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21
#220화
원명훈이 떠났다. 내 태도에 이를 갈면서도 선뜻 덤비지 못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랬다면 후회하게 만들어 줬을 텐데.’
하이에나 같은 인간이다.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빨을 드러내고, 강한 모습을 보이면 이빨을 감춘다.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을 되짚어 보면 8년 전의 그 사건도 그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운 좋은 줄 알아라.’
하이에나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결국 짐승.
꼬리를 내릴 줄 아는 놈은 겁을 줘서 쫓아내면 그만이다.
내 어깨에 이빨을 박기도 전에 굳이 손에 피를 묻힐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짐승 따위가 아니라 진짜 괴물을 상대하기 전에는 더더욱.
– 캬우우우우우!
조금씩 가까워지는 검은 점.
분노에 찬 포효가 지평선 끝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내가 놈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처럼,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너도 나를 기억하는구나.’
그거면 된 거다. 반쯤 미친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하게 됐지만 두려움과 흥분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목 안의 가시처럼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왜 안 가셨어요?”
느슨하게 팔짱을 낀 최 팀장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곧이어 돌아온 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누구한테 물어본 겁니까?”
“모두한테요.”
나는 주위를 쓱 훑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드문드문 늘어선 바위와 나무를 배경으로 네 사람이 서 있었다.
최 팀장과 김 집사. 그리고 임꺽정과 송송이.
그들 중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오고 있는 게 네임드 몬스터인 건 아시죠?”
“저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요. 위험하니까 지금이라도 피하세요.”
“어디로 피합니까?”
“어디겠어요? 우리가 들어왔던 출구지.”
“스타 길드는 같이 도망치기에 썩 괜찮은 파트너는 아니죠. 더군다나 그쪽 길드장이랑 척을 졌을 경우에는.”
글쎄, 내 생각은 다른데.
아직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김 집사는 A급 마법사다. 그것도 대격변이라는 초유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머릿수만 많았지, 당장 나를 제외하고 원명훈이 이끄는 스타 길드와 싸워도 결코 밀리지 않는다.
“핑계가 좋네요.”
빙긋 웃는 나를 최 팀장이 빤히 응시했다.
“진태경 씨.”
“안 돼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단칼에 잘라 냈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최 팀장이 아니었다.
“덕분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했으니 몇 가지 정도는 물어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젠장, 그러네.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대신 짧게.”
“지금 오고 있는 저 몬스터, 3년 전 그 일과 연관이 있는 놈입니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서지 않겠군요.”
“…….”
침묵은 곧 긍정.
최 팀장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태경 씨, 상대는 네임드 몬스터입니다.”
“그건 처음 알았네요. 제 눈에는 그냥 죽일 놈인데.”
“이건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지금 제가 그 정도로 불안정해 보입니까?”
“그건…….”
최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다. 미친 듯이 방망이질 치는 심장과는 달리 머릿속에서는 놈을 상대할 방법을 수없이 떠올리고 있다.
“최 팀장님.”
“……?”
“제 인생 모토, 예전에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었죠.”
말없이 지켜보던 임꺽정이 대신 대답했다.
“가늘고 길게.”
“아저씨도 기억하시네요.”
“넌 희한한 놈이었어. 젊은 녀석이면 한 번쯤 큰 꿈을 가져 볼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지.”
“제가 굴곡진 인생은 별로 안 좋아해서.”
이번에는 김 집사가 미소짓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것 치고는 멀리 와 버린 것 같군요.”
“그래서 바꿨죠.”
“굵고 길게. 맞습니까?”
“네. 가늘게 살기에는 이미 글렀고, 이렇게 된 이상 최대한 굵고 길게 살아 보려고요.”
“좋군요. 혹시 원하신다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 집사는 더욱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하는 사람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른 분들을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최선을 다하죠.”
김 집사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송이 씨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네임드 몬스터를 상대로 혼자 싸우라니, 다들 제정신이에요? 까딱하면 다 죽어요, 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송이 씨는 왜 안 가셨습니까?”
“……그러게요.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송이 씨.”
“안 돼요.”
“안 됩니다.”
“진태경 헌터님. 제발.”
반응 뭐야, 이거.
이제 겨우 운만 뗐을 뿐인데 송이 씨에 이어 최 팀장과 김 집사까지 나서서 단칼에 잘라 버렸다.
“태경아, 된다.”
그나마 꺽정이 형이 유일한 원군이구나.
나는 세 사람을 향해 억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아직 말도 안 꺼냈습니다.”
송이 씨가 대답했다.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예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시고.”
“음. 고백?”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누군가 망치로 후려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하다.
“헉, 그걸 어떻게.”
“세상에, 그걸 모를 수가 있어요?”
“티, 티가 많이 났나?”
“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럼…….”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제가 돈이나 유명세에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
“솔직히 태경 씨 정도면 월척이긴 한데, 제 성격상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한 번에 낚아 올리고 말지. 어장 같은 거 못 만들어요.”
거침없이 할 말을 쏟아 낸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아, 이제 곧 네임드 몬스터와 싸울 사람한테 너무 심한 말을 한 건 아니죠?”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리던 나는 이내 피식 웃어 버렸다.
“왜 웃어요?”
“그냥. 참 시원시원하다 싶어서.”
내 대답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라, 갑자기 웬 반말?”
“스물일곱이라며? 동갑내기니까 친구 정도는 괜찮잖아?”
“흐음, 남녀관계에 친구는 없는데.”
“그거야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고.”
망설이는 송송이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같은 길드 동료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안 받을 수가 없네.”
나는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결국 보기 좋게 차인 꼴이 됐지만 일말의 후회도 없었고 한편으로는 덤덤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누군가 내게 정말 송송이를 좋아한 것이 맞냐고 묻는다면, 맞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지금의 감정은 나도 확실하게 대답하기 힘들다.
그냥…… 줄곧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말을 했고, 답변과 상관없이 마음이 후련해졌을 뿐이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끝나고 소주나 한잔하자.”
“우리 집 가훈이 남녀칠세부동석이야.”
“다 같이.”
“……어, 응.”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동시에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마나의 흐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김 집사가 마법의 보호막을 겹겹이 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탁합니다.’
그것은 전투가 임박했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작은 점에 불과했던 놈의 모습은 일반인의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새끼, 많이 컸네.”
어림잡아도 오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몸통과 그보다 거대한 날개.
전신을 빈틈없이 뒤덮은 흑색 비늘이 석양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3년 전,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보다 족히 두세 배는 성장한 모습이었다.
‘저게 가능한가?’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희뿌옇게 물들어 있는 한쪽 눈이 바로 그 증거였다.
붉게 물든 놈의 다른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크라아아아아!
화아아악!
단 한 번, 고함을 내지른 것만으로도 엄청난 바람이 불어닥친다. 황무지 곳곳에 깔려 있던 흙과 돌멩이가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먼지의 장막이 가라앉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언덕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크다.’
그리고 강했다. 활짝 열린 감각으로 놈의 분노와 힘이 전해진다.
A급의 울타리를 벗어난 괴물. 네임드 몬스터 다운 위용이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비로소 놈과 마주하자 가슴이 떨렸다. 3년 전 그날, 나는 동료들을 잃었고 놈은 한쪽 눈을 잃었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다. 이제는 끝내야 했다.
나는 서늘한 창대를 힘껏 움켜잡고 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다. 나 기억하냐?”
와이번은 분명 고등 생물이다.
과거에도 교활하고 잔인했던 놈이니 네임드 몬스터가 된 지금, 더욱 강력한 힘과 뛰어난 지능까지 갖게 됐음은 당연지사였다.
– 크르르르…….
“기억하나 보네. 그래, 눈깔은 괜찮고?”
하나 남은 눈동자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구친다. 나는 전신의 비늘을 바짝 곤두세운 놈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이 썅노무 새끼가 어디서 하악질이야.”
– 크르륵!
한 걸음, 두 걸음.
가슴이 뛰고 두뇌가 팽팽하게 회전한다. 놈의 몸뚱이를 난도질하고 숨통을 끊을 수백 가지의 투로(鬪路)가 눈앞에 펼쳐졌다.
“널 보면 꼭 알려 주고 싶은 이름들이 있었거든. 귀 열고 똑똑히 들어라.”
저벅, 저벅.
놈과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질수록 아랫배에서부터 뜨거운 뭔가가 울컥거렸다.
작은 태양과 같은 그것은 어느덧 일 갑자를 넘어선 열양지기인 동시에 쌓이고 쌓여 덩어리가 되어 버린 분노였다.
“김현수.”
뿔테 안경을 낀 범생이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헌터가 된 지 넉 달밖에 안 된 녀석은 첫 희생자였다. 놈이 휘두른 꼬리에 전신이 으스러졌다.
몸은 둔했지만 열의는 넘쳐서 틈만 나면 나를 찾아와 묻고는 했다.
‘부팀장님. 이건 어떻게 합니까?’
‘부팀장님. 이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부팀장님…….’
간혹 그 녀석에 관한 생각을 하고는 했다.
그때 좀 더 자세히 알려 줬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어 오는 녀석을 귀찮아하지 않았다면 그 녀석은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러나 후회는 항상 늦는다. 김현수의 나이는 스물에서 멈췄고,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부모님은 장례식 내내 통곡하셨다.
‘어쩌면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이들이 무려 아홉 명이나 더 있다.
그들 모두에게는 각자의 가족과 꿈이 있었다.
“이혜림. 송동혁, 박상호, 김한웅, 박광현…….”
한 명의 이름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마다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눈앞이 흐려진 것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 발자국을 걷자 남은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홍천수.”
동글동글한 삼십 대 남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나는 갓 스무 살의 초짜 헌터였고 그는 10년 경력의 베테랑이었다.
내가 고블린에게 둘러싸여 죽을 뻔한 것을 구해 준 후로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언제였던가, 평소와 다름없던 어느 날에 문득 물어본 적이 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놈이 고생하는 게 자꾸 눈에 밟혀서. 너만 한 막냇동생이 있거든.’
장례식 날 알았다. 그가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원 출신이었다는 걸.
어이가 없고 기가 차서 웃다가, 결국에는 울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생각나서였다.
‘저 건방진 새끼. 태경아, 먼저 가라.’
그는, 천수 형은 그렇게 죽었다.
훌륭한 반려자와 세 아이를 남기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놈의 앞에 서 있다. 거대하고 붉은 눈동자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똑똑히 들어라. 이 좆 같은 도마뱀 새끼야.”
이 말을 하기 위해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장장 3년 하고도 92일 만에 저 날개를 찢고 심장에 창을 꽂을 준비를 끝마쳤다.
“이번에는 어디에도 안 가.”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전신의 사지 백해로 뻗어 나간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린 열양지기가 서늘한 창날을 향해 몰려들었다. 끊임없이 잇고, 실타래처럼 얽힌 공력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
츠츠츠츠츠!
오러(Aura), 창기(槍氣).
이걸 뭐라고 부르든지 상관없다. 나는 푸르게 타오르는 창날을 놈을 향해 겨눴다.
“넌…… 오늘 뒈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