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
#25화
“이곳은 저승인가?”
중년인이 깨어나자마자 한 말이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조그마한 뭔가가 튀어나와 중년인의 품에 안겼다.
눈가에 눈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꼬마가 외쳤다.
“공 숙부!”
“천아! 무사했구나. 그런데 이게 도대체……?”
혼란스러워하는 중년인에게 꼬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언덕 위에서 우리를 만났고, 내 손에 적들이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들은 중년인이 눈을 크게 떴다.
“본가의 인물이시오?”
“예. 맞습니다.”
“아, 하늘이 도왔구나!”
“…….”
내가 도운 거지, 이 양반아.
“난 분명히 산 밑으로 추락했는데……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소.”
“거의 그럴 뻔했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능선 밑을 가리켰다. 적으로 추정되는 시체 두 구가 나무에 머리를 박고 누워 있었다.
그가 미끄러졌던 경로에 풀숲이 무성하지 않았다면, 그도 저 꼴이 났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
중년인의 존재를 깨달은 건 퀘스트창 덕분이었다.
적들을 다 물리쳤는데도 [삭주 지부의 생존자]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생존자가 더 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이 사람 말고도 생존자가 더 있냐는 건데…….’
일말의 불안감은 지친 중년인을 부축한 순간 간단히 해소됐다.
띠링.
– [생존자]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연계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 공적치와 명성이 상승합니다!
* * *
“후우.”
중년인이 호흡을 토해 냈다. 짧은 운기조식이었지만 최소한의 기력을 회복한 듯, 훨씬 나아진 모습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은인께서 모두를 살리셨습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이제는 입만 열리면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한편으로는 틀린 말도 아니다. 어떻게든 퀘스트는 깨야 했으니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지.’
하지만 이런 내 태도에 산타클로스, 아니 생존자들은 적잖이 감격한 모양이었다.
“뛰어난 무공에 의협심까지. 이 공야청, 진심으로 탄복했소.”
“소천과 소율이 대협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덕분에 이름을 알았다. 중년인은 공야청, 어린 남매는 소천과 소율이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은인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소?”
“제 이름은…….”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거, 내 이름 들으면 칼 들고 달려드는 거 아냐?’
어떤 음모가 있었건 간에 이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건 다름 아닌 이 몸, 진태경이다. 터전과 가족을 잃은 두 사람이 내게 좋은 감정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한 시점이다.
“홍길동. 저는 홍길동이라고 합니다.”
“홍길동…… 처음 듣는 이름이오. 그러나 영웅의 풍모가 느껴지는구려.”
소천이 옆에서 거들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할 것 같은 이름입니다.”
……저 녀석이 어떻게 알았지?
나는 호부호형 얘기가 나오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았다.
말문을 연 것은 공야청이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소.”
전쟁을 알리는 전서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삭주 지부가 물 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였다. 항산검문이 고용한 낭인들이 사람들을 도륙하고, 건물을 불태웠다고 했다.
“그 숫자가 물경 일백에 달했소. 지부장과 휘하 무사들이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비밀 통로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요. 탈출한 이들 대부분이 무공을 모르는 여인과 아이들이었소.”
다른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시스템은 절대적이며 사실적이다. 퀘스트창이 알려 준 삭주 지부의 생존자는 세 사람이 전부였다.
“적들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낭인들이오.”
“낭인?”
“은인도 알다시피, 돈이라면 뭐든 하는 놈들이지. 그중에서도 특히 악질인 놈들이 항산검문의 의뢰를 받아 우리를 습격했소.”
“악질치고는 약하던데요.”
“악하고 선함에 강자와 약자가 따로 있겠소? 이번에 고용한 놈들은 널리고 널린 수준의 낭인이오. 다만 우두머리가 문제였지.”
공야청이 이를 악물었다.
“일문일살 조필. 그놈이었소. 지부장께서는 놈을 보자마자 패배를 직감하고 내게 식솔들을 부탁하셨지.”
소천의 작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제 손으로 직접 사지를 찢어 죽일 겁니다.”
꼬맹이치고는 남다른 어휘 선택이었지만, 뼈에 사무친 원한을 생각하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나는 소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내 도와주마.”
“정말이십니까?”
“남아일언중천금. 내 한 입으로 두말할 것 같으냐? 내 반드시 그놈을 잡아 레벨 업을…….”
“예?”
“아니, 놈을 죽여 원한을 갚아 주마.”
“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홍 대협!”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두 사람은 연신 감사를 표했다. 아, 뭔가 되게 야비한 놈이 된 기분이라 가슴 한구석이 심하게 찔려 온다.
‘아니지. 저쪽은 원수가 죽어서 좋고, 나는 레벨 업 해서 좋고. 상부상조지. 상부상조.’
애써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물었다.
“머릿수가 얼마나 됩니까?”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도중에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소. 조필을 포함해 서른 남짓이라고 하더군.”
“서른? 삼십 명이요?”
“그렇소. 그러니 어서 피해야…….”
공야청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 대신 저 멀리서 희미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띠링. 띠링. 띠링.
들린다. 레벨 업 하는 소리가. 로그아웃하는 소리가!
나는 자꾸만 치솟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여기서 나머지 놈들을 기다립시다.”
“기다린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일망타진! 그런 악독한 놈들을 살려 둘 수 없습니다!”
“아니, 홍 대협. 내 말을 좀…….”
“은인 같은 고수라면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인!”
소천이 눈물을 글썽이며 내 품에 달려들었다. 나는 두 팔 벌려 녀석을 끌어안았다.
“그래. 놈들을 다 죽이자!”
“죽이자!”
“조필 개새끼!”
“개새끼!”
그때 공야청이 입을 열었다.
“조필은 절정 고수요.”
“조필 씹새…… 예?”
“일문일살 조필. 산서성을 통틀어도 몇 안 되는 절정 고수란 말이오. 놈이 온갖 은원에 얽혀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소?”
“설마…….”
“그에게 덤비는 자는 다 죽었소. 조필은 그런 자요. 잔혹하고, 그만큼 강하지.”
“아.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어린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소천아.”
“예. 대협.”
“생각해 보니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예?”
“내가 어리석었다. 우선 너희 남매를 본가로 생환시키는 게 최우선인데. 그렇지?”
“…….”
“실은 아까 싸우다가 부상을 입기도 했고, 내 부하들도 많이 지쳐서 힘든 싸움이 될 듯싶다.”
소천의 눈동자가 내 위아래를 훑었다. 적들의 피로 흠뻑 젖어 있긴 했지만 찢어진 곳 하나 없이 멀쩡한 옷이다. 상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내상을 입었단다.”
“…….”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정찰조원들을 바라봤다. 칼 한 번 안 휘두르고 전투가 끝난 바람에 쌩쌩하다 못해 펄펄 날아다닌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지.”
“……대협.”
슬그머니 소천을 떼어 내고 외쳤다.
“본가로 돌아간다. 모두 출발 준비해!”
잽싸게 조원들에게 돌아가려는데, 소천의 손이 옷깃을 꽉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동그란 눈에는 눈물이 글썽하다.
“대협.”
“야, 빨리빨리 안 움직여! 소천아,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런데 이따 이야기하자. 알았지?”
“홍 대혀엽.”
“공야청 아저씨. 아니, 공 대협은 뭐 하세요. 한시가 급한데.”
“……소천아, 이리 오거라.”
공야청이 나를 병신 보듯이 바라보며 소천을 떼어 냈다. 저건 마치 범죄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보호자의 손길.
소천이 거의 통곡했다.
“홍길동 대혀업!”
그리고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오두막의 문이 박살 나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Lv.22 혁무진]“진태경 이 씨발 새끼야아아!”
쒸익쒸익. 혁무진의 분노에 찬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공야청과 소천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홍 대협?”
“홍길동 대협?”
“아. 그게. 그러니까.”
……에이, 시발.
* * *
“흠.”
조필은 물끄러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일그러진 표정에 부릅뜬 눈. 피와 눈으로 얼어붙은 그는 흑산도라는 별호로 불렸었다.
“쯧쯧. 이 친구,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제법 충성심이 깊고 똘똘한 놈이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은 몰랐다.
“그러게,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두 눈 크게 뜨고 다니라고.”
조필은 흑산도의 부릅뜬 눈을 잡고 벌렸다.
얼어붙은 살이 찢어지며 끔찍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찌직. 찌지직.
다른 이들은 숨도 못 쉬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과 말투였지만 그들은 조필이 분노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절정 고수가 뿜어내는 살기에 숨이 막히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럴 만도 하지.’
이십여 명이 전멸했다. 그것도 고작 삭주 지부의 잔당이나 처리하는 임무에.
일문일살. 마음에 드는 적을 만나면 꼭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죽인다는 괴악한 성격의 조필이다.
낭인들은 흑산도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었다면 한층 더 끔찍한 일을 겪었을 테니까.
“이제 좀 낫구먼.”
조필이 바지춤에 피를 닦아 내며 일어났다.
“그래,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가감 없이 말해 보게.”
“당연히 명령대로 움직여야지.”
한 사람이 나섰다. 단정한 복장과 점잖은 태도의 중년인, 그리고 그 뒤로 시립한 십여 명의 무사들은 항산검문이 낭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보낸 감시자이자 길잡이였다.
조필이 빙긋 웃었다.
“아, 그래. 우리 대항산검문의 당주님을 잊고 있었구려. 그런데 명령이라니?”
“삭주 지부를 지우고 본대와 합류하라. 소문주의 명령을 벌써 잊은 건가?”
“명령이라, 의뢰를 받은 기억은 있소만.”
“그게 그거 아닌가!”
중년인이 불쾌한 얼굴로 조필을 응시했다.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부터가 그대의 독단이었지. 한데 그 결과가 어떤가? 일개 지부 잔당 따위한테 스물이 넘는 수하들을 잃지 않았나!”
“그러니까 쫓아야지. 반나절이면 놈들을 끝장낼 수 있소.”
“정양까지는 모르나, 혼주까지 쫓는다면 역공당할 우려가 있지. 이 이상의 독단은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허락이라, 허락…….”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조필이 입을 열었다.
“안 되겠어. 마음에 안 드는군.”
“그게 뭐……!”
퍼걱. 목뼈가 으스러진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절명했다. 빛살 같은 속도로 중년인의 목을 꺾은 조필이 입술을 핥았다.
“나는 전쟁이 좋아. 누가 죽어도 잊히거든.”
“이노옴!”
상황을 파악한 항산검문의 무사들이 병장기를 빼 들었지만, 조필은 이미 그들 사이로 파고든 뒤였다.
퍼걱, 촤악!
눈밭 위로 더운 피가 쏟아졌다. 조필이 맹수처럼 날뛸 때마다 누군가의 목이, 팔이, 다리가 뜯겨 훨훨 날았다.
“끄아아…….”
이름 모를 무사의 신음이 마지막이다.
시체 더미 위, 짓눌린 침묵 속에서 조필이 말했다.
“놈들을 추격한다.”
이번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도망치듯 준비를 서두르는 수하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조필은 시신들을 바라봤다.
‘어떤 놈일까.’
그는 절정 고수다. 시신들의 몸에 남은 상흔과 족적을 통해 상대의 모습을 그려 낼 수 있었다.
단 한 사람. 뛰어난 실력의 창수(槍手)가 이 자리에 있었다. 다른 이십여 명을 도륙한 것도 바로 그자다.
‘흑산도를 일격에 죽인 놈이니 오죽할까.’
특히 가슴을 관통한 마지막 일격은…… 조필이 흥미를 갖기에 충분했다.
‘재미있는 싸움이 되겠어.’
누구일까. 태원진가의 고수?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조필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조만간 만나자고. 친구.”
* * *
“들어온 소식은?”
“없습니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수밖에는…….”
“젠장, 젠장!”
위팽은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수하의 말처럼 최대한 빨리 삼공자를 찾아 보호하는 수밖에는.
‘일문일살 조필…….’
놈의 악명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만일 삼공자가 놈의 손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죽음뿐이다.
‘그렇게 되면 주군을 볼 면목이 없다.’
진위경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그는 현재 태원진가의 머리이자 중심에 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동생과 수백의 식솔을 저울에 올려놨고, 장고 끝에 가장 믿는 수하인 위팽을 동생에게 보냈다.
그런데 만약 실패한다면…….
‘주군을 볼 면목이 없어.’
고삐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위팽은 박차를 가했다. 그의 뒤로 이십여 기의 기마가 꼬리를 물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