랑 소리와 함께 술병이 산산조각 나야 정상이다. 하지만 굉음과 함께 박살 난 건 담벼락이었다. 어느새 동그란 술병은 유형화된 공력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노부가 누군지 잊었느냐? 확 씨, 그냥. 죽을라고.”
“으헉!”
“큰절부터 올려도 모자랄 판에 목소리를 높여?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확 그냥.”
“자, 잠시만요! 고정하세요! 고정!”
“고정? 백골이 진토 될 때까지 무덤에 고정당하고 싶으냐?”
“…….”
잠깐 잊고 있었다. 양로원 큰형님 같은 눈앞의 노인네가 무림에서 악명 높은 일진이라는 사실을.
주로 삥 뜯는 것이 돈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까지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다.
‘잘못 건드렸다.’
가뜩이나 밤이라 어두운데 눈앞까지 캄캄해졌다.
그때,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도 싫으냐?”
“예?”
“노부를 스승으로 모시는 게 그리도 싫으냐고 물었다.”
“…….”
제자로 삼을 생각도 없으면서 저게 뭔 소리야.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내 수명 연장에 유리한 길이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피하는 나를 적천강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말해 보거라.”
“뭐, 뭘요.”
“표정을 보아하니 심중에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것 같은데, 네놈 생각을 말해 보라고.”
“그런 거 없는데요.”
“없어?”
콰과광!
그나마 남아 있던 담벼락이 먼지로 바스러지며 흩어진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니까 있네요.”
“방금은 없다며?”
“없었는데요, 있었습니다.”
“그래. 말해 보거라.”
다급해서 막 던지긴 했는데, 막상 말하려니까 심장이 쪼그라든다.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헛기침했다.
“그런데 그게, 좀…….”
“허심탄회하게. 거짓 없는 진솔한 대답을 원한다.”
“정말입니까?”
“무슨 말을 해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으마. 천지신명께 맹세하지.”
“천지신명 같은 거 안 믿으시잖아요.”
“…….”
“…….”
정곡을 찔렀나 본데.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던 적천강이 힘겹게 입을 뗐다.
“오늘부로 믿게 됐다. 어떤 빌어먹을 위인이 하늘 위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본 것이 있으니 믿을 수밖에.”
“……?”
뭘 봤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인 것 같다.
기어코 사문의 명예와 적천강의 이름까지 추가로 걸게 만든 뒤에야 나는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성격이 좀…….”
“좀?”
“더러우시지 않습니까.”
“…….”
“그것도 많이 더럽죠.”
어이없는 표정이지만 손에 들린 술병은 잠잠하다. 용기를 얻은 나는 말을 이어 갔다.
“손버릇도 별롭니다.”
“…….”
“며칠 전에 있었던 일 기억하시죠? 물론 제 잘못도 있긴 했지만 다짜고짜 화염신장을 날리시는 게 말이 됩니까.”
“……계속해라.”
“저도 어느 정도의 체벌에는 동의하는 입장입니다만, 그것도 꿀밤이나 회초리 몇 대 정도지, 화염신장을 맞으면서 수련하고 싶은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의 매가 아니라 죽음의 매예요. 죽음의 매. 그거 잘못 맞으면 죽는다니까요.”
한번 시작하니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적천강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느낀 불만이 하나씩 흘러나왔다. 그럴수록 점차 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래도 후련하긴 하네.’
일다경 후, 폭풍 같은 고해성사를 끝낸 내게 적천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끝났느냐?”
“아직 중요한 게 하나 남았는데요.”
“그, 후우.”
술병이 날아올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적천강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말해라.”
“가장 큰 불만은 앞서 말씀드린 겁니다. 무공을 가르쳐 주지도 않을 거면서 도대체 왜 저를 제자라고 못 박으신 겁니까?”
“그것이 문제더냐?”
“당연한 것 아닙니까? 혼자 익힐 바에야 천무학관에 들어가는 게 백배 나은데.”
“노부에게 배우는 것이 천무학관 따위보다 천배는 낫다.”
“…….”
아니,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나.
황당함에 그를 바라보는데,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적 대협, 혹시…….”
적천강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
“에이, 아닙니다. 잠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서.”
“말해라.”
“아니에요. 말해 봤자 뭐 합니까. 그냥 넘어가시죠.”
“말해라. 뒈지기 싫으면.”
아. 그럼 말해야지. 뒈지기 싫으면 무조건 말해야지.
나는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진짜 제자, 뭐 그런 걸로 삼으실 생각인가 싶었죠. 헛소리니까 대답 안 해 주셔도 됩니다. 하하하.”
“…….”
“하하하.”
“…….”
“저기, 적 대협?”
내 부름에도 한참이나 말이 없던 적천강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안 되냐?”
“뭐가요?”
“노부가 네놈의 스승이면 안 되냐고.”
“……예?”
아니, 이 분위기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