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18
#217화
콩나물국은 별것 없어 보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가는 요리다.
그런 의미에서 ‘블랙 와이번의 둥지’는 콩나물국과 같았다.
이 광활한 A급 게이트에는 와이번뿐만 아니라 여러 종의 몬스터들이 존재했다. 마치 콩나물국에 들어가는 재료들처럼.
– 뀌이이익!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돼지 울음소리에 내가 중얼거렸다.
“……콩나물국에 돼지고기도 들어가나?”
옆에서 걷고 있던 원명훈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응? 갑자기 웬 돼지고기?”
“아니에요. 근처에 몬스터가 있는 것 같아서.”
“몬스터?”
잠깐 제자리에 서서 귀를 기울이던 원명훈이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어, 그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원명훈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 너무 긴장한 것 같은데? A급 게이트라고 쫄 거 없어. 마음 편히 먹으라고.”
“분명히 들었는데…….”
“착각이겠지. 만약에 그런 소리가 들렸으면 내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을걸?”
자신만만한 말투와 미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명훈은 유명한 스타지만 헌터로서의 명성도 상당했다.
랭커에 들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수만 명의 헌터들 중 100위 안에 들었다는 뜻이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아직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낸 신출내기에 불과하다.
‘표면적으로는, 말이지.’
전 세계를 통틀어도 나만큼 비밀이 많은 놈도 없을 거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법.
나는 목젖까지 차오른 말들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그럴 수 있지. 경계심을 갖는 건 좋지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어차피 탐지 마법 쓰면서 가고 있으니까.”
“…….”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어깨를 툭 치는 원명훈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까부터 그를 보고 있자면 뭐랄까, 마음 한구석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겨우 이 정도였나?’
몇 시간 전, 그린 와이번을 상대하는 원명훈을 보며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와이번은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다. 그리고 둘째.
‘명훈이 형도 마찬가지다.’
그는 강하다. 그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러도 다룰 수 있고, 한때나마 랭커에 들었을 정도의 실력자다.
무림으로 치자면 절정 고수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아니, 원명훈이 보여 준 모습이 전부라면 오히려 무림의 절정 고수보다 못했다.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몰라.’
환경이 달라서 그런 걸까?
현대와는 달리 무림은 말 그대로 병장기 한 자루에 의지해 살아남아야 하는 험난한 곳이다.
법보다 칼이 가까운 세상이니 무공이라는 것이 극도로 발달할 수밖에.
‘반면 현대의 헌터는 레이드에 치중되어 있고, 마법이 존재하지.’
무(武)라는 거대한 틀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무림인과, 각자의 역할을 나누고 그 안에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헌터.
옳다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개개인의 무력으로 비교하자면 헌터는 무림인의 상대가 되지 못해.’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이 그의 전부라면 원명훈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령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내가 강해지긴 했구나.’
불과 몇 달.
오랜 시간 우상이었던 A급 헌터를 재단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성장했다.
‘기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고.’
원명훈을 보며 묘한 감상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 뀌이이익!
– 취익!
두 번째로 들려온 몬스터의 울음소리는 처음보다 크고 분명했다.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아차린 원명훈도 고개를 돌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방금 도대체 어디서 들려온…….”
내가 등에 메어 둔 창대를 꺼내며 대답했다.
“다섯 시 방향. 약 삼십 여장, 아니 백 미터 밖이요.”
“어?”
“숫자가 꽤 되네요. 슬슬 레이드 준비하시죠.”
“주, 준비하라고?”
“네. 한 사오십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너 지금 무슨…….”
원명훈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접근하는 사십여 마리의 오크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흔일곱 마리네요. 그냥 제가 처리할까요?”
“…….”
“형?”
내 부름에 원명훈이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으, 으응?”
“제가 처리할까요?”
“……저걸 너 혼자?”
“네. 몸이 아직 안 풀려서.”
“그,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만약에 도망치는 놈 있으면 처리해 주세요.”
말을 마친 나는 창대를 붕붕 휘두르며 놈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무런 마법도 걸려 있지 않은,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철창이다.
‘괜히 마법 걸려 있는 거 쓰면 무림에서 적응 못 하니까.’
마법은 놀라울 만큼 편리하고 유용한 능력이다.
그러나 당장은 플러스 요인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마이너스다.
장비빨이 아닌, 기본 실력을 키워야 어떤 위기에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저놈들 다 잡으면 레벨 업 한 번 정도는 하려나.’
나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 땅을 박찼다. 갈라지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쐐애애애액!
* * *
쉭! 서걱! 퍼버버벅!
창날이 깔끔하게 목젖을 베어 낸다.
오크의 무릎이 땅에 닿기도 전에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오크의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이어서 또 하나, 그리고 둘, 뒤이어 셋……. 은빛 선이 궤적을 그릴 때마다 피와 죽음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종횡무진.
“……이야.”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 내던 1팀장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원명훈이 살벌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대표님. 그게 아니고.”
“이 새끼가. 지금 넋 놓고 감상할 때야?”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변명하던 1팀장이 슬쩍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아니 근데, 진짜 잘 싸우긴 하는데요?”
“……잘 싸우긴 무슨.”
“움직임부터가 다릅니다. 평범한 A급 루키가 아니에요.”
“…….”
“보니까 마법 장비도 하나 안 걸친 것 같은데, 오크 오십 마리한테 단신으로 달려든 깡 하나만 해도 인정해 줘야 합니다. 누가 저한테 저렇게 하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 없어요.”
원명훈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핥았다.
그로서도 1팀장의 말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맞는 말뿐이다.
진태경을 지켜볼수록 황당함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저놈, 도대체 정체가 뭐야?’
판타지 소설에서나 동네북 취급받지, 오크는 결코 만만한 몬스터가 아니다.
종도 다양하고 확인된 부족의 숫자도 수십 개. 지금 나타난 오크들은 어설프게나마 갑옷까지 갖춰 입은 걸 보아하니 B급에 속하는 오크 워리어다.
한데 진태경은 그런 놈들을 상대로 압도하고 있었다.
‘오크 워리어 오십 마리를 혼자 상대해? 이제 막 A급으로 각성한 애송이가?’
이미 그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알아봤다.
그는 F급으로 시작해서 F급으로 죽을 것이 분명했던, 불량품으로 낙인찍힌 최하급 헌터였다.
그런데 좁쌀만 한 F급 게이트에서 고블린 따위나 상대하던 놈이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대표님. 대표님?”
상념에서 깨어난 원명훈이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못 들으셨어요? 아까부터 계속 옆에 계셨으니까 뭐 수상한 점 없냐고 여쭤봤었는데.”
“수상해?”
“네. 이상하잖아요. 진태경 저 자식, 분명히 뭐가 있어요.”
“…….”
잠시 침묵하던 원명훈은 1팀장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오크가 나타나는 걸 미리 알았다고요?”
“목소리 줄여. 우리만 있는 거 아니니까.”
1팀장이 흘끗 뒤를 바라봤다.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평온한 얼굴로 전투를 구경 중인 평화 길드원들을 살핀 그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상에. 저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뭐 짚이는 거 없으세요?”
“탐지 마법이겠지. 무조건 탐지 마법이야.”
“탐지 마법이 아니면요?”
“뭐?”
1팀장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저기, 대표님. 혹시. 이건 정말 만에 하나인데요…….”
“주둥이 닫아. 헛소리 들어 줄 생각 없으니까.”
“호, 혹시 모르잖습니까.”
순간 원명훈의 눈에 기광이 맺혔다.
“이런 씨발…… 그럼 진태경 저 새끼가 나보다 강하다는 거냐? 그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 살벌한 기세에 1팀장이 황급히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낮게 깔린 채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러는 고스톱으로 배운 줄 알아? 아무것도 없던 새끼 거둬 주고 키워 줬더니 이제 내가 우습냐? 랭커라는 이름이 개좆으로 보여?”
“아, 아닙니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처음 만났을 때는 나나 당신이나 비슷했고, 랭커는 연예계 생활을 하며 쌓은 인지도와 엄청난 로비로 얻어낸 결과물이었잖아.
1팀장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이미 함께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과거로 돌아가기에는 함께 해 온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런 기색을 느낀 원명훈이 독사 같은 눈빛으로 1팀장을 노려봤다.
“우리 종훈이 많이 컸네.”
직책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스타 길드의 몇몇이 익숙하게 두 사람을 둘러싸며 외부인의 시야를 차단했다.
“야, 김종훈이.”
툭툭.
1팀장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원명훈이 모래알보다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 여기서 실수하면 다 좆 되는 거야.”
“……예.”
“날랜 애들 몇 명 시켜서 보스 몬스터 찾아. 정 안 되겠으면 적당히 강해 보이는 와이번 몇 놈 끌고 오고.”
“알겠습니다.”
1팀장이 기죽은 얼굴로 대답한 그 순간, 어디선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산적수염을 한 아저씨가 활어처럼 펄쩍펄쩍 뛰는 중이었다.
“태경아! 너 이 자식! 이 멋진 자식!”
마침내 전투가 끝난 것이다.
B급 몬스터인 오크 워리어 오십여 마리를 전멸시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5분 남짓.
곳곳에 널브러진 수십여 구의 사체들 사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청년이 씩 웃고 있었다.
“아, 이제 몸 좀 풀렸네. 명훈이 형, 저 잘했죠?”
“……!”
원명훈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샌가 무참히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이런 개 같은……!’
그는 진태경을 볼 때마다 머리가 뜨거워지고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단순히 재수가 좋아 언론의 주목을 받은 놈, 그런 행운을 얻은 주제에 유명세를 제대로 활용할 줄도, 그럴 생각도 없는 놈.
원명훈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가식이었고 역겨움의 근원이었다.
‘평생 게이트만 돌다가 뒈질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내 제안을 까?’
차라리 다른 대형 기획사의 스타 헌터가 되고자 했다면 지금처럼 분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태경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구멍가게에 불과한 평화 길드를 선택했다.
‘병신 같은 놈.’
후회하게 될 거다.
마음속으로 뇌까린 원명훈이 1팀장을 향해 눈짓했다.
* * *
“잘했어! 잘했어, 인마!”
퍽! 퍽!
임꺽정이 콧김을 내뿜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와! 오크 워리어를 오십 마리나! 진짜 최고의 헌터!”
“진정하세요.”
“움직임, 창술, 소울…… 역시 A급 헌터. 게이트를 뒤집어 놓으셨다!”
“…….”
아니, 거기서 소울이 왜 나와. 그리고 뒤집긴 뭘 뒤집어.
어이없어하는 나와는 달리 임꺽정의 흥분은 가실 줄 몰랐다.
“네가 이렇게 될 줄 알았, 크흠.”
“……혹시 우시는 거 아니죠?”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파르르 떨던 임꺽정이 고개를 돌렸다.
“울긴 누가. 그냥,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아저씨.”
“혹시 그때 기억나냐? 2년 전에 E급 게이트에서 습격받았을 때.”
“언제…… 아, 알겠다.”
“그래, 팀장이라는 자식은 제일 먼저 도망치고 이제 다 죽었구나 싶었는데 네가 끝까지 후미에 남아서 부상자들 지켜 줬잖아.”
“혹시 그중에 아저씨도?”
임꺽정이 격정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기억으로는 한 일곱 명쯤 구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임꺽정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래서 날 최 팀장한테 추천했던 건가.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내가 당한 건 잘 잊어도 신세 진 건 죽을 때까지 안 잊어.”
“잊으세요. 다 지난 일인데 뭘.”
“어쨌든 나는 네가 잘돼서 참 좋다. 태경아. 내가 아무리 용 써 봐야 D급 헌터밖에 못 되지만……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
알고 있다. 임꺽정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도 나를 늘 아껴 주고 생각해 준다는 것을.
‘내가 사람 복은 있는 편이지.’
나는 따뜻한 눈빛으로 길드원들을 응시했다.
우선 실질적 물주라 할 수 있는 최 팀장이 첫 번째다.
“진태경 씨.”
“예, 팀장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뭘 이런 거 가지고.”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
“방금 보여 주신 그 눈빛은 필시 제 목에 걸린 이 ‘프로즌 아이’를 알아본 것이겠지요.”
흐뭇하게 웃은 최 팀장이 목걸이를 잡아 뺐다.
저건 도대체 언제부터 걸고 있었던 거야. 오늘 처음 봤다.
“러시아 제일의 장신구 제작자, 블라디미르 스탈린이 도안을 구상했고…….”
“…….”
시벌, 내 감동 돌려내.
미치도록 한결같은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던 그때였다.
“음?”
순간 멈칫한 최 팀장이 임꺽정의 목을 가리켰다.
“그건 혹시 예티의 목걸이가 아닙니까?”
그 탐욕스러운 시선에 화들짝 놀란 임꺽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어.”
“저건 중고 마켓에도 잘 안 올라오는 물건인데…… 어디서 나셨습니까?”
“이, 이거?”
임꺽정 본인 거라고 하면 목째로 뜯어 갈 기세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중년 남성은 후다닥 목걸이를 벗어 내게 건넸다.
“내 거 아냐. 태경이가 빌려준 거야.”
“진태경 씨가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빌려줬어요. 저도 명훈이 형한테 빌린 거지만.”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잠깐 살펴봐도 될까요?”
“뭐, 보는 거야 상관없겠죠.”
손에 든 [예티의 목걸이]를 그에게 건네주려던 그때,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이게 그렇게 비싼 물건인가?
‘그러고 보니 아직 감정도 안 해 봤네.’
어차피 내게는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이지만, 무슨 성능인지 정확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별생각 없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템 감정.’
띠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