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01
#200화
“노부가 네놈의 스승이면 안 되냐고.”
“예?”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얼핏 들으면 로맨스 드라마 남주 저리 가라다.
나는 주요 부위를 가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뭐냐?”
“아,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말씀이세요?”
“됐다. 못 들은 셈 치거라.”
적천강의 표정은 오묘했다. 왠지 모를 은근한 기대와 짜증, 실망이 뒤섞인 얼굴로 날 바라보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은 천무지체다.”
“천무, 뭐요?”
내 반응에 적천강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무지체를 모른다니, 노부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이냐?”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데요.”
“……하늘도 무심하지. 어찌 이런 놈에게.”
진짜 한 대 치고 싶은 표정이다.
술병을 움켜쥔 채 부르르 떨던 적천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면 구음절맥(九陰絶脈)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있느냐?”
“아, 구음절맥. 알죠.”
예전에 많이 봤었는데. 이게 맞나?
나는 옛 기억을 더듬어 구음절맥에 관한 키워드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특이체질. 아프다. 머리 좋다. 그 대신 요절.”
“…….”
“아닙니까?”
“……핵심은 맞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강한 음기가 혈맥을 틀어막고 이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절맥증의 일종이지.”
“그럼 천무지체는요?”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앞서 구음절맥을 예시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무공을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대신 몸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요절하는 뭐 그런 거라면 큰일 아닌가.
적천강이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천무지체는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무골(武骨)이다.”
하늘이 내린 근골이라니. 듣기만 해도 엄청 좋아 보이는데.
그래서 더 떨린다. 구음절맥도 천재적인 지능과 수명을 맞바꾼 양날의 검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긴장 어린 눈빛으로 적천강의 입을 응시했다.
“그리고요?”
“그리고라니?”
“전 언제 죽는 겁니까.”
“네놈이 죽긴 왜 죽어?”
“사실 요즘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던 것 같아요. 지금도 뼈마디가 쑤시고요.”
내 말을 들은 닥터 최태, 아니 적천강은 짧고 간결한 진단을 내렸다.
“그건 노부에게 맞아서다.”
“아.”
“혹시 천무지체가 구음절맥처럼 요절한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겠지?”
“……커흠.”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적천강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무지체는 구음절맥 같은 절맥증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괜히 하늘이 내렸다고 하겠느냐? 네 녀석은 그 몸뚱어리로 태어난 것부터가 천운(天運)을 타고난 것이다.”
“제가요?”
“노부가 소가주에게 듣기로는 네가 무공을 본격적으로 익힌 지 석 달이라고 하더군. 지금까지의 성취가 정녕 노력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아니죠.”
“어떤 무공도 누구보다 빠르게 네 것으로 체득할 수 있는 근골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는 것이다.”
적천강의 말은 딱 절반만 맞았다.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노력에 더해진 것이 타고난 근골이 아니라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정말 천무지체였다면 약관이 될 때까지 삼류에 머물렀을 리가 없지.’
될성부른 나무는 싹수부터 다르다.
이 몸의 전 주인이었던 진짜 진태경이 그런 천운을 타고났다면 진작 두각을 드러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몸은 천무지체가 아니야.’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팔과 손의 크기와 길이, 근육의 모양과 그 안에 숨겨진 힘.
그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균등하다.
‘시스템.’
레벨 업과 수련으로 얻은 포인트는 능력치로 환산된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능력치를 골고루 분배한다.
아주 작고 미세한 신체 내부의 톱니바퀴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맞물리도록.
‘선천적인 것이 아니니까 그냥 천무지체는 아니고…… 이 정도면 후천적 천무지체 정도는 되려나?’
내 몸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적천강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내 입장에서도 그가 지금처럼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 좋았다.
술이나 퍼먹던 삼류 망나니가 절정 고수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석 달.
천무지체가 아니면 마공(魔功)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다.
‘여하튼 잘됐네.’
초절정 고수인 적천강이 천무지체로 착각할 정도니 내 근골이 매우 뛰어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구음절맥 같은 부작용도 없으니 그야말로 땡큐다.
‘드디어 꽃길인가.’
지금까지 했던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감상에 빠져 있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눈이 마주친 적천강이 움찔하더니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 달이 밝군.”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내가 중얼거렸다.
“먹구름 잔뜩 끼었는데요.”
“…….”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커흐흠.”
헛기침만 연발하던 적천강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노부는 네게 갚을 빚이 있다.”
“그래서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 문제를 확실히 해 두고 싶어서 묻는 것인데, 혹시 노부에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
사실 딱히 없다.
굳이 하나 있다면 아까 전의 발언을 취소해 달라는 정도?
하지만 체면상 적천강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없을 거다. 합리적인 선에서 그가 들어줄 만한 부탁을 제시해야 하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를 않아서 잘.”
“그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거라.”
“아, 생각나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어차피 떠나시려면 며칠 더 있으셔야 하니까.”
하지만 적천강은 단호했다.
“지금 당장.”
“예?”
“지금 당장 말하란 말이다. 별로 고민할 것도 없지 않느냐.”
나를 재촉하던 적천강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예, 예를 들면 노부에게 무공을 배우고 싶다든지. 무공을 배우고 싶다든지. 무공을 배우고 싶다든지. 뭐 그런 게 있지 않겠느냐.”
“…….”
“어디까지나 예를 든 것뿐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
“크흠. 목에 가래가 끼었나. 커흐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적 대협.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커흐흐흐흠!”
“절 제자로 삼고 싶으신 겁니까?”
그 순간, 요란하게 기침을 내뱉던 적천강의 신형이 우뚝 굳었다. 동시에 그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린다.
“무, 무슨 소리냐!”
“들으신 그대론데요.”
“허, 허참. 어처구니가 없군. 노부가 네 녀석을 제자로 들이고 싶어 해?”
“…….”
응. 엄청 그렇게 보이는데.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는데,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병신인 수준이다.
내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적천강이었다.
“이, 이놈! 그 불손한 눈빛은 무엇이냐!”
“그냥 보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모양인데, 전부 틀렸다.”
“아, 예.”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본문의 계승자를 그리 쉽게 결정할 것 같더냐?”
“아까는 되게 쉽게 결정하시던데.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한 말이니까 물리지도 못하잖습니까.”
“그, 그건. 새로운 제자를 들이면 된다.”
“일인전승 비인부전이라면서요? 그래 봤자 세상 사람들은 제가 열화문의 계승자라고 생각할걸요.”
정곡을 찔린 적천강이 빽 소리쳤다.
“네놈을 제자로 삼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
“저 천무지체인데요.”
“헉.”
“삼류에서 절정까지 석 달 정도니까 초절정까지는 얼마나 걸리려나.”
“이, 이놈이. 그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초절정이 뉘 집 개 이름이야?”
“전 쉽던데.”
“…….”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더라.
더럽게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금부터는 무조건 쉬운 거다.
말문이 막힌 적천강에게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다, 초절정이면 어렵긴 하겠구나.”
“무, 물론이지.”
“서른 살 정도면 되려나?”
적천강이 입을 딱 벌렸다.
“이, 이립? 초절정을?”
“아, 너무 길게 잡았나요? 어려울 것 같아서 일부러 그런 건데.”
나는 적천강을 곁눈질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적 대협은 십왕에 들어갈 만큼 고수시니까 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셨겠죠. 거기에 열화문의 무공까지. 와, 부럽다. 나도 저런 상승무공을 익히면 금방 강해질 텐데.”
“……!”
적천강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이 펼쳐지고 있는지 충분히 예상이 간다.
천무지체와 열화문의 신공절학이 만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고작 석 달 만에 믿을 수 없는 성취를 보여 준 나다. 고금을 통틀어 유례없는 괴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거의 끝났군.’
차마 자존심이 있어 말은 못 하고 머뭇거리는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에이, 안 되겠다. 저도 이번 회합이 끝나면 화산파에 가 보려고요.”
“화, 화산파? 거긴 왜?”
“검성 매종학 대협 때문에요. 들어 보니 두 분이 꽤 친하다고 하더라고요? 사정을 잘 말씀드리면 소문 안 나게 제자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
“안 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외침. 흠칫한 적천강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호, 혹시 생각이 있다면…….”
“예? 목소리가 작아서 안 들려요.”
“후우.”
숨을 가다듬은 적천강이 재차 말했다.
“혹시 생각이 있다면 옆에서 무공을 봐줄 수도 있다.”
나는 짐짓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이십니까?”
“물론이다. 빚은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
뒤늦게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준엄한 목소리다.
‘그래 봤자 이미 늦었어, 이 양반아.’
난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요.”
“빚은 열 배, 스무 배로 갚는 것이 노부의 철칙이니라.”
“그렇군요.”
“그렇지.”
“그런데 어차피 며칠 후면 떠나시지 않나요?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뒤로 미뤄도 된다. 네가 어느 정도 성취를 거두면 그때 떠날 계획이다.”
“아,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시는 성격이군요.”
“타고난 천성이지.”
“만약 제가 적 대협께서 원하시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적천강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어허, 이놈! 어찌 벌써부터 안 될 거라 생각하느냐!”
“죄송합니다.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서요.”
“노부가 어떤 성격인지 방금 말해 놓고도 잊었느냐?”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시는?”
“무인이 한 번 검을 뽑았으면 산이라도 썰어야지.”
“이야, 멋지십니다. 역시 적 대협!”
엄지를 치켜세워 준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이 정도면 사제지간 아닙니까?”
“……!”
잠깐 침묵하던 적천강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사제지간이라니, 허튼 소리! 단지 빚을 갚는 것뿐이다.”
“아아, 그렇군요. 제가 적 대협의 뜻을 오해했네요. 정중하게 사죄드립니다.”
“……크흠.”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은 적천강이 말했다.
“다만 호칭은 바꿔야 할 것 같다.”
“호칭 말입니까?”
“비록 우리가 그, 진짜 사제지간은 아니지만, 사람들 눈이 있으니 구색은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긴 하네요.”
호칭이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
짧은 생각 끝에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럼 앞으로 사부님이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
“사부님?”
“으, 응?”
막 잠에서 깬 것처럼 정신을 차린 적천강이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예. 그럼 단둘이 있을 때는…….”
“노야(老爺). 그렇게 불러라.”
“알겠습니다. 노야.”
나는 그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초절정 고수, 화왕 적천강.
그와의 미묘한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진태경을 돌려보낸 적천강은 낡은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부님이라.’
십 년 만이다.
누군가 자신을 사부라고 불러 준 것은.
체격도, 얼굴도, 성격도 달랐지만 그는 진태경의 모습에서 죽은 제자를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에 잠긴 적천강의 주름진 입가에, 문득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나쁘지 않군.’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그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날에 대한 기대와 이유 모를 유쾌함마저 들었다.
“나쁘지 않아. 정말로.”
적천강은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샌가 먹구름이 걷히고 환한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