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48
#247화
음습한 지하 도박장. 구석 자리에 앉아 골패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중년인이 고개를 떨궜다.
“……죽겠소.”
그의 코에는 서역에서 들어온 안경이라는 물건이 걸쳐져 있었는데, 며칠 전만 해도 은자 수십 냥은 족히 나갈 물건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사물을 몇 배나 키워서 보여 준다는 안경알이 가뭄이 든 논처럼 쩍쩍 금이 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발치에서 그런 중년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맞나? 저자가 바로 그……?”
“바로 그 곽철융일세. 확실해.”
“세상에, 내 살다 살다 전설의 도곤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각각 뱁새눈과 염소수염이 인상적인 두 사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도박꾼들이었다.
다시 골패를 돌리는 곽철융을 모습을 바라보던 염소수염이 물었다.
“그런데 꼴이 왜 저래?”
그의 물음처럼 곽철융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초췌한 안색과 손질이 되지 않은 수염. 때가 새카맣게 묻은 비단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다.
일평생 노름판을 전전하며 엄청난 부를 쌓았다는 그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실패한 도박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있었지. 그것도 아주 큰 일이.”
뱁새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늦게 하남에 도착한 염소수염과 달리 그는 최근 곽철융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뭔가? 애타게 하지 말고 좀 알려 주게.”
“도박에서 졌거든.”
“이 바닥에서 이기고 지는 거야 흔한 일 아닌가?”
“흔한 일이지. 하지만 은자 천 냥짜리 판이라면 어떤가?”
“헉! 은자 천 냥!”
염소수염이 눈을 부릅떴다.
그 정도면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 아니 삼 대가 떵떵거릴 수 있을 만큼 천문학적인 금액 아닌가.
그는 그토록 큰 판을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건국 이래 최고의 승부였겠군. 상대는 누구였나? 아귀? 아니면 짝귀?”
“이 친구, 귀 어두운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요즘 소식에 영 깜깜하군. 아귀는 두어 달 전에 청성산 작두라는 놈한테 손목이 잘렸고, 짝귀는 잠적한 지 오래됐어.”
“그럼 그 둘 말고 누가 천하의 곽철융을 이겨?”
“산서잠룡.”
“누구?”
“태원진가의 진태경, 화왕의 제자지.”
화왕은 십왕 중 일인이자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초절정 고수. 그런 자의 제자가 도곤과 노름을 할 일은 없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염소수염이 탄식처럼 외쳤다.
“도도(賭賭)! 성라대연 도도를 했군.”
“정답일세.”
성라대연의 내기 도박은 천하 각지에서 벌어지는 도박 중 제일이라 하여 도도라 부른다.
마침내 사태를 파악한 염소수염이 혀를 찼다.
“쯧쯧. 곽철융이 멍청한 짓을 했군. 예선 배당률이 높긴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도 생각했어야지.”
“그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걸었겠나.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던 거겠지.”
“누구한테 어떻게 걸었는데?”
“철수신룡의 예선 수석.”
“글쎄, 해상왕의 제자이니 강하긴 하겠지만 딱히 그 정도까지는 아닐 것 같은데.”
뱁새눈이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야. 철수신룡의 파선권에 절벽의 십분지 일이 날아갔다는군.”
“……그게 말이 되나?”
무림의 고수들이 땅을 부수고 하늘을 가른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염소수염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그때, 귀를 의심케 하는 한마디가 더 이어졌다.
“말이 안 될 건 뭔가? 바로 그 직후에 산서잠룡은 절벽을 무너트리기까지 했는데.”
“……!”
염소수염이 접시만 해진 눈으로 더듬더듬 물었다.
“저, 절벽을 무너트렸다고?”
“맞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주 와르르 무너졌다더군.”
“…….”
염소수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불신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친우를 응시했다.
“헛소문 아닌가?”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도 처음에는 헛소문이라고 치부했네. 피육으로 이루어진 사람이 맨손으로 절벽을 무너트린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은 아니니까.”
“내 말이.”
“하지만 사실인 걸 어쩌겠나. 저기 있는 곽철융이 대표적인 산증인이지.”
“곽철융이 왜…… 아, 은자 천 냥을 잃었겠군.”
“오천 냥일세.”
“뭐?”
“반드시 이길 것 같았던 판에서 돈을 잃으면 어떨 것 같나?”
“호, 혹시.”
“곽철융이라고 별수 있나. 결국 도박에 미친 것은 매한가지인 것을.”
뱁새눈은 딱하다는 눈빛으로 곽철융을 바라보았다.
꾀죄죄한 몰골의 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의 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흘 전 그날, 철수신룡이 성라대연을 포기하고 장강으로 돌아가자 곽철융은 눈이 뒤집혀 버렸지.”
“도도를 계속한 건가?”
뱁새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곽철융이 철수신룡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혼뢰각(倱雷脚) 종삼이었네. 그가 각법 심사에서 최고점을 달성하는 것에 걸었지.”
“각법으로는 광서 땅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는 그 절정 고수?”
“응. 근데 이제는 따라올 사람이 꽤 많을 걸세. 한쪽 다리가 부러졌거든.”
“설마 그것도 산서잠룡인가?”
“슬슬 감이 잡히나? 맞네. 둘이 사소한 시비가 붙어서 깔끔하게 한 대씩 주고받고 끝내기로 했는데, 산서잠룡의 발차기 한 방에 정강이가 부러졌다더군.”
“어, 어떻게?”
“몰라. 툭 차니까 우두둑 부러졌대.”
“…….”
“심지어 혼뢰각이 선방을 쳤는데, 산서잠룡은 종아리 몇 번 긁고 끝났다던가. 그리고 그다음이 아마…….”
그 후에도 뱁새눈의 입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산서잠룡의 행보는 경악 그 자체였다.
천하의 후기지수 중 경공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곤륜파의 곤륜운룡(崑崙雲龍)은 제자리에서 오 장을 도약했으나 진태경에게 얼굴을 밟힌 채 추락.
개방의 후개(後丐)는 신법 심사 도중 진태경과의 차이를 도무지 좁히지 못하자 극대노. 분을 참지 못해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가 말 그대로 개처럼 처맞았다고 했다.
“다섯 번째 심사는 기관진식(機關陣式)이었지. 이번만큼은 모두가 제갈세가의 소가주가 수석을 차지할 거라 믿었지만…….”
넋 나간 얼굴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염소수염이 말을 잘랐다.
“또 산서잠룡이겠지.”
“바로 맞췄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기에 기관진식에도 능통하단 말인가?”
“아니. 그냥 무공에 능통해. 이 무식한 놈이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죄다 부수면서 통과했다는군.”
“…….”
“여하간 그렇게 산서잠룡이 이번 예선의 수석이 되었고, 매번 다른 곳에다 걸었던 곽철융은 개털이 된 거지. 지금까지 번 돈에, 은퇴 후 지낼 장원과 땅까지 담보로 잡아 고리대금을 끌어 썼다는데…… 쯧쯧.”
뱁새눈은 안타까운 듯한 눈빛으로 곽철융을 바라봤다.
한때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전설적인 도곤의 앞에는 은자 몇 냥이 전부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그의 전 재산일 터였다.
“버는 것도 한 방. 날리는 것도 한 방이야. 안 그런가?”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염소수염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은자 오천 냥이라니. 어느 놈이 땄는지는 몰라도 대박이 났겠군.”
“제대로 노났지. 오죽하면 금면공자(金面公子)라고 불리겠나.”
“금면공자? 그놈이 산서잠룡한테 걸었나?”
뱁새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견지명이 대단한 놈이야. 이번 도도에서 족히 은자 수만 냥은 땄을걸? 오죽하면 금으로 된 가면을 쓰고 다니겠나.”
“허어어.”
“아직 이립도 안 된 젊은 놈이라는데…… 이래서 될 놈은 된다는 거겠지.”
“염병. 누구는 이 나이까지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데. 후우…….”
두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쉰 그때,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도박장을 빠져나가는 곽철융이 손에 쥔 것은 개평으로 받은 철전 몇 푼이 전부였다.
* * *
성라대연은 최소 보름에서 길면 한 달까지 이어지는 장기 레이스다.
사흘간에 걸친 예선 심사가 끝나자 지원자들에게는 하루 동안의 자유 시간이 주어졌고, 그것은 내게도 해당하는 사안이었다.
“어험. 어흐흠!”
“막내야, 막내야아!”
“조장님! 조장니이이임!”
“……아, 제발.”
그러지 마.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소리 지르지 마. 안 그래도 주위 시선들이 신경 쓰여 죽겠는데 더 쳐다보잖아.
타다다다닥!
나는 누구보다 빠른 걸음으로 일행에게 다가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곰 같은 덩치의 진위경이 팔을 벌린 채 쇄도해 왔다.
“막내야! 장한 내 아우야!”
후웅! 덥석!
곰 발바닥이 상반신을 옥죄는 것과 동시에, 혁무진이 내 손등을 잡고 볼을 비볐다.
“오오, 조장님! 성라대연 수석! 태원진가의 자랑! 산서성의 등불! 우리 조장님! 나의 주군이시여!”
“…….”
진위경이라 그렇다 치고 혁무진 이 자식은 왜 이러는 걸까.
나는 황당함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너 돌았니?”
“예. 미쳤습니다! 저는 조장님의 강함에 미쳐 버렸습니다!”
“진짜 미친놈인가. 놔, 빨리 안 놔?”
빡! 빡! 빡!
빛살 같은 속도로 정수리에 삼 연타를 먹였음에도 혁무진은 요지부동이었다.
고통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혹시 그쪽이냐?”
말로만 들었다. 맞으면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지금껏 내게 수도 없이 맞았는데도 왜 떠나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는데, 그쪽이라고 생각하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쭉 돋았다.
“취향존중권!”
퍽!
정확하게 관자놀이를 얻어맞은 혁무진이 털썩 쓰러진다.
동시에 녀석의 품 안에서 번쩍거리는 뭔가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엥? 금가면?”
이건 또 뭐야.
그런 종류의 플레이를 할 때 사용하는 소품인가. 나는 심각한 얼굴로 가면을 품에 챙겼다.
혁무진 이 위험한 새끼, 가면은 평생 압수다.
‘어림도 없지.’
각오를 다지던 그때, 잠시 잊고 있던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어흠. 커흐흠!”
“기관지 안 좋으세요?”
아까부터 먼 산만 바라보며 헛기침을 연발하던 적천강이 움찔했다.
“그, 그 무슨 헛소리냐!”
“아니, 아까부터 계속 기침만 하시길래.”
“크흐흠!”
뭔가 말할 듯 말 듯 한 기색으로 딴청을 피우는 적천강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저 잘했죠?”
“…….”
“다섯 번 심사 만점. 만장일치 전체 수석. 이 정도면 뭐, 말 다 했지. 안 그렇습니까?”
“커흠. 고작 그 정도로 우쭐하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괜한 설레발 치지 말거라.”
“성라대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던데.”
“이제 겨우 예선이다. 천하는 넓고 고수는 많다는 노부의 말을 잊었느냐?”
“십봉룡 중에 셋을 꺾었는데요?”
장강수로맹의 철수신룡에 곤륜파의 곤륜운룡, 마지막으로 제갈세가의 신기묘룡(神奇妙龍)까지.
개방의 후개도 그와 비견될 만한 고수였고 혼뢰각은 광서 땅에서 이미 혁혁한 명성을 떨치는 절정 고수였다.
출신 성분과 특기도 각각 달랐지만, 그들 다섯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게 됐다.
“제가 다 이겼어요.”
“그건…….”
순간 말문이 막힌 적천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에이, 나약한 것들.”
“제가 강한 거죠.”
“또, 또 건방 떤다.”
“그냥 잘했다고 한 말씀 해 주시죠? 제가 노야, 아니 사부님의 명예와 열화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왔는데.”
“아직 멀었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입 주변이 실룩거린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굳이 다음 순간 들려온 진위경의 전음이 듣지 않았어도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 너무 괘념치 말거라. 이미 수뇌부 쪽에서 실컷 자랑하고 오신 모양이더라.
“커흐흠!”
마치 엿듣기라도 한 듯, 절묘한 타이밍에 또다시 헛기침을 내뱉은 적천강이 애써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명소졸 몇 명 제쳤다고 건방 떨지 말고, 심신을 가다듬으며 본선을 준비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그의 말이 맞다. 이제 고작 예선이 끝났을 뿐, 진정한 강자가 드러나는 본선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예선이라는 거름망에서 살아남은 이들 중에는 십봉룡에 견줄 만한, 아니 그 이상의 고수들도 상당할 것이다.
나는 이미 예선을 보는 도중 그런 자들을 몇 명 마주쳤다.
‘천하는 넓다. 그 말이 맞긴 하네.’
예선에서 자신의 본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건 강하면서도 똑똑하다는 뜻이다.
나는 씩 웃으며 적천강에게 포권을 취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놈 참. 허허. 크흐흠!”
적천강의 주름진 입가에도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