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34
#233화
중년인은 투명한 검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칼날 같은 이목구비와 굳게 다물어진 입술. 드문드문 흰 터럭이 섞이기 시작한 머리가 검신에 비쳤다.
그가 문득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넓은 방 내부를 울린다. 그러나 눈이 닿는 곳 어디에도 사람은 없었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중년인의 머리 위, 천장이었다.
“제 소임입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선(秘線)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전대에도, 전 전대에도. 가문이 처음 세워진 수백 년 전부터 비선은 존재했다.
오직 한 사람, 가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그들은 비선이라는 이름 그대로 숨겨진 실이었다.
그 실을 따라 흘러들어온 수많은 정보는 조용히 잊힐 수도,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 새로운 소식이 있나?”
“예. 천(天)급입니다.”
“천급이라.”
중년인의 손가락이 검신을 쓸었다.
지금까지 비선이 전해 준 소식은 하나같이 기밀이지만 그 경중에 따라 천, 지, 인으로 나뉘었다.
천급은 그중에서도 가장 높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가문을 이끌고 있는 중년인으로서도 결코 흔히 겪는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이로군. 황산파 이후 처음인가?”
황산파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명문 대파다. 그러나 이제는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 이름이기도 했다.
적자생존.
무림은 도태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냉혹한 세상이다. 중년인은 황산파를 도태시켰고 그들의 시체를 뜯어먹었다.
“봉문이 풀리기까지는 한참 남았을 터인데.”
“황산파는 이미 와해되었습니다. 봉문이 풀리더라도 회복 불능입니다.”
“하면?”
“산주(山主)가 돌아왔습니다.”
짤막한 대답에 검신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우뚝 멈췄다.
“……그게 사실인가?”
“틀림없습니다.”
산주, 산의 주인.
누군가는 그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할지 모른다. 천하에 산이 몇 개인데 주인을 따지냐며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곳, 안휘성에서 산의 주인은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화왕 적천강…….”
단신으로 천 명의 무인을 대적한 미증유의 고수.
구화산은 그의 영역이었고 수백 년간 계승된 열화문의 성지였다.
마교도들이 구화산에 불을 지른 그 날, 평범하게 늙어 가던 한 노인은 화왕이 되었다.
덕분에 소중한 보금자리를 지켜 낸 안휘성 사람들은 경의를 담아 그를 산주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제, 어디서 들어온 소식인가?”
“두 시진 전 북문을 통과했다는 보고입니다.”
“목적지는?”
“구화산입니다.”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인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가주 자리에 오른 뒤부터 지금까지, 비선으로부터 수많은 보고를 받고 의견을 물었지만 단 한 번도 단언한 적이 없던 그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주군의 의문을 느낀 비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자와 동행했습니다. 사문으로 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제자?”
중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열화문은 일인전승의 문파. 화왕의 제자라면 한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근 이십 년 전의 일이지만 그는 화왕과 관련된 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 그 잔악한 놈을 다시 찾아온 건가?”
“생각하시는 사람은 아닙니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그는 석 달 전 죽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자를 찾았다?”
“예.”
비선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태경, 올해 스물하나가 되었고 태원진가의 직계입니다.”
“이름도, 가문도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정마대전에서 활약했던 화양검, 그리고 최근 십봉룡이라 불리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진천검과 같은 핏줄입니다.”
“아, 바로 그 진가로군.”
“예.”
다행히 비선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 개의 이름은 중년인에게도 제법 귀에 익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중년인은 비선의 존재도 잊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태원진가의 진태경. 화왕 적천강의 새로운 제자.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이름.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 했다.
‘변방 무가의 핏줄이 화왕에게 선택받았다.’
약관이 넘은 청년을 새로운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둘 중 하나겠지. 화왕의 약점을 잡았거나, 나이와 출신 따위는 상관없을 정도로 극히 뛰어난 무재를 갖고 있거나.’
생각이 이어질수록 가닥이 잡혀 갔다.
상념에 빠져 있던 중년인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소선(小線)을 모두 움직이게.”
소선이란 비선의 밑에서 움직이는 무수한 정보원들이었다.
천하 각지에서 정보를 전해오는 그들은 비선을 거쳐 중년인에게 흘러 들어간다.
“모두 말입니까?”
되묻는 비선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희미한 놀라움이 배어 있었다.
중년인의 명령은 가문의 정보력 중 태반을 한 사람에게 쏟아붓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뿐, 자신의 본분을 깨달은 비선이 황급히 대답했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상관없네. 달포를 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제자에 관한 모든 걸 알아 오게.”
“존명.”
“당분간 바빠질걸세.”
그 말에 숨겨진 말뜻을 알아차린 비선의 기척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절정의 끝에 다다른 은형술(隱形術). 그는 앞으로 보름간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중년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뼛속까지 무인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지도자의 피를 타고났다.
소가주 시절부터 가문을 이끌며 패자(霸者)의 위치를 공고히 다져 온 중년인의 전신에서는 위엄이 흘러넘쳤다.
저벅, 저벅, 저벅.
큰 걸음으로 넓은 공간을 가로지른 중년인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전각을 둘러싼 십여 명의 호위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를 맞이했다.
“가주를 뵙습니다!”
중년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뛰어난 절정 검수이며 같은 피를 이은 혈족이었다.
남궁(南宮)이라는 성씨 아래 모인 거대한 집단, 천하 무림에 뿌리내린 거목.
“식솔들을 소집하거라. 날이 좋으니 함께 술이라도 한잔해야겠구나.”
“존명!”
중년인, 남궁룡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끝없이 펼쳐진 창천(蒼天)이 그곳에 있었다.
* *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게는 오랫동안 간직해 온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적천강도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노부도 소원이 하나 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먼저 말해도 될까요?”
“충분히 실례다.”
“그럼 이번 한 번만 실례를 저지르겠습니다.”
“바지에 실례하고 싶으냐? 이번 한 번이 아니라 평생 똥오줌 질질 싸게 해 줘?”
“……아.”
우리 엄마가 이 광경을 봤으면 억장이 무너졌을 거다.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오냐, 네놈 속이야 뻔하지만 한 번은 들어 주마.”
마른침을 꼴깍 삼킨 내가 소원을 말했다.
“객잔 한 번만 들르면 안 될까요?”
“그게 소원이냐?”
“예.”
“그럼 노부의 소원도 말하마.”
적천강이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주둥이 닥치고 따라와라.”
“……아니, 왜요?”
“수련하고 싶다며? 수련하러 가는데 뭐가 그렇게 쫑알쫑알 불만이 많으냐?”
“제가 언제 안 한다고 했습니까? 앞으로 반년이나 산에 처박혀 있을 거니까 그 전에 한 번만, 딱 한 번만 배불리 먹고 씻자는 거죠!”
어둠이 드리워진 산속에 내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맞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안휘성에 위치한 구화산의 초입이다.
“산서성에서 하남까지 칠 주야! 하남에서 안휘까지 또 칠 주야 걸렸습니다. 그간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그나마 하남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잠이라도 한 시진씩 재워 줬었는데, 굉도의 거처를 나온 후에는 말 그대로 얄짤 없었다.
식사 시간도 없이 육포를 씹으며 뛰고, 또 뛰었다.
“소림사 산채비빔밥 먹고 싶었는데!”
보름간의 강행군 동안 제대로 된 식사라고는 낙양의 객잔에서 했던 것이 유일하다.
“그마저도 노야 혼자서 다리 다 먹고! 날개 한 짝에 퍽퍽살만 남겨 두고!”
이제 겨우 고기 몇 점 뜯어 먹나 했더니, 웬 흑도 칼잡이 놈들이 튀어나와 훼방을 놓고 언더아머 스님이 나타나서 소림사로 데려가더라.
“객잔 한 번 가자고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노야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거의 다 왔다고. 가서 쉬자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다 왔잖아. 구화산.”
때가 낀 새끼손톱으로 귀를 후비적거린 적천강이 귓밥을 훅 불었다.
“가서 쉬어. 올라가면 배불리 먹고 씻고 잘 수 있다.”
“배불리 먹어 봤자 육포, 벽곡단이잖아요.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산림욕만 실컷 하고, 잠은 하루에 반 시진도 안 재워 줄 거면서!”
“으허허!”
껄껄 웃던 적천강이 웃음을 뚝 그쳤다.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이래서 감이 좋은 아해는 마음에 안 든다니까.”
“……!”
에드 오빠……가 아니라, 등골을 타고 소름이 쭉 돋는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뱉어져 나왔다.
“그래, 네 녀석의 짐작이 맞다. 하루 반 시진씩 재우며 개같이 굴릴 생각이다.”
“헉.”
“벽곡단으로 몸에 낀 기름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쥐어짠 다음, 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의 수련을 시켜 주마.”
“아, 악마.”
“노부에게 마귀라고 한 것이냐? 수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군.”
“아, 안 돼. 이건 사기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걸 왜 모르느냐?”
“잠시만요. 저 잠깐 측간 좀 다녀올게요.”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나를 향해 화왕이 주름진 손바닥이 펼쳤다.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란다.”
화아아아악!
거부할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밧줄로 변해 내 전신을 꽁꽁 묶었다.
지금만큼은 초인에 가까운 신체 능력과 일 갑자에 달하는 공력. 그 어느 것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버텨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손짓을 따라 내 몸이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허, 허공섭물?”
“알았으면 어서 오너라.”
후우우웅!
다음 순간, 나는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적천강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주름진 손가락이 내 목 어딘가를 스쳤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귓가를 파고드는 불길한 소리.
삐빅!
– [점혈] 당했습니다!
– [수혈]을 짚였습니다. 당신은 잠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 5초, 4초, 3초, 2초…….
시스템의 카운트다운과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흐릿해지는 의식 사이로 적천강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간다.
“오늘은 특별히 두 시진 재워 주마.”
“…….”
거 시벌, 되게 고맙네.
나는 혀끝에서 맴도는 그 말을 뱉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드르렁. 드르렁.
“어린놈이 힘 하나는 장사로군.”
적천강은 곤히 잠든 진태경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허공섭물과 점혈은 만능이 아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들어가는 힘도 달라진다.
이런 놈이라는 걸 알았기에 망정이지, 방심하고 있다가 파훼당했다면 꼼짝없이 체면을 구길 뻔했다.
“산서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 정도까지…… 거참, 괴이한 놈일세.”
적천강이 피로 섞인 한숨을 내쉬던 그때,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헉!”
턱.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근처의 나무를 붙잡았다.
자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이런.”
한 번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한 탓일까? 아니라면 늙은 육체가 험난한 여정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유였을까.
적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무인으로서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자신은 무인의 정점에 다다른 초절정 고수다.
늙은 것은 육신이 아닌 또 다른 무엇이다.
‘서둘러야겠군. 시간이 얼마 없어.’
아마 친우인 굉도가 당장 떠나라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을지도 모른다.
몸을 추스른 적천강은 진태경을 들처업었다. 일백을 넘긴 나이지만 청년의 거구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아직이다. 아직은 안 돼.”
부쩍 늙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는 걸음을 옮겼다.
한걸음에 십여 장의 거리가 지워지며 풍경이 휙휙 스쳐 지나간다.
이내 짙은 안개가 깔리며 그의 흔적을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