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50
#249화
천면호리(千面狐狸). 천 개의 얼굴을 가진 여우.
별호가 이렇게 안 어울리는 사람은 처음 봤다.
노인, 천면호리 송호는 어지간한 장정보다 커다란 체구의 소유자였고 인상은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했다.
여우와는 거리가 먼,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 할아버지 닮았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치킨집 앞에 서 있는.’
안경만 쓰면 쌍둥이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나 속 편한 생각을 하는 나와는 달리 주위의 공기는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상태였다.
긴장한 얼굴들.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천면호리라…….
‘괜히 그런 별호가 붙은 건 아니겠지.’
생각을 고쳐먹자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송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절정 고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무공이 아닌, 그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그게 뭐지?’
송호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고개가 슥 돌아가더니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다가오라는 그의 손짓에 걸음을 내디뎠다.
“자네로군?”
“예?”
“산서잠룡 진태경. 화왕 적 대협의 제자가 예선에서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적천강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번 성라대연의 본선 진출자들이 유독 많은 이유이기도 하고.”
나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지금 송호가 하는 말은 처음 듣는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었다.
“저 때문에 말입니까?”
“물론 자네 때문이지.”
송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마지막 심사 때 설치해 둔 기관진식을 모조리 부숴 버린 장본인 아닌가.”
“아.”
“그 덕분에 합격자가 백 명은 늘어났을 걸세. 자네가 핵을 파괴한 덕분에 다른 자들은 수월하게 통과했거든.”
그런 일이 있었어?
문득 생각해 보니 어쩐지 다들 빨리 통과한 것 같긴 했다.
그때는 역시 현지인들이라 나 같은 외국인과는 달리 기관진식에 빠삭하구나, 하고 말았지 뭐.
“표정을 보니 몰랐던 게로군.”
“예, 뭐. 제가 그쪽으로는 워낙 깜깜해서요.”
“후회되지 않나?”
“뭐가 말입니까?”
“기관의 핵을 파괴한 것. 경쟁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수 있었을 테니 말일세.”
“오백 명이나 사백 명이나.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거기서 거기라…….”
시원시원한 대답에 송호가 내 등 뒤를 가리켰다.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세 얼간이를 비롯하여 연무장을 가득 채운 무인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오백여 명.
하나같이 천하 어디를 가도 인정받는 초일류, 혹은 절정 고수들이다.
아낌없는 지원 속에 무공을 익힌 명문가의 자제도 있고, 온갖 흉터를 훈장처럼 전신 곳곳에 새겨 넣은 낭인도 있었다.
‘많기는 많네.’
하지만 상관없다. 사백 명, 오백 명, 설령 천 명이어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송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상관없습니다. 이기면 그만이죠.”
“뭐? 으핫! 으하하하!”
아, 이거 막상 말하고 나니까 쪽팔리네.
내 대답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송호는 박장대소했지만 동시에 어그로도 제대로 끌렸다.
나는 따끔거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생각했다.
‘다들 똑같은 생각이면서 뭘.’
어차피 성라대연에 모인 이상 모두의 목표는 단 하나. 우승뿐이다. 이런 판국에 아닌 척하는 것이 더 우습다.
“재밌는 친구로군. 적 대협이 제대로 된 물건을 키웠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송호가 만족스럽게 웃던 그때였다.
“송 대협 아니십니까? 이곳에는 어인 일로…….”
단상에 오르려던 중년 감독관이 그를 보고 멈칫했다. 송호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합격자들이 왔다기에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들렀네. 장차 천하의 기둥이 될 인재들 아닌가?”
흡족한 얼굴로 사람들을 죽 훑어본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럼 뒷방 늙은이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모두 즐거웠네.”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먹잇감을 노리는 여우처럼 가늘게 좁혀진 눈매와 날카로운 눈빛을.
‘천면호리.’
이 푸짐한 인상의 노인에게 왜 그런 별호가 붙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딜 본 거지?’
그리고 누구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찰나에 스쳐 간 그 눈빛은 결코 까마득한 후배들을 바라보는 선배의 그것이 아니었다.
내가 빠르게 사람들의 면면을 훑던 그때였다.
“이보게! 친구!”
처음에는 웬 미친놈인가 했다.
고요한 연무장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외침과 함께 열정적으로 손을 흔드는 한 사람.
어디선가 본 얼굴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저 자식도 붙었어?’
상승검 종리추. 활짝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궁금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합격자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중년 감독관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선 마차 행렬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의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질문을 한 사람은 지금쯤 주위의 눈총을 받고 있을 것이 뻔하다.
이미 몇 차례나 예선 이후의 일정에 대해 알려 주었으니까.
중년 감독관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낙양(洛陽)이오.”
성라대연의 예선은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며 숭산에서 치러졌으나, 본선은 낙양에서 열리며 방식도 다르다.
듣기로는 비무를 관람하기 위한 관중석까지 마련되어 있단다.
아마 그래서 본선을 성라대연의 진짜 시작이라 부르는 거겠지.
“모두 마차에 오르시오. 그리 먼 길은 아니니 금방 도착할 거외다.”
두두두!
마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말발굽이 힘차게 지면을 박찼다.
나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숭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난 사흘간의 아름다운 추억……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그냥 같이 탄 놈들 얼굴 보기 싫어서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꺼져. 말 걸지 마.”
시작은 가볍게 종리추.
하지만 마음 놓기는 이르다.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허어, 이보시오들. 방금 저 도우가 한 말을 들었소? 꺼지라니! 무슨 길거리 시정잡배도 아니고 격 떨어지게…….”
십봉룡 중 하나인 곤륜운룡 백우다.
나는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입 다물어라. 두 번 말 안 한다. 그리고 도우는 시벌, 화염신장으로 치즈 크러스트를 만들어 버릴라.”
“뭐라? 시벌? 그거 지금 빈도에게 한 말이오?”
“응.”
“운이 좋아 경공술에서 한 번 앞섰다고 기세등등한가 본데…….”
“인마.”
고개를 돌려 백우를 응시했다.
“입 다물랬지.”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짧은 침묵이 흘렀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었다.
아니, 선공을 취한 백우가 반 박자 더 빨랐다.
쉭, 타다다다닥!
그리고 모든 것이 순식간에 끝났다.
양 손목을 제압당한 백우가 눈을 부릅떴다.
“후, 후발선제(後發先制)?”
“어디서 선빵을 쳐. 이 새끼가.”
승부에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빠른지가 아니다.
결과. 오직 결과만이 전부다.
나는 분명 백우보다 출발이 늦었지만 더 빨리 표적에 도달했다. 그게 전부다.
“금나수는 개판이네. 경공술에 몰빵했냐?”
“어,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네가 나보다 약하고 내가 너보다 강했던 거지.”
얼이 빠진 녀석의 얼굴을 향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선택지가 세 개 있다. 일 번. 이대로 화염신장을 한 방 세게 맞는다.”
“……!”
“이건 표정 보니까 싫은 것 같고. 이 번. 멸염신권을 살살 맞는다. 아, 참고로 이걸로 절벽 무너트렸다. 네 몸뚱이가 절벽보다 단단하다 싶으면 도전해.”
“……세, 세 번째는 없소?”
“소? 하오체네. 너 하오문 출신이니? 곤륜파 아니었어?”
백우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비, 빈도는 올해로 스물여섯이오. 도우보다 네 살이나 많소.”
“오, 네 살. 그럼 화염신장 네 대 맞을래?”
“헉.”
백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다시 말해 봐.”
“삼 번은 없……습니까?”
“있지. 삼 번. 앞으로 내 앞에서는 입 닥치고 있기.”
“그걸로 하겠습니다!”
“그래. 조용히 가자.”
나는 움켜쥐고 있던 백우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순간 녀석의 눈동자에 갈등의 빛이 스쳤지만 이내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어지간히 멍청하고 추잡한 놈이 아니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럼 일단 하나는 처리했고.’
나머지 놈들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와 백우를 번갈아 보는 종리추.
궁기방은 허벅지를 긁던 손을 멈췄으며 제갈균은 열심히 보고 있던 서책을 덮었다.
“야. 개방.”
“…….”
“이 자식은 똥 얘기할 때만 입이 트이나.”
궁기방은 세 얼간이 중 가장 말수가 적었다. 가끔 하는 말이라고는 개똥으로 시작해서 소똥, 말똥으로 끝나는 저주 비슷한 말이 전부였다. 하여간 더럽기 짝이 없는 놈이다.
“뭐 어쨌든 너한테도 선택지를 준다. 아까 쟤한테 말한 세 개. 들어서 알고 있지?”
궁기방의 떡 진 머리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귀찮으니까 빨리 골라.”
한동안 말이 없던 궁기방이 입을 열었다.
“본 방의 항룡십팔장(降龍十八掌)은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절기다. 팔 성만 이뤄도 천하에 대적할 자가 몇 없지.”
“그래서?”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항룡십팔장을 오 성까지밖에 익히지 못했다.”
“……?”
궁기방이 결의에 빛나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삼 번을 택하겠다.”
“…….”
머리통을 한 대 후려쳐 줄까 하다가 참았다. 때려 봤자 내 손만 더러워질 것 같아서.
“그럼 앞으로 입 다물고 있어라, 기방아. 앞으로 존댓말 꼬박꼬박 쓰고.”
“기, 기방이? 존댓말?”
“강자지존. 모르냐?”
“그래도 그건 좀…….”
“아 맞다, 너도 스물여섯이었지? 나보다 네 살 많으니까 멸염신권 네 대 맞을래?”
“……!”
궁기방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주먹을 불끈 움켜쥔 녀석이 양손을 떨쳤다.
쉭, 차착!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포권을 취한 궁기방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진 형이라 부르겠습니다.”
“오냐.”
깔끔하게 두 사람을 정리한 나는 마지막 얼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갈균은 서책을 덮은 채 학의 깃털로 만든 새하얀 학우선을 쓰다듬고 있었다.
“갈균아.”
“본 공자의 성은 제갈입니다. 이름이 균이지요.”
“그래. 갈균아. 넌 이미 선택했지?”
“선택은 어렵지요.”
“만약 앞에 두 선배를 보고도 아직까지 대답을 정해 놓지 않았다면…… 넌 변사체가 된다.”
제갈균은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본 공자의 옛 조상이신 제갈무후(諸葛武侯)께서는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출사를 결심하셨습니다.”
“아니, 이 미친놈은 번호 말하라니까 삼국지 얘길 꺼내고 있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삼고초려. 무후께서 세 번의 방문 끝에 마음을 여셨으니 그분의 자손인 본 공자는 삼 번을 택하겠습니다.”
“…….”
역시 제갈세가.
조상님까지 끌어들여서 빌드업 쌓는 지략 보소.
‘학우선을 혈우선으로 만들어 줄까 보다.’
딱 한 명이 남았지만, 종리추는 허허 웃으며 항복하듯 두 팔을 들어 보였다.
“이거 무섭군. 난 쭉 입 다물고 가지.”
“자꾸 추근거리지 마. 알았어?”
“알겠네.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뭐.”
종리추에게는 딱히 악감정이 없어서 이쯤 하기로 했다.
비로소 세 얼간이를 평정하고 얻은 평온을 즐기고 있던 그때, 빠르게 달려가던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더니 이내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수십 장에 달하는 높은 성벽과 거대한 철문. 그리고 은은한 노을빛에 물든 현판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