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5
#24화
뛰었다. 그저 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가족처럼 지내던 삭주지부의 식솔들이 죽어 나가도 열네 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오빠, 추워.”
품에 안긴 여동생이 칭얼거렸다. 소년, 소천은 추위에 얼어붙은 동생의 손에 호호 입김을 불었다.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참아. 응?”
“집 언제 가? 소율이는 엄마 보고 싶은데…….”
“어제도 오셨는걸.”
“거짓말. 오빠도 봤어?”
“그럼, 봤지.”
꿈속에서. 소천은 이어지는 말을 꿀꺽 삼켰다.
지난 밤 꿈에 나타난 어머니는 사흘 전과 똑같았다. 지쳐 잠든 소율이를 한참 동안이나 쓰다듬고 바라보다가 말씀하셨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그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떠나던 그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머니는 어떻게 되셨을까. 혹시……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어.’
불길한 느낌을 애써 억누르던 그때였다.
부스럭.
“누구냐!”
어린 누이를 끌어안는 동시에 품고 있던 비수를 꺼내는 일련의 동작이 자연스럽다.
집이 불타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그날 밤 이후, 쾌활하던 소년은 짐승의 눈빛을 갖게 됐다.
“셋을 세겠다. 하나, 둘…….”
“나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얼굴에 비수가 스르르 내려갔다.
“공 숙부?”
“쉿. 목소리를 낮추어라.”
공 숙부라 불린 이는 지친 얼굴의 중년인이었다. 삭주 지부장인 소천의 아비와는 오랜 지기로, 현재는 어린 남매의 길잡이이자 보호자이기도 했다.
“반 시진이 넘도록 안 오시기에 걱정했습니다.”
“주의해야 했다. 꼬리가 붙었어.”
“벌써 말입니까?”
“그래. 한시가 급하다.”
소천은 망설이지 않고 일어났다. 영문을 몰라 하는 소율을 들쳐 업은 공 숙이 풀숲을 헤치며 앞장섰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혼주. 제아무리 잔악무도한 놈들이라고 해도 그곳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소천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미 삭주 지부가 무너졌다. 건물은 불탔고 모두가 죽었다. 놈들의 정체는 모르지만 목적은 확실했다.
‘몰살.’
떠오른 단어를 입김에 날려 보낸다. 소천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진눈깨비처럼 흩날리던 흰 눈이 종아리까지 차오른 순간이었다.
“조용히.”
앞서 걷던 공 숙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천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세찬 바람 소리.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소천은 직감했다.
“놈들입니까?”
공 숙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최소 십여 명. 곧 따라잡힐 것이다.”
암담한 상황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천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불찰이다. 눈이 내리기 전에 서둘렀어야 하는 것을……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숙부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소천은 품에서 비수를 꺼내 들었다. 일 년 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비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저도 하찮게나마 무공을 배운 몸. 무인답게 싸우다 죽겠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공 숙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끌어 올려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간 밤낮 없는 도주로 한계에 다다른 체력이 발목을 잡았다. 걸음이 점점 느려지고, 숨이 가빠진다.
“여기다!”
“거의 다 따라잡았어!”
이제는 소천도 들을 수 있었다. 추격자들의 목소리와 그들이 밝힌 횃불이 점점 가까워진다.
그때, 공 숙이 곤히 잠든 소율을 소천에게 건넸다.
“뒤따라가마.”
“숙부!”
“걱정마라. 이 공야청,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그래도 어찌…….”
“어서!”
소천은 공야청을 뒤로하고 다시 산을 올랐다. 한계에 다다른 체력,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눈 덮인 산의 언덕에 다다랐을 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공 숙부.’
소천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이라도 비수를 뽑아 들고 저 아래로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참자. 참아야 한다.’
지난 닷새 동안 수백, 수천 번을 다짐했다. 꼭 살아남겠다고, 품 안의 여동생을 지키고 흉수들에게 복수하겠노라고.
언덕 위, 소천은 불길이 쏟아지는 눈동자로 일렁이는 횃불들을 바라봤다.
‘나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그리고 등을 돌려 언덕을 오른 다음 순간, 소천은 벼락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아, 아아…….”
언덕 위 너른 공터, 남색 무복을 입은 열 명의 사내가 소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수실로 새겨 넣은 진(陳)이라는 한 글자가 크게 보였다.
* * *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훈련을 막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세찬 바람 너머로 언뜻 들리는 소리. 공력을 끌어 올리자 더욱 선명해지는 그것의 정체는…….
‘사람 목소리?’
어림잡아도 열 명은 넘어가는 듯했다. 어떻게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이 날씨에 저 정도 인원이라…….’
좋아, 결심했다.
“짐 싸라.”
“예?”
각자 무기를 들고 훈련을 준비하던 조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는다.
“빨리 짐 싸. 한 명은 들어가서 혁무진…….”
“조장님. 저기 웬 꼬마가 있는데요?”
젠장. 진짜네. 조그만 아이를 업은 꼬마가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쟤 누구야.”
“모르겠는데요. 이 오두막 주인인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뒤에 따라오는 놈들이 화목한 대가족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왜일까.
“우는데요?”
누군가의 말처럼, 꼬마는 울고 있었다. 하염없이 펑펑 울면서 뛰고 있었다. 문제는 방향이다.
“어어, 이쪽으로 오는데…… 조장님 어디 가세요?”
의혹 어린 눈빛들이 나를 향했다. 나는 이미 멀찍이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말 타러. 슬슬 출발해야지.”
“이 날씨에요? 말도 못 움직일 텐데.”
“그래? 그럼 버리고 가자.”
“예?”
“원래 임무라는 게 그래. 눈이 오건 비가 오건 우리는 할 일을 해야지. 입 다물고 짐이나 챙겨.”
“그래도…….”
“짐 챙겨! 혁무진 깨워!”
불과 일 다경 전까지 우러러보던 시선은, 이제 정신병자를 보는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왜 이러긴. 느낌이 더럽게 안 좋으니까 그렇지.
이제 척하면 척이다. 꼬마가 가까워질수록 빅 엿의 냄새가 강하게 풍겨 오고 있다.
어떤 전개가 벌어질지 눈에 선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럼 나만 먼저 내려가 있을…….”
그 순간, 함성 소리와 함께 불청객들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이십여 명에 달하는 남자들이다.
‘아, 시발.’
띠링.
– [돌발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삭주 지부의 생존자]당신은 태원진가 삭주지부의 생존자들과 마주쳤습니다.
항산검문의 잔인무도한 추격자들에 맞서 생존자들을 구해 내십시오!
등급 : 돌발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생존자 구출 (미완료)
보상 : 연계 퀘스트
???
실패 : ???
“…….”
“…….”
우리는 놈들을 봤다. 놈들도 우리를 봤다. 얼어붙은 공터에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내 팔자가 더러운 걸 어쩌겠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외쳤다.
“공격 대형. 펼쳐!”
차차착.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조원들은 가르친 대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대형이 갖춰질 때쯤, 놈들도 우리의 정체를 깨닫고 고함을 내질렀다.
“태원진가의 애송이들이다!”
“머릿수도 얼마 안 돼. 쓸어 버려!”
애송이. 딸리는 머릿수.
족집게처럼 골라낸 팩트가 가슴을 헤집는다.
아직 다 가르치지도 못했는데, 이놈들 무공도 낮고 실전 경험도 없어서 완전 신병인데…….
‘안 되면 나 혼자라도 튀어야 하나.’
나는 암담함을 느끼며 [기감]을 사용했다. 내 눈에만 보이는 푸른 기의 물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적들을 훑는다.
띠링. 띠링. 띠링.
“……응?”
그때 정찰조원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외쳤다.
“어떻게 합니까?”
“옵니다, 와요!”
“조자아아앙!”
30m, 20m……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적들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걱정하지 마라. 적들은 단순한 경험치…… 아니,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다. 단!”
“단?”
“온 힘을 다해 막아라. 막기만 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이긴. 막타 치지 말라는 소리다.
“수비 대형, 펼쳐!”
응. 경험치 다 내 거.
* * *
“조장!”
“안 됩니다. 조자아앙!”
“조장이 자살하러 갔다!”
그런 거 아니야, 미친놈들아. 나는 정찰조원들의 비명을 뒤로하고 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단전에서 솟구친 공력이 사지백해로 뻗쳐 나간다.
“미친놈.”
선두의 적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예쁜 놈.”
“뭐?”
서걱.
목을 움켜쥐고 고꾸라지는 녀석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띠링.
–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50의 공적치를 얻었습니다!
“뭐, 뭐야!”
“이 개새끼가 감히…….”
적들의 면면은 실로 훌륭했다. 얼굴에 칼자국은 기본 옵션이요, 위생 상태도 심히 안 좋아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런데…….
“어우, 좋다.”
꽃밭에 있는 기분이다. 경험치라는 꿀을 머금고 있는 스무 송이의 꽃들. 나는 행복한 얼굴로 꽃송이에 달려들어 꿀을 빨았다.
푹. 푹. 푹.
띠링. 띠링. 띠링.
–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50의 공적치를……
– 경험치를 획득…….
– 50의 공적치…….
거침없이 그 사이를 헤집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선두가 무너지고 적들이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린다.
‘그러면 고맙지.’
진가보법과 진가창법은 전진에 기반을 둔 무공이다.
나는 보법을 밟아 나갔다. 중심으로 파고들며 창을 휘둘렀다.
“크악!”
“으아아악!”
예리한 창의 육중한 무게에 패도적인 창법까지. 더군다나 갈수록 적들이 물러서는 상황.
진가창법이 진가를 발휘할 시간이었다.
‘일 초식.’
보법과 함께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 번 휘두르고 내질러질 때마다 누군가의 비명과 피가 터져 나온다.
“컥.”
“꺼흐으윽.”
이 초식, 삼 초식. 사 초식.
어느 순간 나는 흐름에 몸을 맡겼다. 물결이 파도가 되고, 파도에 적들이 휩쓸린다. 전신의 감각이 오싹할 정도로 곤두섰다.
더, 더, 더…….
“이 개새끼가아!”
푹. 푸푹.
목, 가슴, 복부. 차례대로 찌르고 베어 낸다. 사망자 확인은 시스템 알림이 대신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자는 한 사람이 유일했다.
“대, 대형께서 반드시 널 찾아…….”
기다리지 않았다.
파도는 흐름이다. 그리고 마지막 파도가 내 창끝에서 터져 나왔다. 진가창법의 마지막 초식, 천관일(天貫軼).
푸화악!
마지막 한 사람, 뱁새눈은 조각조각 난 검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놈의 가슴 한복판이 포탄에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가 있었다.
띠링.
– [Lv.32 흑산도]를 처치하셨습니다!
– [생존자]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연계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경험치를 대량 획득합니다!
– 공적치를 대량 획득합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쉼 없이 들리는 시스템 알림을 들으며 나는 배를 쓰다듬었다.
“꺼윽.”
어우, 배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