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38
#237화
적천강이 빽 소리쳤다.
“네놈은 본문의 수치다!”
“아닌데요.”
“뭐가 아니란 말이냐! 성화에 고기 구워 먹겠다는 놈은 열화문 수백 년 역사를 통틀어도 없어!”
“그거 말고요.”
“뭐?”
“저 아직 정식 제자 아닌데요. 그러니까 열화문의 수치도 아닌 거죠.”
“……!”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
나는 더 큰 소리가 튀어나오기 전에 냉큼 행낭을 어깨에 둘러멨다.
“더 챙길 거 없으면 빨리 나가시죠.”
“이, 이놈이…….”
주먹을 부르르 떨던 적천강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 일 년간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화왕도 그러려니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아, 뿌듯하다.’
이렇게라도 화왕을 이기다니. 왠지 대단한 일을 한 기분이다.
헤헤 웃는 나를 한 차례 노려본 그가 열일곱 개의 유골함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불초 제자 적천강, 이만 물러갑니다. 그때까지 부디 강녕하십시오.”
“성불 아니에요?”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맹세컨대, 반드시 저 자식을 사람 새끼로 만들겠나이다.”
열일곱 명의 선대 문주들 앞에서 굳게 결의를 다진 적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자꾸나. 이 금수 같은 놈아.”
“잠시만요.”
나는 거대한 공동을 천천히 훑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머물렀던 공간이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때도 있었고, 기쁠 때도 있었다. 지긋지긋해서 당장이라도 석문을 부수고 뛰쳐나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모든 것이 점차 익숙해졌고 괴로운 순간보다 기쁜 날들이 많아졌다.
청백색의 불꽃에서 뿜어져 나오던 무지막지한 열기는 이제 집처럼 포근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그냥…….”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잠깐의 고민 끝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저기에 고기 구우면 진짜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요.”
“이노오오옴!”
길길이 날뛰는 적천강을 피해 석문에 손을 댔다. 동시에 단전의 공력을 흘려보내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띠링.
– [열양신공]의 공력이 확인되었습니다.
– 당신은 [열화동]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 잘 있어라.
지난 일 년 동안 신세 많이 졌다.
그리고…….
‘불초 제자 진태경. 이만 물러갑니다.’
나는 뻥 뚫린 공동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전신에 주렁주렁 매달린 철구가 팔랑개비처럼 휘날렸다.
* * *
구화산은 예로부터 영기(令奇)로 유명한 명산이다.
산 전체에 좋은 기운이 충만하니 산삼, 하수오 같은 영초가 자라는 것은 당연지사. 약초꾼들에게는 금광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두고 봐라, 내 오늘은 반드시 하나 캐고 만다.”
구화산 초입, 홍씨 성을 쓰는 중년 약초꾼은 짚신 끈을 질끈 동여맸다.
대박을 노리고 사천(四川)에서 먼 길을 떠나왔지만 벌써 보름이 넘도록 허탕만 치고 있는 그였다.
“빌어먹을, 뭔 놈의 영초가 죄다 씨가 말랐는지…….”
함께 왔던 동료 약초꾼들은 이미 포기하고 돌아갔다. 구화산 초입부터 중턱까지 이 잡듯이 뒤졌음에도 산삼 한 뿌리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위로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곳에는 어떤 맹수보다 무시무시한 존재가 살고 있었다.
‘화왕.’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무림인들조차 그의 이름만 들으면 벌벌 떨었다.
일전에 듣기로는 그 무서운 마교의 흉신악살 천 명을 단신으로 찢어 죽였다고도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물었더니, 화왕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턱까지는 아무 문제 없다고 했어. 겁먹지 마라, 홍가야. 네가 먹여 살려야 하는 입만 여덟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드는 비용을 대기 위해, 마누라는 혼인 예물로 받은 은가락지까지 팔아야 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어찌 그 얼굴을 마주한단 말인가.
짝! 짝!
뺨을 두들겨 결의를 다진 약초꾼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두 시진도 되지 않아 난생처음 보는 희한한 광경을 마주했다.
“그런데 삼겹살이 무엇이더냐?”
“삼겹살 모르세요? 여기는 명칭이 좀 다른가.”
“아니, 네 녀석은 당최 어디 사람이길래 매번 명칭 운운하는 것이냐?”
“아임 프롬 코리아! 두 유노 김치?”
“……갈수록 미친놈이 되어 가는군. 열화신공에 문제라도 있었나?”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산길을 내려오는 봉두난발의 괴인과 자그마한 노인 하나.
조합 자체도 영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점점 가까워질수록 들려오는 굉음에 약초꾼의 눈이 부릅떠졌다.
철그럭. 드르륵. 쿵! 드르르륵. 쿵!
‘저, 저게 뭐여.’
육중한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괴인의 사지에 사슬로 연결된 철구였다.
작은 것은 어린애 머리통만 했고, 큰 것은 광주리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그런 흉악한 물건 수십 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니 약초꾼으로서는 놀랄 수밖에.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약초꾼은 순간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두 쌍의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괴인은 수염이 수북했고, 노인의 얼굴에는 버짐이며 주름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흐어어어억!”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약초꾼에게 자그마한 노인이 말을 걸었다.
“어이.”
“예, 예?”
“지금 어디 가는 길인가?”
“야, 약초를 캐러 가는 길입니다.”
약초꾼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답을 안 하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약초꾼을 위아래로 훑어본 노인이 혀를 찼다.
“헛걸음했군. 괜히 고생하지 말고 돌아가.”
“허, 헛걸음이라니요?”
그는 무서운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아가라니, 여기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근 두 달이 넘는 시간을 날리는 것이 된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무거운 그에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노인, 범상치 않다.’
용모도 그렇거니와 세상만사를 꿰뚫고 있는 듯한 말투까지.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약초꾼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어허, 이 친구 왜 이래? 노부가 돕긴 뭘 도와?”
“아닙니다! 신령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노인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무슨 령?”
“신령니임!”
옆에 있던 괴인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하! 신령이래. 노야, 석 달 전인가, 운기조식하다가 구결 까먹어서 유령 될 뻔하지 않았어요?”
뻑! 콰드드득!
목청이 터지도록 웃어 젖히던 괴인이 노인의 주먹 한 방에 수십 장을 날아가 처박히자 약초꾼의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신령이 악령을 잡았다!’
누더기를 걸친 괴인보다는 백발의 노인이 훨씬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 아닌가. 약초꾼은 다시 한번 간청했다.
“신령님! 한 번만 도와주십쇼!”
“신령은 개뿔이. 그리고 노부도 별도리가 없어. 이미 죄다 뽑았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예? 뽑다니요? 구화산에 있는 영초를 누가 다 뽑아 갔단 말입니까?”
“이제 좀 말귀가 통하는군.”
“누, 누가 그런 짓을…….”
뒷짐을 쥔 노인이 먼 산을 바라봤다.
“아따, 날씨 한번 좋다.”
“…….”
“뭘 그렇게 봐? 먼저 뽑는 게 임자지.”
약초꾼의 낯빛에 절망감이 스쳤다. 이제야 눈앞의 노인이 신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노인장도 약초꾼이십니까?”
“응? 뭐, 며칠 동안은 그랬지. 약초 뽑는 것도 꽤 힘들더구먼.”
“사람 목 뽑는 건 쉽게 하시잖아요.”
어느새 흙먼지를 툭툭 털며 다가온 악령, 아니 괴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뒤로 와지끈 부러져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태연한 태도와 말투였다.
“선조들께서 말씀하시길, 제자한테 영초 먹여 봐야 아무 소용없다더니 그 말이 꼭 맞는군.”
“꺼억.”
“이런 개호로……!”
주먹을 말아쥔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중압감. 약초꾼은 비로소 두 사람의 정체를 깨달았다.
“무, 무, 무림인!”
“알았으면 이만 포기하고 돌아가시게. 괜한 소문 내지 않도록 조심하고.”
괴인도 진지한 얼굴로 충고를 건넸다.
“특히 위쪽으로는 올라가지 마세요. 거기 화왕 적천강이라는 괴물이 산다는데, 붙잡히면 산 채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가 죽인대요.”
“……!”
“……!”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약초꾼은 처참한 죽음을 상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노인도 자신과 비슷한 반응인 것을 보면 화왕 적천강이라는 놈은 필시 그가 들은 대로 삼두육비의 괴물이 틀림없다.
“아셨죠? 제가 한 말 꼭 명심하셔야 합니다.”
“아, 알았소.”
약초꾼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이미 선수를 놓친 데다 상대는 무림인. 괜히 귀찮게 굴었다가는 목이 날아갈 수도 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그가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준 그 순간이었다.
“아, 잠시만요. 아저씨, 이거라도 괜찮으면 가지실래요?”
스윽.
행낭을 뒤적거리던 괴인이 불쑥 내민 것은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산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호의에 약초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걸 왜 저에게?”
“이대로 돌아가시면 남는 게 없잖아요. 연세를 보아하니 부양할 가족도 있을 거고. 혹시 어디서 오셨어요?”
“사, 사천성에서 왔습니다.”
“사천성 재밌죠. 야자 때 열심히 했었는데.”
“예?”
“아뇨. 여하튼 멀리서 오셨으니까 이걸로 여비에 보태세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이놈아, 몇 푼 되지도 않는 걸 줘 놓고 생색은. 사내놈이 할 거면 크게 베풀어야지.”
“나 참, 남는 게 저것밖에 없는데 어떡합니까.”
“저딴 걸 산삼이라고 주느냐? 기왕이면 은자로 바꿔 주어라.”
“어떻게요?”
“물건의 가치는 사람이 정하는 법이니라.”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이 무슨 괴상한 대화란 말인가.
약초꾼이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때, 돌연 괴인이 우렁찬 외침을 토해 냈다.
“산삼 사실 분!”
아직 이른 새벽,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 산길 아래로부터 수십 명의 사내가 오와 열을 맞춰 등장했다.
푸른 무복과 허리춤에 찬 검집. 한눈에 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고도로 훈련된 무인임을 알 수 있었다.
“으헉!”
입이 딱 벌어진 약초꾼과는 달리 두 사람은 태연했다. 괴인은 은자 세 냥짜리 산삼을 살살 흔들며 말했다.
“은자 백 냥에 팔아요.”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약초꾼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단어를 꿀꺽 삼킨 그때, 수십 명의 무림인 중 선두에 선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사겠네.”
“……!”
경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늘어져라 하품을 한 노인이 툭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삼백 냥. 안휘 제일의 거부이니 그 정도는 낼 수 있겠지.”
중년인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화왕께 결례를 저지른 대가치고는 헐값이지요. 사겠습니다.”
괴인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낙찰자분, 혹시 성함이?”
“남궁룡.”
중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지도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엄이 번득였다.
“남궁세가의 가주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