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53
#252화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이 흐를수록 대진표는 간략해졌다. 본선 첫날 오백여 명에 달했던 참가자의 숫자는 이제 열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날이 고조되는 군중의 열기와 더불어 한 사람의 기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노부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화왕 적천강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본문의 무공이 천하제일인 것 같아.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
상석에 자리한 사람들은 구겨지는 인상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지만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욱 분한 것은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화왕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그 제자인 산서잠룡이 보여 준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예선 때부터 일대 파란을 몰고 오더니,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이며 승승장구하지 않았나.
심지어 어제는 하북팽가의 혼원도(混元刀)를 복날 개 잡듯이 두들겨 패 버렸다.
‘망할 노인네. 그새를 못 참고 또 자랑질이군.’
‘천하제일의 무공은 무슨. 겨우 어린놈 하나 잘 키운 것 가지고.’
‘그래도 난 놈은 난 놈일세.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주워 왔지?’
표정만 봐도 생각이 읽힌다. 평소였다면 표정 관리 안 하냐며 으름장을 놓았을 적천강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대자대비한 부처, 그 자체였다.
흐뭇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바라보던 적천강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이르러 멈췄다.
“어이, 정력도왕.”
“…….”
태산처럼 거대한 체구의 노인, 벽력도왕은 못 들은 척 먼 산을 바라봤다. 그의 옆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나이도 노부가 세 살이나 많은데. 안 그래?”
“……좋은 말로 할 때 그 입 닥치시게.”
“어허, 이 사람. 왜 이렇게 화가 났는가?”
능글맞게 받아친 적천강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자네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하북 제일 기재니 뭐니 하는 맏손주가 노부의 제자에게 일각 동안 두들겨 맞아서?”
“……!”
“거참.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는 말도 못 들어 봤나.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래?”
그제야 거친 콧김을 뿜어내던 벽력도왕의 시선이 슬그머니 적천강을 향했다.
“그, 그렇지? 하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거 아니겠나.”
“맞네. 그 나이 또래에는 원래 그렇지.”
“오랜만에 맞는 소리를 하는군.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손주 녀석이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많이 쌓였었다는군. 그래서 제 실력 발휘를 못 한 게야.”
적천강이 인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하네. 원래 실력이 부족하면 변명할 거리가 있어야 하니까.”
“……뭣이?”
“생각해 보니까 또래도 아니구먼. 자네 맏손주 나이가 이립이 넘지? 우리 태경이는 이제 겨우 스물둘인데. 허허,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이, 이 쳐 죽일 늙은이가!”
“응? 뭐라고? 겨우 팔 강에서 탈락한 하북팽가 태상가주의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으허허허!”
눈이 뒤집힌 벽력도왕을 가로막은 것은 염주를 쥔 누군가의 손이었다.
법왕 굉도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미타불. 두 사람 모두 나잇값 좀 하시게. 여기가 어떤 자리인지 잊었나?”
수천, 수만의 군중이 자리한 성라대연의 비무장이다.
그제야 상석을 향해 쏟아지고 있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을 느낀 벽력도왕이 반쯤 뗀 궁둥이를 도로 붙였다.
“끄응.”
“적 시주, 자네는?”
굉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적천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래. 다들 사이좋게 지내라고. 빈승이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어쩌긴. 저 늙은이 콧대를 부숴 놔야지.”
벽력도왕의 도발적인 말에도 적천강은 반응하지 않았다.
힐끗 굉도를 곁눈질한 뒤 무거워진 표정으로 비무장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일전에 굉도가 했던 한마디가 맴돌고 있었다.
‘빈승은 이번 성라대연을 마지막으로 물러날 생각이네.’
그의 오랜 지우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길어야 일 년이라고 했던가? 전처럼 천기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지만 법왕 굉도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땡중 같으니. 십 년은 더 살아야 하거늘.’
진태경의 승리에 기분이 한껏 좋아지더라도 굉도를 생각하면 금세 마음이 무거워졌다. 바로 지금처럼.
그런 적천강의 분위기를 읽은 굉도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성라대연에는 유독 이변이 많이 일어나는구려. 안 그렇소?”
“방장님의 말이 옳습니다.”
“이런 결과는 예상치 못했지요.”
상석에 자리한 문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서잠룡이야 뭐 두말할 것도 없고…….”
진태경이 언급되자 말석에 앉아 있던 진위경의 안면 근육이 실룩거렸다.
연배나 강호에서의 위치가 아직 부족하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이지, 기회가 되었다면 진작 자리에서 일어나 깨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사뭇 부럽게 바라보던 문주들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뜻밖의 이변은 연명검, 아니 상승검과 무적신검입니다.”
“아, 그렇지. 나도 그 두 사람이 가장 의외였소.”
성라대연이 어떤 곳인가.
천하 각지에서 젊고 이름 있는 무인들이 무수히 참여한 자리다.
한데 상승검과 무적신검은 명문 대파의 제자도 아니었고 일찍이 명성을 날린 적도 없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까지 대진표에 남아 있는 것은, 화왕의 제자인 동시에 태원진가라는 출신 가문이 있는 진태경보다 더 의외의 일이었다.
“특히 무적신검이 뛰어나더군요. 본문의 장로와도 견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중견 문파의 문주 중 누군가가 던진 말에,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적천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입 다물고 있게. 그럼 중간이라도 가니까.”
“……예?”
“자네가 어느 문파의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 아이는 이미 후기지수를 한참 벗어났어. 아예 짐작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건가?”
굉도와 벽력도왕도 실소를 흘리며 동의했다.
“적 시주의 말이 거칠기는 하지만 사실일세.”
“저 늙은이한테 동의해 주긴 싫어도 맞는 말이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해. 자그마치 검…… 크흠. 뭐, 여하간 대단한 놈이야.”
순간적으로 말꼬리를 흐린 벽력도왕이 슬쩍 한 사람을 곁눈질했다.
온화한 미소를 띤 장년인, 화산파 장문인인 천검진인(天劍眞人)이 바로 그였다.
“하하, 역시 노선배님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군요.”
천검진인의 낭랑한 웃음에 사람들이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맞소. 무적신검은 본문의 제자요.”
“아아, 과연!”
“훌륭한 제자를 두셨습니다. 진인!”
무공이 높은 몇몇은 짐작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더러는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말이 천검진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제자가 아니라, 사제올시다.”
“그, 그 말씀은.”
“연이 닿아 같은 스승을 모셨소. 마지막으로 본 것이 십여 년 전인데…… 참으로 훌륭하게 장성한 모습을 보니 좋구려.”
같은 스승.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천검진인의 스승이 검성(劍星) 매종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들 중 아무도 없다.
‘무적신검이 바로 그 검성의 제자라니!’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의 반응에 천검진인은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득도한 도사를 연상케 했지만, 속마음은 사뭇 달랐다.
‘드디어 잡았다. 요놈!’
스승 검성에 이어서 막내 사제까지 도망쳐 버렸다.
일 년 전, 겨우 꼬리를 잡았다 싶었는데 자신의 제자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쳐 버린 것이 아닌가.
천검진인은 무적신검, 아니 청풍이 비무대에 오를 때마다 멱살을 붙잡고 화산파로 압송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허허허. 우리 화산파의 보물이지요.”
속마음을 감추고 신선처럼 웃어 보이는 천검진인을 향해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대단한 경사입니다. 검성의 이름은 다음 대에도 화산파에 남아 있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진인.”
“경하드립니다!”
“산서잠룡과 무적신검의 대결이라니. 이거, 결승이 더더욱 기대됩니다. 하하!”
훈훈한 분위기 속, 적천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동시에 한 줄기 전음이 굉도의 귓가에 닿았다.
– 다들 한 사람을 잊고 있군.
굉도는 조용히 염주를 굴렸다.
– 상승검 종리추 말인가?
– 맞네. 바로 그자일세.
성라대연은 출신과 성분을 따지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천하 무림의 연회. 따라서 참가자들은 그리 세세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보기일 뿐, 실상은 달랐다.
– 은영각을 동원하여 본선에 진출한 참가자 전원의 신상을 확인했네.
일 년 전, 암천의 존재를 알아차린 굉도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바로 천면호리 송호였다.
경위를 들은 그는 망설임 없이 옛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이름만 남아 있던 은영각은 그렇게 재탄생했다.
– 결과는?
– 두 번, 세 번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네. 모두 신분이 확실했지만 오직 한 사람, 상승검 종리추는 어디에도 없었어.
– 확실한 것인가? 모종의 이유로 철저히 감췄다면…….
– 짐작에 불과했네. 사흘 전 암중살(暗中殺)에게서 연락이 끊기기 전까지는.
– 암중살? 그가 당했다는 말인가?
암중살은 적천강이 알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은영각 최고의 정보원인 동시에 살수로서는 초절정에 이른 그에게서 연락이 끊겼다니.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있을 암중살을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그의 무공을 알아볼 수 있겠나?
굉도의 전음에 적천강의 눈빛이 깊어졌다.
– 노부도 잘 모르겠네. 사실 그게 가장 큰 의문이야.
지금껏 수많은 무공을 견식 했던 그다.
눈으로 보고, 직접 상대하여 꺾기도 했다.
그러나 적천강의 눈에 비친 종리추의 무공은 생소함 그 자체였다.
– 무공이 그리 강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 녀석은 매번 어떻게든 이기며 여기까지 올라왔지. 노부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무공일세.
– 하면 그의 무공이 상리(常理)를 벗어났다는 말인가?
– 상리를 벗어나?
순간 적천강의 얼굴이 굳었다. 수십 년 전, 상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곧 하나를 뜻하는 단어였다.
‘마도(魔道)!’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을 스친 한 단어.
굉도와 적천강은 전란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 때문에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그렇다면 그가 마교의 후예란 말인가?
– 모르겠네. 암천, 마교. 둘 중 어느 곳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두 사람이 무거운 표정으로 전음을 마친 그때, 공력을 담은 외침이 비무장을 뒤흔들었다.
* * *
“강호 동도 여러분께 떠오르는 신예 고수, 무적신검! 그리고 무당파의 유운신룡(柳雲神龍)을 소개하겠소!”
비무대에 오르는 무적신검, 아니 청풍은 유난히 신나 보였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열렬한 환호에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었다.
“와! 와아! 안녕하세요! 저 성라대연 팔 강은 처음 와 봐요!”
반면 상대인 유운신룡은 굳은 얼굴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역시 정파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십봉룡 중 일인으로서, 진무경과 함께 수위에 꼽히는 실력이라고 했다.
‘확실히 강하다.’
나이도 이립을 넘긴 데다 무당파 장문인의 적전 제자.
제갈균에게 들은 바로는 일찍이 비무 행을 하며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글쎄.
‘뭐, 승패는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편안히 관람석에 몸을 기댔다.
바로 어제 적천강의 소원대로 하북팽가의 소가주를 박살 내고 준결승에 오른 나다.
큰 이변이 없다면 결승까지는 무난히 직행할 것이고, 그 상대는 청풍이 될 것 같았다.
‘어디…… 실력 좀 보자.’
눈을 빛냄과 동시에, 비무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