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2
#21화
띠링.
– [진가심법]을 수련했습니다.
– 반복 수련의 결과로 근맥과 근골이 1씩 상승합니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어스름한 새벽, 촛불로 밝힌 방 안은 호박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
고요 속에서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몇 번째 시도였을까. 스무 번? 서른 번? 중요한 건 결과다. 이번에도 굳은 공력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나마 나아지고 있다는 걸 위안 삼아야 하나?’
공력을 다루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내가 F급 헌터가 아니라 C급. 아니 최소 D급만 되었어도 훨씬 빨리 적응했겠지만, 현실은 냉혹한 법이다.
‘근골, 근맥이 꾸준히 향상되는 덕분인 것도 있겠지.’
공력은 인체의 혈을 타고 흐른다. 심법을 수련하면 할수록, 근골과 근맥이 향상되면 될수록 혈이 넓어지고 튼튼해진다. 처음과 비교하면 보다 더 많은 공력을, 훨씬 빠른 속도로 순환시킬 수 있었다.
‘스킬 포인트 덕분이지.’
레벨 업 한 번에 10씩 주어지는 스킬 포인트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근골과 근맥을 향상시키는 데에는 그만한 양분이 없다.
‘스킬창 오픈.’
스킬창
[LV.17 진태경]심법 : 진가심법 (사 성)
무공 : 진가창법 (오 성) / 진가보법 (오 성)
근골 : 105
잔여 포인트 : 0
‘가능성이 보인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점점 작고 허술해지고 있다. 계속해서 두드리다 보면 곧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내가 재능은 없어도 끈기는 있는 놈이지.
‘계속 시도한다. 될 때까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앞서 수차례의 운기조식 덕분에 잔뜩 곤두선 감각들 사이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웅웅웅. 언뜻 들으면 벌 떼 우는 소리처럼 들리는 그것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었다.
‘무슨 일이지?’
귓가로 공력을 흘려보냈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완전히 알아듣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한 단어를 들었으니까.
‘전투!’
항산검문이다. 드디어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황급히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그리고 반쯤 열린 창문 너머로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착지한 내 시야에, 차례차례 불이 밝혀지는 전각들이 들어왔다.
‘결국…….’
시작됐구나.
* * *
스물다섯. 가지런히 눕힌 시신의 숫자였다.
모든 생기를 잃은 채 고목처럼 누워 있는 그들을 확인했을 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건.”
나는 헌터다. 무수한 전투를 겪었고 죽음을 지켜봤다.
중독되고, 베이고, 으스러지고, 터지고…….
상대하는 몬스터에 따라 죽음의 종류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성인’이라는 것.
그건 각성의 기본 조건이었다. 어떤 기준인지, 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게이트의 존재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법칙이었다.
그래서 내가 목격한 그 숱한 죽음들 중에는 어린아이의 죽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건 게임이다. 고작 게임이라고.’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눈앞의 광경이 너무나도 참혹했다.
혈血
이마에 아로새겨진 글자. 말라붙은 핏물 위로 횃불이 비친다. 열 명이 넘는 어린아이들이 그렇게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기껏해야 중학생. 혹은 그 밑으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렇게 죽어 있었다.
“우웁!”
떨리는 손으로 횃불을 들고 있던 무사 하나가 허리를 숙이는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토악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무사가 떨어트린 횃불을 집어 드는 손이 있었다.
“소미.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내가 가주 대행이 되던 날, 응현 지부장이 자신의 보물이라며 침이 마르게 자랑했었다.”
진위경이다. 그는 꺼질 듯한 눈동자로 횃불을 들어 아이들의 얼굴을 비췄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드러날 때마다 어김없이 각자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아이의 이름을 부른 진위경이 나를 바라봤다.
“이 아이들이 누군지 아느냐?”
“……모릅니다.”
“응현(應現), 산음(山陰), 삭주(朔州) 지부에 파견된 본가의 식솔들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부모들이 어떤 최후를 맞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더불어 항산검문의 의도에 구역질이 났다.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들.’
봐라, 우리는 이런 어린아이까지도 참혹하게 죽일 수 있다. 곧 너희도 이처럼 될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항산검문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모든 게 내 탓이다. 무공을 모르는 아이들까지 이리 참혹하게…….”
진위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책하던 그때였다.
“그것이 전쟁의 본질이오. 소가주.”
대장로가 은빛 수염을 매만지며 나타났다. 시신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승리와 패배. 둘 중 어디에도 죽음은 빠지지 않는 법. 항산검문주. 혈랑검 이천백이라고 했나? 그는 낭인 출신답게 전쟁을 잘 알고 있소. 이 아이들만 봐도 알 수 있지.”
그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돼먹은 인공지능이야.’
이 NPC는 어딘가 결여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게 느껴진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진위경은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을 삼가시지요. 본가의 식솔들입니다.”
“아니, 저 아이들은 전사자요. 앞으로도 무수한 이들이 죽어 나가겠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대장로. 말을 삼가라 했습니다.”
진위경이 으르렁거렸다. 사람들의 눈만 없었다면 진작 일을 냈을 기세였다. 하지만 대장로는 여전히 담담했다.
“예상하지 못했느냐?”
갑작스러운 하대였다. 하지만 나도, 진위경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산음, 응현, 삭주. 모두 항산검문의 손이 닿는 곳이었다. 전날 각 지부에 전서구를 보내면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단 말이냐?”
“그건…….”
“너는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전서구를 보냈던 건 단순한 양심의 가책이었을 뿐이지.”
“그만. 그만하십시오.”
“훌륭한 판단이었다. 만약 지부를 구원하고자 했다면 쉬지 않고 칠 주야를 달려야 했을 것이고,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적과 싸워야 했을 테니까. 그렇지 않으냐?”
진위경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장로를 바라봤다. 꽉 쥔 주먹 사이로 선혈이 흘렀다.
“난, 나는…….”
“모든 것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대국을 직시해라. 너는 태원진가의 수백 식솔을 책임질 소가주다.”
진위경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분노와 슬픔이 빠져나간 표정에는 왠지 모를 허탈함이 가득했다.
“희생…….”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오. 안 그렇소? 소가주.”
포권을 취해 보이는 대장로의 모습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종잡을 수 없는 노인네.’
대장로는 분명 위험한 인물이다. 가문에서의 위치,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속내, 어린아이들을 시체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까지.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아.’
내 시선에서 진위경은 좋은 소가주다. 인간미도 넘치고 머리도 영특하다.
하지만 시신들을 보는 순간, 누구보다 크게 흔들렸다. 대장로의 싸늘한 일침이 아니었다면 평정심을 되찾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도움을 줬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대장로가…….’
평화로울 때는 적대 관계지만 전쟁 시에는 뭉친다는 건가?
‘그럼 다행인데.’
의심과 안도가 섞인 눈초리로 대장로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삼공자도 있었군.”
노회한 잿빛 눈동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처음으로 대장로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대장로를 뵙습니다.”
애써 당황을 숨기는 나를 대장로가 묘한 미소를 띠고 바라봤다.
“요새 가문 내에 재미있는 소문이 들리던데, 그게 아마…… 산서잠룡이라던가?”
저 웃기지도 않는 별명을 대장로에게서 들을 줄이야.
“일설에 의하면 염라편과 친분이 있다고도 하더군. 그와 힘을 합쳐 천력부를 쓰러트렸다던데.”
“쿨럭. 쿨럭.”
“어디 아픈가?”
“아, 아닙니다. 그냥 몸이 으슬으슬해서요.”
“저런. 곧 큰 공을 세울 사람이 그래서야 쓰나.”
어색하게 웃던 내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천력부라는 걸출한 마두를 제거하는 데 일조한 실력자라면 귀중한 전력이지. 설마 그 소문이 거짓은 아닐 테고.”
“…….”
“해서, 본가의 직계로서 앞장서서 싸우는 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되는데. 소가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빙긋. 대장로의 웃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위경이 내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하냐?”
외통수. 한 단어를 떠올린 순간, 익숙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 *
퀘스트
[임무 수행]당신은 백호당 정찰조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지금부터 휘하에 배속된 부하들을 이끌고 임무를 수행, 공적을 쌓으십시오!
등급 : 반복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공적치 100 달성 (0 / 100)
보상 : 성공 정도에 따라 변화합니다.
실패 : 실패 정도에 따라 변화합니다.
퀘스트창을 껐다. 이미 몇 번이나 봤을뿐더러, 잠시 자리를 비웠던 백호당 소속 무사가 지금 막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조장들에게 기본으로 지급되는 물품들입니다.”
검, 그리고 백호가 조잡하게 수놓아진 흑색 무복과 나무 냄새가 물씬 나는 반들반들한 목패(木牌).
그게 전부였다.
“새로 휘하에 배속된 이들은 정찰조 숙소에서 대기 중입니다. 위치는…….”
다행히 내가 아는 곳이었다. 몇 번 오가면서 봤던 전각이 바로 정찰조에 배정된 숙소였다.
백호당을 빠져나온 후 우선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숨었다.
‘인벤토리 오픈.’
모든 복장을 갖추는 데는 10초면 충분했다. 옷을 갈아입고, 검은 인벤토리 깊숙이 처박은 다음 [예리한 창]을 꺼냈다.
지금까지야 으리으리한 개인 전각에서 삼공자의 신분을 톡톡히 누렸지만 지금부터는 다르다.
‘공동 생활이랬지.’
먹는 것도, 자는 것도 함께다. 필요할 때마다 허공에서 2m짜리 철창이 튀어나오는 마술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법이다.
조장이라고 음각된 목패를 허리춤에 차자 태원진가의 평범한 무사1이 된 것 같았다.
‘그냥 무사는 아니지. 정찰조장이니까.’
백호당 정찰조장. 생각지도 못한 직책을 받게 됐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 치열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대장로는 나를 장로원 계열의 전투 부대에 넣고 싶어 했고, 진위경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타협을 봤지.’
임무 자체는 어렵지 않은 정찰조장. 하지만 장로원 일파인 백호당주의 휘하로. 결국 어어, 하는 사이에 이런 직책을 받게 됐다.
‘이런 식으로 전쟁에 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배 째라 식으로 나갈 수도 있었지만 참았다. 염라편을 언급할 때마다 번뜩이는 대장로의 눈빛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어린아이들 때문이다.
‘게임이다. 전부 그래픽이고 허상일 뿐이야.’
수없이 되뇌어도 그 시신들이, 이마에 칼로 새겨진 글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맞다. 이 결정에는 감성적인 부분도 있었다.
이대로라면 좋지 않다.
‘몰입하지 말자. 현실과 게임을 혼동해서는 안 돼.’
언젠가부터 부쩍 그런 일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재미 삼아 NPC들을 사람처럼 대했던 것이, 요즘 들어서는 정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이것도 게임을 오래 하다 보니 생긴 부작용일지도 모르지.
“여긴가?”
어느새 정찰조의 숙소에 도착한 나는 입을 벌렸다.
갈라진 목재와 쾌쾌한 냄새. 세상에, 처마 밑에는 벌집까지 있다. 저렇게 큰 건 또 처음 본다.
‘역시 가족 같은 기업…….’
복지 수준 봐라. 아니, 어쩌면 날 싫어하는 백호당주의 심술일 수도 있겠다. 대놓고 갈구는 건 아직 못 하겠고, 엿 좀 먹어 보라 이건가.
‘그래, 일단 해 보자.’
크게 심호흡한 나는 문을 열고 한 발을 내딛었다.
끼이이익. 오래된 바닥이 울부짖는 소리가 유난히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