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42
#241화
성라대연(星羅大宴).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공을 겨루니, 그야말로 별들의 연회라는 이름이 적격이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곰방대에 연초를 꾹꾹 눌러 담으며 말했다.
“승리의 축제라고도 할 수 있다네.”
그곳은 하남성 남부에 위치한 커다란 객잔이었다.
노인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목소리가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어째서긴. 중원 무림이 패배했다면 성라대연이 있었겠나, 진즉 마교 천하가 도래하고 성마대연(成魔大宴)이 열리고 있었겠지.”
“아아, 그것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이겼으니 이렇게 성라대연도 열리고, 천하의 유수한 문파들이 한자리에 모여 의기를 다질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건 그렇고…….”
품을 더듬던 노인이 곰방대를 흔들었다.
“누구 불 없나?”
옆에 있던 중년인이 잽싸게 부싯돌을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탁, 타닥! 치이익.
마른 풀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노인이 입을 뻐끔거렸다. 몇 차례 연기를 뿜어낸 그는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혹여 궁금한 게 있다면 뭐든 물어보게. 노부가 아는 선에서 전부 알려 주지.”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제가! 제가 먼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송 대협, 그럼 혹시…….”
“어이, 먼저 내가 말한 거 못 들었나?”
“못 들었다. 이 사파 잡놈 같은 새끼야!”
퍽! 우당탕탕!
순식간에 주먹이 오가고 탁자가 부서진다. 갑자기 벌어진 싸움에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처음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손님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쯧쯧. 무림인들이란.”
“그러려니 하게.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닌데, 뭘.”
“조용할 틈이 없으니 문제지. 성라대연이 코앞이라 그런지 별의별 놈들까지 하남으로 몰려드는군.”
“어차피 상행도 끝났겠다, 우리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일세.”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두 상인.
고급스러워 보이는 푸른 비단옷을 걸친 그들이 술잔을 주고받던 그때, 웬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술, 여아홍 맞소?”
“응?”
상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탁자 옆, 도대체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청년 하나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들이 든 술잔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이었다.
“여아홍 아니오? 맞는 것 같은데…….”
“마, 맞소. 여아홍.”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무릎을 친 청년이 빈 의자를 끌어당겼다.
“한데 색깔이 좀 밍밍해 보이는데. 이거 한 병에 얼마나 줬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에 상인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이게 얼마였지?”
“으, 은자 두 냥.”
청년이 탄식했다.
“허어. 안타깝도다.”
“안타깝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이거, 물이랑 섞은 거요. 척 보면 모르겠소? 주인장이 약간 장난을 친 모양인데.”
“뭣이라?”
상인들이 눈을 번쩍 떴다. 여아홍이 보통 비싼 술인가.
은자 두 냥이면 쌀이 두 섬이고 화주를 몇 달 동안 물처럼 마실 수 있는 거금이다. 거기에 물을 섞다니 괘씸할 수밖에.
“내 이것들을 그냥…….”
벌떡 일어서려는 상인을 동료가 만류했다.
“관두게. 잡음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어. 이런 시기에 조금씩 재미 보는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끄응.”
신음을 흘린 상인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청년은 여아홍을 잔에 꽉꽉 채워 들이키고 있었다.
꿀꺽, 꿀꺽, 탁!
“크으, 좋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상인들이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거 우리 술인데…….”
“그냥 목이 칼칼해서 한 잔 마셔 봤소. 무슨 문제라도?”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두 사람은 청년이 세 번째 잔을 깨끗이 비운 후에야 겨우 입을 뗐다.
“혹시 우리와 안면이 있소?”
“물론이오.”
“언제? 어디서?”
“오늘, 여기서.”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오늘부터 친구 합시다.”
“친구?”
상인들은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청년을 노려봤다.
호리호리한 몸에 서글서글한 인상.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이나 됐을까 싶은 새파랗게 어린놈이다.
친구는 웬 놈의 얼어 죽을 친구란 말인가.
한바탕 호통이라도 치려던 그때, 청년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철검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무림인!’
예로부터 무뢰배와 무림인은 한 끗 차이라고 했다.
상단 무사들과도 떨어져 있는 상황, 시비가 붙으면 무조건 손해다.
상인들은 막 튀어나오려던 호통을 꿀꺽 삼켰다.
“이보시오, 소형제.”
“소형제라, 그 호칭 아주 마음에 드는구려.”
“그, 그렇소? 그거 잘됐군.”
씩 웃는 청년에게서 왠지 모를 여유가 느껴졌다. 상인들의 얼굴에 억지웃음이 떠올랐다.
“소형제도 무인이오?”
“흠. 무공이라고 부르는 잡기를 배우긴 했소.”
뭐? 무공이라고 부르는 잡기를 배워?
어린놈이 벌써부터 겉멋만 오지게 들었다. 상인들은 마음속으로 청년을 욕하며 입을 열었다.
“강호의 동량이셨구려. 실례지만 어느 문파의 제자인지 물어볼 수 있겠소?”
“그게 뭐가 중요하겠소. 친구 사이에.”
얼렁뚱땅 대답을 회피하는 청년에게 상인이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우리는 금와상단(金蛙商團)에 소속된 상인들이오.”
“금와상단?”
“자랑은 아니지만, 절강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지. 사흘 뒤 열리는 성라대연에 필요한 것들을 납품하기 위해 먼 길을 왔소.”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상인 역시 넙죽 거들었다.
“상단 무사도 백 명이나 데려왔다오.”
“범처럼 용맹한 무사들이지.”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혼쭐나기 전에 썩 꺼지라는 무언의 협박이 담겨 있는 말이었으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중이었다.
“금와상단이라…… 분명 오늘 아침에 들었던 이름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청년이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곳 아니오? 그, 산적 수백 명을 잡아 왔다는.”
“맞소.”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던 상인이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잡아 온 건 아니고, 주워 온 거지만.”
“주워 왔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청년이 흥미를 보이자, 상인들이 목소리를 한껏 죽였다.
눈앞에 있는 이 새파란 놈보다 앞서 겪었던 일들이 훨씬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상단이 지나가는 골목에 웬 산적 놈들이 하나같이 다리가 부러져서 끙끙거리고 있지 않겠소. 알고 보니 인근에 흉명이 자자한 흑산채 놈들이더군.”
“두목인 적살부(赤殺斧) 흑종필은 목 없는 시체가 되어 있었고.”
“오호.”
청년이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턱을 문질렀다.
“그래서 어떻게 했소?”
“어떻게 하긴. 다 죽이기도 뭐하고, 그냥 가기에는 은자를 길바닥에 버리고 가는 꼴이라 죄다 줄줄이 묶었지.”
결국 금와상단은 흑산채의 잔당을 관아에 넘겨 거액의 현상금을 챙겼고, 그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래저래 말이 많소. 은둔 고수를 건드렸다느니, 산채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느니…….”
“아마 은둔 고수가 맞겠지. 절정 고수인 적살부를 일격에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청년은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절정 고수를 일격에?”
두 상인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소형제도 무인이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거요.”
“뭐라더라, 졸개 놈들이 말하기로는 웬 쇳덩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던데. 워낙 깊은 밤이라 얼굴은 제대로 못 봤고, 번쩍하더니 적살부가 쓰러졌다고 하더이다.”
“흠.”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던 청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은둔 고수는 생각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 분명하오.”
“헛, 짐작 가는 구석이라도 있소?”
“대충은. 아마 행색은 초라하고, 머리는 산발이겠지.”
“오오! 누구요, 그 고수가?”
“한데 이름을 모르겠소.”
“……?”
“뭐, 지금부터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술 잘 마셨소.”
순식간이었다.
한마디를 툭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난 청년은 바글거리는 인파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이내 딸랑이는 종소리와 함께 객잔의 문이 닫혔다.
“방금 뭐야?”
“간 거야? 여아홍만 홀랑 마셔 놓고?”
“친구라면서. 니미.”
두 상인이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였다.
“저기, 손님들.”
“뭔가?”
기골이 장대한 점소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목판을 내밀었다.
얼굴에는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이, 부업으로 흑도 칼잡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아니, 이 정도 면상이면 거의 확실하다.
“방금 나가신 분이 계산을 안 하셔서 말입니다. 방금 듣자 하니 친구분이신 것 같던데.”
“어?”
“오리 구이 둘, 여아홍 다섯 병. 도합 은자 열 냥하고도 철전 스무 냥입니다.”
“……!”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상인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여아홍을 다섯 병이나 마셨다고?’
하지만 별수 있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점소이의 면상을 보아하니 흑도 문파가 관리하는 업장이 확실했다.
울상이 된 상인들이 값을 치르기 위해 전낭을 뒤적거리던 순간이었다.
“그 돈, 내가 내지.”
툭, 쩔그럭.
어디선가 날아온 비단 주머니가 탁자 위에 떨어졌다.
어느새 조용해진 객잔 안의 사람들. 쫙 갈라진 인파 사이로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한 노인이 보였다.
또각, 또각. 나무로 된 의족(義足)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은자 스무 냥. 그걸로 값을 치르고 조용한 방을 하나 잡아 주게.”
비단 주머니와 노인을 번갈아 바라본 점소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 송 대협.”
“자, 그럼 하나는 해결됐고.”
노인은 투박한 손으로 두 상인의 어깨를 감쌌다.
칠순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두 사람을 잡고 끌어 올렸다.
“두 분은 나와 얘기 좀 합시다. 방금 나간 그 친구에 대해서.”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저희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거의 울먹거리는 두 상인을 향해 노인이 활짝 웃었다. 그러나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허허, 그거야 이 늙은이가 판단할 문제 아니겠소?”
천면호리(千面狐狸) 송호의 말에 상인들이 헛숨을 삼켰다.
* * *
성라대연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려 주듯, 하남성의 온 거리는 물론이고 객잔까지 사람으로 꽉꽉 들어찼다.
문제는 그 덕분에 내가 묵을 객잔조차 없다는 거다.
“방 없습니다.”
벌써 스무 개가 넘는 객잔에서 퇴짜를 맞았다.
물러설 곳도, 이유도 없어진 나는 점소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진짜 없는 거 맞아요?”
“진짜 없다니까요.”
“저 돈 있어요.”
나는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은자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것이 내 전재산이자 마지막 희망이다.
혹시 몰라 미리 슬쩍 숨겨 두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없었을 것이다.
적천강이 전낭을 통째로 갖고 튀었으니까.
‘염병할 노인네.’
맨 처음 들어갔던 객잔에서 점소이에게 소금 세례를 맞은 적천강은, 점소이와 객잔 중 어느 것을 불태울까 고심한 끝에 평화롭고 끝내주는 해결책을 찾아냈다.
이름하여 소림사 방장 찬스.
‘나, 소림사 간다.’
‘와. 그 방법이 있었네. 혹시 치매는 천재가 되기 위한 추진력이었습니까?’
‘그 추진력으로 네놈 모가지를 꺾어 주랴?’
‘제가 입이 방정이었네요. 어쨌든 다행입니다. 메다닥 가서 뜨거운 물로 때 좀 벗기고, 소림사 산채비빔밥도 먹죠.’
‘혼자 갈 건데.’
‘예?’
‘일 년 전, 네 녀석이 성라대연에 간다고 주둥이를 턴 덕분에 노부가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했다. 어차피 개봉에서 선발전이 열리니 그때까지 얼굴 보지 말자.’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아, 그리고 전낭도 내놔라.’
‘전낭은 왜요?’
‘화왕 체면이 있지, 거지꼴로 가서 먹고 씻으리? 몇 푼이나마 시주라도 해야지.’
‘…….’
‘아, 그리고 소림사 찾아오면 죽는다. 알겠느냐?’
화왕이 아니라 날강도다. 날강도.
눈 뜨고 전낭을 뺏긴 나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보금자리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리고 여기가 인근에서 마지막 남은 객잔이었다.
“이거 진짜 은자예요. 한 번 깨물어 보실?”
우락부락한 덩치의 점소이가 인상을 구겼다.
“……방금 속옷에서 꺼내지 않으셨습니까?”
“아, 숨겨 두느라.”
나는 재빨리 옷소매로 은자를 문지른 뒤 다시 내밀었다.
“깨물어 보실?”
“썩 꺼져! 이 거지 새끼야!”
시벌놈…….
면상에 한 방 먹여 줄까 하다가 힘없이 돌아섰다.
객잔 근처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이 공깃돌 놀이를 하는 것이 보였다.
“얘들아, 혹시 민박집 하시는 분 계시니?”
젖살이 빵실거리는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아니요.”
“우리 집은요, 하긴 하는데요, 이미 다 찼어요.”
“아, 그렇구나. 알았다.”
“그리고요,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요, 아저씨 같은 거지새끼들은 데려오지 말랬어요오.”
“…….”
어린놈이 말하는 본새 보소.
당장 저놈의 집구석에 쳐들어가서 가정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호통을 치고 싶지만 꾹 참았다.
‘이제는 어디로 가나.’
근처 하천이라도 가서 몸을 좀 씻어야 하나 고민하며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때였다.
“거기, 소협!”
처음에는 몰랐다. 저 외침이 나를 부르는 거라 생각하기에는 지금의 행색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걸레짝이나 다름없는 옷과 산발이 된 머리. 지금의 나는 훌륭한 거지의 표본이었다.
그나마 철구는 사슬을 몸에 둘둘 감아 천으로 덮었기에 죄수 신세는 면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누가 소협이라 불러 준단 말인가.
“저요?”
돌아서자 활짝 웃고 있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청년이 보였다.
“맞소,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