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06
#205화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걸까?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정신은 맑았다. 아주 잠깐 잠들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뭐지?’
단출한 가구와 몇 개의 장식품. 지은 지 얼마 안 된 방 안에는 목재 특유의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았다.
늘 보던 익숙한 광경.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낯설다.
‘이건…….’
나는 떨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바라봤다.
대기엔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고 누군가 내 눈에 야시경을 심은 것처럼 사방이 환했다.
격자무늬 창밖으로 보이는 달이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렇게 밝은데 저 달은 왜 떠 있는 걸까. 사실 저건 해가 아닐까.
귀신에 홀린 것처럼 한참을 멍하니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아.”
이 세상, 무림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임독양맥…….”
막혀 있던 터널이 뚫리면 빛이 쏟아져 나온다.
터널 안의 어둠에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빛이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법. 지금의 내가 바로 그렇다.
임독양맥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걷어 내자 비로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빛이 보였다.
“깨어났느냐.”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등잔불 하나 없는 방 안. 그의 얼굴에 가득한 검버섯과 주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노야.”
화왕 적천강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오냐.”
“많이 늙으셨네요.”
순간 말문이 턱 막힌 그를 향해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강하십니다. 제가 본 누구보다.”
이건 앞서 했던 말의 뒷수습이나 단순한 아부가 아니라 순도 100%의 진심이다.
임독양맥을 타통한 지금, 나는 저 자그마한 체구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무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커흐흠. 뻔한 소리를.”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한 적천강이 말을 돌렸다.
“해서, 몸 상태는 어떠하냐?”
“최곱니다.”
굳이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볼 필요도, 공력을 일으켜 몸을 살필 이유도 없었다. 눈을 뜬 순간 느꼈으니까.
내 망설임 없는 대답에 그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노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 아니, 아주 손쉽게 처리했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암.”
“…….”
“지, 진짜다!”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표정이 불손하지 않으냐! 표정이!”
그거야 당신 속셈이 뻔히 보이니까 그렇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무공에 비해 성격은 훤히 드러난다.
폭력적이고 괴팍하기 짝이 없지만 의외로 알기 쉬운 사람, 내게 있어 적천강은 그런 이미지였다.
“제가 안검하수라서 종종 그런 오해를 사는 편입니다.”
안면에 철판을 깔고 딱 잡아떼자 적천강이 씩씩거린다.
“여기 놈들은 왜 다 하나같이 이 모양이냐? 소가주라는 놈은 가문의 중대사도 내팽개치고 네 녀석을 보러 들락거리지를 않나, 의원이라는 것들은 죄다 돌팔이라 죽네 사네 입방아만 찧어 대고.”
“잠깐만요. 죽다니,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습니까?”
“누구겠느냐?”
의미심장한 적천강의 시선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거 혹시 접니까?”
“그래. 지난 칠 주야 내내 아주 뒤집어졌지. 이 난리가 날 줄 알았으면 정신을 차릴 때까지 바위 밑에 처박아 둘 걸 그랬다.”
뒷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제가 칠 주야씩이나 기절했었다고요?”
“씩이나, 가 아니라 고작 칠 주야다. 족히 달포는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천무지체가 좋긴 좋군.”
“……이거 무슨 부작용, 그런 건 아니죠?”
“이놈 이거 말하는 싸가지 보게. 노부가 기껏 고생해서 임독양맥까지 뚫어 줬더니, 뭐라? 부작용?”
“아까는 아주 손쉽게 처리하셨다면서요.”
멈칫한 적천강이 빽 소리쳤다.
“그건 그거고! 똥을 싸도 밑을 닦아야 하는 법이거늘, 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탁기를 뺐으니 새로운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아니냐!”
“…….”
잔뜩 흥분한 상태라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다.
‘일종의 최적화 과정, 뭐 그런 건가?’
하기야 임독양맥 뚫었다고 다 죽어 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것도 웃기긴 하지. 레벨 업을 해도 정신적 피로가 쌓이면 기절하기 마련이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자그마치 일주일이라니.
“그럼 회합도 끝났겠네요.”
“회합인지 반합인지는 이미 사흘 전에 끝났다.”
아직 삐친 기색이 역력한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악불군이라고 했나? 그놈은 아직 남아 있더군.”
뜻밖의 이름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천무학관의 교두인 악불군이 태원진가에 찾아온 것은 진무경을 데려가기 위해서다.
설마 진무경이 폐관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
“악 대협이 왜요?”
“직접 물어보거라.”
“에이, 제가 잘못했으니 이제 그만 화 푸시고 말씀해 주세요.”
적천강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노부가 그 정도로 소인배로 보이느냐? 지금 오고 있으니 직접 들으라는 말이다.”
“아.”
과연 그 말대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과 함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막내야!”
칠 주야 만에 깨어난 나를 발견하고 울먹거리는 진위경의 뒤에서 악불군이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침 적 대협께서도 계셨군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적천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 꺼져라.”
“진 소협의 거취와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빌어먹을.”
작게 욕설을 내뱉은 적천강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 * *
악불군은 겉모습처럼 그리 뛰어난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의 건조한 설명을 모두 들은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를 초청한다는 말이죠. 그 성, 성라…….”
뭐였더라? 설명이 워낙 지루해서 뭘 들었는지도 벌써 가물가물하다.
순간 헷갈린 나를 대신해 적천강이 말을 이었다.
“성라대연(星羅大宴).”
“아, 맞아요. 성라대연.”
“천하의 무림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루고 결속을 다지는 큰 행사라네. 이 년, 혹은 삼 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이번 성라대연은 하남에서 개최되지.”
악불군의 부연 설명에 적천강이 실소를 흘렸다.
“천하 무림의 결속은 개뿔. 힘 있는 놈들끼리만 으쌰으쌰 하면서 서로 띄워 주고 인맥도 쌓는 곳이다.”
가차 없는 돌직구 보소.
별다른 반박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악불군의 모습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적천강은 신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사십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지. 마교 놈들을 몰아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권 다툼이라니…… 못 볼 꼴만 잔뜩 봤어.”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난세는 곧 기회. 욕심 많고 힘 있는 자들은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다.
적천강이 다시 구화산에 칩거하게 된 이유와도 일부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규모는 무지막지하게 큰 모양인데?’
내 호기심 어린 눈빛에 적천강이 미간을 좁혔다.
“뭘 그렇게 보느냐?”
“별건 아니고요. 사람 많고 귀찮은 건 질색하시는 분이 왜 그런 곳에 가셨나 해서요.”
“부탁을 받았다.”
“……?”
적천강이 누가 부탁한다고 해서 순순히 들어줄 성격이었나?
순간 들었던 의문은 이어서 흘러나온 한 사람의 별호로 깨끗이 사라졌다.
“무신(武神).”
“아.”
말로만 듣던 무신이다.
땅에는 열 명의 왕, 하늘에는 세 개의 별, 마지막으로 그들 위에 한 명의 신이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무신의 부탁이라면 적천강도 쉽게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라대연을 만든 것도, 노부에게 참석해 달라 부탁한 것도 그다. 일신, 삼성, 십왕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흐릿한 눈빛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적천강이 문득 악불군을 응시했다.
“그는 어찌 지내고 있나?”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항간에는 좋지 않은 소문까지…….”
“무신이 죽기라도 했을까 봐? 허허. 머리에 똥만 찬 놈들이 이리 많아서야.”
헛웃음을 흘린 적천강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해서, 네 생각은 어떠하냐?”
“음.”
“비록 힘 있는 놈들의 잔치라고 하여도 성라대연이 천하 무림인의 집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출신 성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지.”
“글쎄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뒤통수만 긁적였다.
성라대연. 천하의 무림인들이 모여 결속을 다지고 자웅을 겨루는 자리.
뛰어난 강자들과 겨뤄 볼 수 있고, 중원 전체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무림에 온 뒤부터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공을 익히는지, 소중한 사람과 내 목숨을 지킬 만큼 강해졌음에도 왜 수련을 멈추지 않는지.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비로소 얼마 전에 그 답을 찾았다.
‘재밌으니까.’
청풍에게 했던 말처럼, 나는 무공이 좋다. 재미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돈과 명예를 움켜쥔다 해도 수련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무공에 중독되어 버렸으니까. 강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커다란 쾌감을 주는지 깨달아 버렸으니까.
“진 소협.”
악불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트렸다. 이제는 대답해야 할 때. 나는 크게 심호흡한 뒤 입을 열었다.
“저는…….”
이어진 내 대답을 들은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 * *
세 사람이 자리를 떴다. 방 안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마지막에 적천강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강해지고 싶다. 그게 네 대답이더냐?’
‘예.’
‘그 말은 성라대연에 가겠다는 뜻이냐?’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다면.’
‘너는 아직 젊고 충분히 강하다. 성라대연에 나간다면 천하 무림에 네 이름을 각인시키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 터. 그것들이 탐나지 않느냐?’
‘탐납니다. 무공이. 더 높은 경지가.’
‘……!’
한참동안이나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적천강은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날이 밝으면 노부의 처소로 찾아오너라.’
그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시야는 대낮처럼 환했고 전각 밖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발걸음과 호흡이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다.
‘충분히 강하다.’
떠나기 전 적천강이 직접 했던 말이다. 다름 아닌 화왕 적천강이, 나를 인정했다.
그러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누구보다 강하다.’
F급 헌터였던 시절, 내 소원은 E급 헌터였다. 처음 무림에 발을 디뎠을 때는 혁무진을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수록 나는 강해졌고 꿈은 원대해졌다.
누군가는 이걸 욕심이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욕심과 꿈은 다르다.
지금의 나는 꿈을 품고 있다. 화왕 적천강은 나를 꿈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줄 인도자다.
‘아침이 기대되네.’
날이 밝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세 시진.
아무래도 오늘은 긴 밤이 될 것 같다. 나에게도 적천강에게도.
‘특히 내게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긴 밤이 되겠지.’
나는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이제는 무림에서 벌어진 많은 일 들을 뒤로하고 돌아가야 할 때다.
‘로그아웃.’
띠링.
경쾌한 시스템 알림과 함께 스르륵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