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37
#236화
사내는 가지런히 놓인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바라봤다.
담비 털로 만든 붓, 벼루는 푸르스름한 옥이었고 먹과 종이는 만 리나 떨어진 해동의 왕실에서 쓰인다는 진상품이었다.
하나같이 어지간한 부호가 아니고서야 쓸 수 없는 최상품들.
“좋군, 좋아.”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검소하기로 유명한 사내가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가 바로 이 문방사우였다.
“자,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사내가 기분 좋게 먹을 갈던 그때,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누가 보면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줄 알겠습니다.”
불청객의 정체는 먼지투성이 차림의 무인이었다.
쭉 찢어진 눈매, 허리춤에는 손때 묻은 검을 찬 그를 본 사내가 짐짓 얼굴을 굳혔다.
“한림학사라니. 차라리 대화백(大畫伯)이라 불러 주게.”
“여전히 그림을 그리십니까?”
“내 유일한 낙이라네.”
“안타깝게도 대화백에 어울리는 풍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저한테 무공 한 번 배워 보시렵니까?”
“정중하게 거절하지. 무인으로서의 내 한계는 딱 여기까지야.”
“저런. 무인이 가져야 할 소양이 부족하시군요.”
“상관없네. 내 수하 중에 검을 아주 기가 막히게 쓰는 친구가 하나 있거든. 오죽하면 별호가 귀검이겠나.”
사내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불청객의 얼굴이 스르륵 풀어졌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피식 실소를 흘렸다.
“주군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위팽, 자네도.”
자그마치 넉 달 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움은 더욱 컸다.
태원 진가의 소가주, 진위경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위팽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사람,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인가? 전서구에는 내일 정오에나 당도한다고 적혀 있던데.”
“진룡대(進龍隊)는 저 없어도 잘 굴러갑니다.”
진룡대는 현재 태원 진가를 대표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창설된 지 고작 일 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개개인의 무위가 뛰어났고,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그 이상으로 높았다.
진위경의 심복인 위팽이 진룡대의 대주를 맡은 것부터가 그 위상을 짐작게 했다.
“대주씩이나 돼서 말도 없이 혼자 빠져나온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혁가 놈에게 맡겨 뒀으니 알아서 잘 올 겁니다.”
“임시 부대주 말인가?”
“예.”
“이번이 첫 임무였지. 곁에서 지켜보니 어떻던가?”
순간 위팽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골이 아파 왔다.
그래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다. 그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그럭저럭 쓸 만하더군요. 쉴 새 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보다 쾌활한 친구인가 보군.”
“지랄 맞을 정도로 쾌활해서 문제지요.”
“다른 부분은?”
“……옆에서 하나씩 알려 주면 금방 배우긴 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상당한 무재라는 소리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혁무진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진룡대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다.
물론 그러한 인사 결정에는 진태경의 입김도 한몫했다.
‘그 녀석, 생각보다 괜찮은 놈입니다. 한번 키워 보세요.’
아우들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진위경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룡대에 넣고 위팽을 붙여 가르쳤더니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좋아지는 게 아닌가.
성격이 능글맞아 대원들과도 잘 어울렸고, 충성심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으하하! 역시 우리 막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호탕하게 웃은 진위경의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모를 술병이 들려 있었다.
한 잔 가득 따라 건네준 그가 입을 열었다.
“여하간 고생 많았네. 그래, 이제 북부 고원 쪽은 다 정리된 건가?”
“예. 적어도 향후 십 년간은 문제없을 겁니다.”
북부 고원의 안정화.
그것이 위팽이 지난 넉 달 동안 태원진가를 떠나 있었던 이유였다.
진위경은 진정한 산서성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원의 마적들을 토벌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수개월의 은밀하고도 치밀한 준비 끝에 자신이 가진 가장 날카로운 병기를 놈들에게 휘둘렀다.
귀검(鬼劍) 위팽이라는 검을.
“일곱 갈래로 쳐들어가니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지더군요.”
산서 무림은, 특히 주 피해 지역인 북부 지역의 문파와 상단은 태원진가의 용단에 감사를 표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위팽과 진룡대를 선봉으로 한, 이른바 칠로군(七路軍)이 탄생했고 그들은 상단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질 좋은 병장기와 군마로 무장했다.
거기에 더해 강력한 지원군도 참전했다.
“하오문, 무섭더군요. 정보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종전 직후 북부의 이권을 상당 부분 할당받은 하오문은 진위경의 결정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그들은 숙련된 정보 상인답게 마적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한편, 허위 정보를 흘리고 함정을 팠다.
그 철두철미함에 진위경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세상 모든 것은 주인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는 법. 진정 무서운 것은 월화라네. 산서성에만 머무를 그릇이 아니야.”
“그렇습니까?”
“결과를 보고도 모르겠나? 그녀의 진정한 무기는 아름다운 용모가 아니라 지략이라는 것을.”
이천 명.
그날 하루 북부 고원에서 죽거나 사로잡힌 마적의 숫자였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일곱 번의 전투가 일어났고, 일곱 번의 승리를 거머쥔 그들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그 후로는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사로잡았습니다.”
하늘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날아다녔고, 그 아래에는 그 열 배는 됨직한 시신들이 굴러다녔다.
칠로군의 말발굽이 멈췄을 때는 이미 다섯 개의 대형 마적단이 궤멸하고 열 개가 넘는 마적단이 항복한 후였다.
“사실상 이미 목적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아직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 유목민들 말입니까?”
“바로 맞췄네.”
신속한 기동 타격 덕분에 피해는 적었지만, 칠로군은 연이은 전투로 상당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그러던 찰나 거대한 먼지구름과 함께 수천의 유목민들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그때는 저도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하나하나가 마상무예의 달인이라는 유목민족이 무려 수천이다.
제아무리 위팽이 완숙한 절정 고수라 해도 홀로 전황을 뒤집을 방법은 없었다.
“그때 앞서 전서로 보고드렸던 그 일이 벌어진 겁니다.”
“스스로를 칸이라 칭했다는 그들 말인가?”
한때 중원까지 지배했던 거대한 유목 제국이 까마득한 과거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정복자의 핏줄은 끊어지지 않았고 칸이라는 칭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나서 자신들을 소개하기를…….”
“대칸의 후예이자 황금 씨족의 일원인 테무르와 칭겐.”
“정확합니다.”
위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각 이천 명의 인마를 거느리고 온 초원의 젊은 부족장들은 공격적이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툰 한어(韓語)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왔다.
‘당신들 중 태원진가에서 온 이가 있소?’
예상했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름 아닌 화왕 적천강의 이름 덕분이었다.
“이미 고원에까지 소문이 퍼졌더군요. 그들은 이미 적 대협과 삼공자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우리와 적대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내가 궁금한 점이 그것일세. 화왕의 위명 하나만 보고 물러났다기에는 워낙 석연찮아.”
“아, 그거 말입니까? 저도 영 찝찝하길래 포로로 잡은 마적단 놈들을 족쳐 봤습니다.”
위팽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작년 겨울에 혼쭐이 난 전력이 있더군요. 흑사와 인도라고, 고원에서 악명 높은 마적단 두목 놈들을 적 대협께서 일장에 쳐 죽였답니다. 그 자리에 두 사람도 있었고요.”
“겁을 집어먹었군.”
“한편으로는 도움도 받았습니다. 우두머리가 죽고 혼란에 빠진 마적 잔당들을 그대로 흡수해서 여기까지 컸으니 말입니다.”
테무르와 칭겐은 운이 좋았다.
흑사와 인도가 한 자리에서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풍단마저 적천강의 손에 전멸하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마적 잔당을 병탄하고 뿔뿔이 흩어진 유목민들을 끌어모은 그들은 불과 일 년 사이에 고원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잡니다. 노략한 금은보화에 모피도 잔뜩 실어 주던데요.”
“뭐라? 으하하하!”
진위경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할 나위 없는 결과다.
이번 토벌로 태원진가는 명성과 산서 무림에서의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힌 동시에, 산하 문파와 양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으니까.
“고생했네. 자네의 공이 커.”
“그건 잘 모르겠고, 제 술잔이 빈 건 알겠습니다.”
“하하, 오늘은 만취할 때까지 마셔 보세.”
두 사람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일 년 사이 워낙 많은 일이 있었던 터라 이야깃거리는 많았다.
“아 참, 성운표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가 떠난 직후 완전히 마무리 지었지. 이제는 진가표국이라고 불러야겠지만.”
성운표국의 국주인 우황태 일가는 푼돈만 챙긴 채 도망쳤다. 몇몇 관리를 매수하여 군수품을 뒤로 빼돌린 것이 드러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태경의 열렬한 신봉자인 상산왕 주표가 큰 도움을 줬음은 물론이었다.
“타 문파와의 연수도 순조롭네. 숭산을 거쳐 합비까지 떠나는 표행이 진행 중이야.”
“숭산과 합비라면……?”
“소림과 남궁. 좋은 제의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네.”
천하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과 오대세가 중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남궁세가.
워낙 그 규모가 거대하다 보니 거래를 트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는데, 도리어 저쪽에서 먼저 거래를 제안해 왔다. 그것도 아주 후한 조건으로.
“적 대협의 존재가 본가에 큰 도움이 되는군요.”
위팽의 말에 진위경은 말없이 웃었다.
적어도 무림에서만큼은 대가 없는 호의가 없다고 굳게 믿는 그였다.
저들의 호의에는 두 사람분의 값이 들어가 있다.
하나는 화왕 적천강이고, 다른 하나는 진태경이라는 잠룡에 대한 값이다.
‘그러고 보니 막내가 떠난 지도 어느덧 일 년이 됐구나.’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곧 땅이 녹으면 하남에서 성라대연이 열릴 터, 형제는 그곳에서 다시 조우할 것이다.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느냐?’
진위경이 연락 한번 없는 무심한 막내아우를 생각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때, 위팽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또 뭘 그리시려던 겁니까?”
“글쎄.”
“뭘 그릴지도 정하지 않으셨는데 먹을 갈고 계셨단 말입니까?”
“종종 있는 일이라네. 한두 시진 내내 먹만 갈다가 다시 접는 경우도 허다하지.”
“허, 이제는 정말 화백이라도 되시려는 겁니까?”
“아직은 접어 두게. 하지만 이 그림이 완성되면 그때는 화백 소리를 들어도 좋을 것 같군.”
“뭘 그릴지도 안 정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모습일지 쉽게 연상이 되지 않을 뿐. 제목은 일찌감치 정해 뒀다네.”
“그래서, 그 대단한 작품의 제목이 뭡니까?”
진위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잠룡출사(潛龍出仕).”
* * *
남루한 차림의 청년이었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날개뼈에 닿았고 턱과 인중에는 수염이 수북했다.
그중 화룡정점은 사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철구다. 흡사 노역장의 죄인 같은 모습.
그러나 단 한 가지, 눈동자만큼은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심유한 눈빛으로 청백색 염화를 응시하던 청년이 중얼거렸다.
“아, 여기에 고기 구워 먹으면 최곤데.”
그리고 다음 순간.
쐐애애액! 빡!
무지막지한 파공음과 함께 주름진 손바닥이 청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보았나! 감히 본문의 성화(聖火)로 고기 구울 생각을 해!”
분기탱천한 노인의 모습에 청년이 투덜거렸다.
“아, 왜요. 잠깐만 넣었다 빼면 될 것 같은데.”
“뭣이!”
“불가마 삼겹살 모르세요? 개꿀맛인데.”
“너, 넌 오늘 죽었어!”
빡! 우당탕탕!
땅이 녹고 새싹이 고개를 내민 초봄의 어느 날, 평화롭던 구화산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