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03
#202화
한 식경. 자그마치 30분이다.
상대가 아무리 화왕이라고 해도 온 힘을 다하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이게 말이 되나.’
나는 질린 얼굴로 물러났다.
공력에 회전이 가미된 창날을 맨손으로 잡다니. 분쇄기에 손을 집어넣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짓이다.
그렇지만 손의 주인공이 화왕 적천강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투두둑. 치이익.
녹아내린 쇳물이 지면에 닿자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그 모습에 적천강이 혀를 찼다.
“잡철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빨리 녹는군. 이번에 재물도 많이 들어왔을 테니 철 좀 좋은 거 쓰라고 해라.”
“어, 어떻게 한 겁니까?”
“너도 할 수 있다.”
“저도요?”
“물론이다. 이 갑자 이상의 공력과 본문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힌다면.”
“…….”
“쉽지?”
퍽이나 쉽겠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적천강이 입을 벌리고 하품을 쩍 내뱉었다.
“여유 있군. 노부가 네 녀석이라면 그럴 시간에 창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를 텐데.”
“안 그래도 그럴 참입니다.”
허공에 떠 있는 제한 시간을 곁눈질하며 새로운 창을 꺼내 들었다.
남은 시간은 16분. 어느새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갔다.
‘한 걸음. 고작 한 걸음만 물러서게 만들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나는 처음 그 자리에 느긋하게 서 있는 적천강을 노려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후읍-”
슈욱!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적천강과 나 사이의 거리를 지워 버릴 만큼 널찍한 일 보(步)와 함께 창을 뻗어 낸다.
쐐애애액!
그런 나를 보는 적천강의 입꼬리가 솟구쳤다.
“이제 시작이라고 했을 텐데.”
쿠궁!
단 한 번의 발 구름. 그러나 효과는 무시무시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무리가 날아오른다.
느려진 세상 속, 순간 흐릿해진 적천강의 손이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돌멩이를 쳐 냈다.
바로 나를 향해.
쉬쉬쉬쉬쉭!
공력을 실어 쏘아 보낸 수십 개의 돌멩이.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암기나 다름없다.
분명 과거에 상대했던 대장로의 탄지공(彈指功)보다 더한 파괴력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강해졌어.’
웅, 웅, 웅.
창이 울음을 토해 낸다.
일류에 머무르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일체감이 느껴졌다.
이미 대성에 이른 진가창법과 보법은 완벽한 합일을 이루었다.
절정의 벽을 넘어서며 얻은 깨달음이 녹아드니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투로가 보인다.
거기에 상승된 능력치까지.
‘할 수 있다.’
우드득.
꽉 움켜잡은 창대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우그러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아악!
스프링처럼 응축된 힘이 쏘아졌다. 전력을 다해 횡으로 휘두른 창날의 궤적에서 바람이 뿜어져 나온다.
그것은 공력의 발출이었고 내가 불러낸 폭풍이었다.
파스스스.
고운 가루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궤적에 걸려든 돌멩이들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허어, 이놈 보게나.”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몸통을 쳐야 할 때다.
나는 허탈하면서도 기쁜 표정의 적천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쉭! 쉬쉬쉬쉭!
공력을 잔뜩 머금은 창날이 허공을 가른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피해 낸 적천강의 오른손에서 열기가 솟구쳤다.
후웅!
동시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쏘아졌다. 강력한 열양지기가 응축된 기의 덩어리.
나는 이를 악물고 창대를 휘둘렀다.
캉! 콰과광!
굉음, 그리고 엄청난 힘과 열기가 전신을 덮친다. 온통 새카맣게 그을린 채 서 있는 나를 보며 적천강이 껄껄 웃었다.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그걸 쳐 낼 생각을 해?”
“……후. 거의 다 됐는데.”
“웃기는 소리. 노부가 전력을 다했으면 네 녀석은 방금 죽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쳐 낼 만하니까 쳐 냈죠.”
“그래서 그 모양 그 꼴이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볼썽사납게 쓰러지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기어코 막아 낸 것도.”
“그런데 막기만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누가 그러더냐?”
젠장. 생각해 보니 그러네.
나는 반쯤 걸레짝이 된 상의를 부욱 찢어 내팽개쳤다.
“거, 명색이 화왕씩이나 되는 분인데. 손자뻘 되는 어린놈 상대로 너무 힘쓰시는 거 아닙니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증조부뻘 되는 늙은이를 상대로 창을 휘둘러? 네가 그러고도 산서잠룡이냐?”
“노야께서는 초절정 고수잖아요!”
“넌 천무지체잖아.”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말이 아니면 망아지냐?”
“…….”
“뭐, 왜.”
까드득.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는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제 제대로 합니다.”
적천강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적거렸다.
“응? 뭐라고? 한 방에 숯덩이가 된 하수의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
와, 극혐.
노호검객을 발라 버릴 때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시원한 입담이었는데, 막상 내가 당하니까 속이 뒤집힐 지경이다.
“이러다가 제가 정말 한 걸음이라도 물러나게 만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차라리 천마가 소림 방장이 되는 게 빠르겠다.”
“으득.”
“이제 냉수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안 남았을 텐데, 그 안에 노부를 물러나게 만들 수 있겠느냐? 어림없지.”
적천강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3분 남짓.
지금까지 그와 나눈 손속을 돌이켜 보면 퀘스트 실패는 예정된 미래나 다름없다.
그러나 내게는 아직 보여 주지 않은 비장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진짜 후회하실걸요.”
“후회는 무슨. 애초에 네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그래도 싹수는 제법 보이니 계속 정진하면…….”
“아쉽네요.”
“응?”
의아해하는 적천강을 향해 나는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쉬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노야께서 아무런 공세도 취하지 않고 막기만 하신다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데…… 하긴 그런 조건은 없었으니까요.”
“노부가 막기만 하면 충분히 물러나게 만들 수 있다?”
적천강의 눈이 번쩍 빛난다. 호승심인지, 호기심인지.
그의 눈빛에 깃든 정확한 감정은 모르겠지만 반쯤 넘어온 것은 확실하다.
나는 그를 못 본 척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못 들은 셈 치세요. 제가 성공해 버리면 노야의 명성에 금이 가지 않습니까.”
그 한마디가 쐐기였다.
“……이놈 봐라.”
묘한 얼굴로 볼을 실룩거리던 적천강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뻔히 보이는 속셈이긴 하다만,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진심이십니까?”
“화왕일언중천금이라는 말도 못 들어 봤느냐? 노부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아, 예.”
은근슬쩍 앞 글자 바꿔서 표절하는 것 보소.
어쨌건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나는 반쯤 숯덩이가 된 창을 버리고 세 번째 창을 꺼내 들었다.
‘아마 일회용이 되겠군.’
하지만 절정 등급 퀘스트를 완료하는 대가라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헐값이다.
자세를 고쳐 잡는 나를 보며 적천강이 미간을 좁혔다.
“혹시 독이나 암수를 쓰려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사내라면 큰 거 한 방이죠.”
고오오옹.
45년의 공력을 집어삼킨 창대가 부르르 떨렸다.
* * *
콰아아아아!
거대한 바위가 날아가고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간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공터의 중심엔 적천강이 우뚝 서 있었다.
정확히 다섯 걸음 물러난 그가.
“너, 너…….”
적천강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와 초토화된 주변을 번갈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름답던 대자연은 온통 꺾이고 뽑힌 나무와 바위들로 흉물스럽게 변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찌르기, 일섬(一殲)이 불러온 결과다.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 글쎄요. 저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써 본 일섬이다.
공력까지 비약적으로 상승한 후라 파괴력이 강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잘 모르겠다는 내 대답에 적천강이 빽 소리쳤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요. 와, 진짜 미쳤…….”
순간 눈앞이 핑 돌면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모든 힘과 공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쏟아부은 탓에 벌어진 일.
비틀거리는 내 몸을 주름진 손이 받아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전후사정은 나중에 들으마. 우선 쉬어라.”
그의 말과 동시에 등으로부터 힘찬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필시 적천강이 나를 위해 불어넣어 준 공력일 것이다.
태양을 집어삼킨 것처럼 뜨거울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그의 공력은 따뜻하고 거대했다.
그 포근한 온기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노, 노야.”
“저항하지 말고 몸을 맡겨라.”
“……맞죠?”
“응?”
“제가 이긴 거 맞죠?”
“……!”
적천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노부가 졌다.”
“으헤헤헤.”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록 수많은 제약이 걸려 있었다고는 하나, 천하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적천강을 물러나게 했다는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었다.
띠링.
– 퀘스트, [일보 후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 퀘스트 보상이…….
멀어지는 시스템 알림 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그놈 참. 잘도 자는구나.’
적천강은 곯아떨어진 진태경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원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는 천진난만한 소년 같기도 했고, 이미 한차례 세상을 겪은 청년 같기도 했다.
‘묘한 놈일세. 묘한 놈이야.’
지켜볼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이미 한 꺼풀 껍질을 벗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는 더 단단하고 눈부신 비늘이 숨겨져 있었다.
‘잠룡(潛龍).’
태평하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는 이 어린 청년은 아직 여의주를 얻지 못한 한 마리의 용이었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진태경의 끝은 어디까지일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이 녀석의 진정한 한계를 볼 수 있을지.
‘특히 마지막의 그 일격은…….’
다시금 주위를 둘러본 적천강이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이것이 정말 갓 약관을 넘은 후기지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광경이란 말인가.
단언컨대 석년의 검성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무신(武神). 그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군.’
인간으로 태어나 신으로까지 불리는 무인. 화왕 적천강이 유일하게 경외심을 느낀 단 한 사람.
천하, 아니 고금제일인으로까지 추앙받는 그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지금의 진태경과 무신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던 적천강은 문득 실소를 흘렸다.
‘노부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는 녀석이 가진 재능의 크기가 무신에게 비견될 정도라는 것이겠지.’
심유한 눈빛으로 진태경을 바라보던 적천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그의 마음속에는 저 어린 잠룡에게 여의주를 쥐여 주고 싶은 욕망이 무럭무럭 샘솟고 있었다.
‘저 구름 위로 훨훨 날아가거라. 비와 바람으로 천하를 덮을 수 있는 천룡(天龍)이 되어라.’
드르렁.
대답 대신 들려온 코골이에 적천강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