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3
#262화
전력을 다해 도착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시체, 핏물, 주인 잃은 팔과 다리…….
일 년 전 눈으로 담았던 소림사의 풍경이 아름다운 도원화라면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도다.
‘이런 미친 새끼들.’
양민과 무림인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여 댄 것이 분명하다.
소림사의 승려들과 맞붙어 싸우는 복면인들 너머로 붉은 수염의 늙은이가 보였다.
“화왕……!”
나는 늙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아는 놈입니까?”
“모른다.”
“아래에 깔린 스님은요?”
“굉천. 굉도의 막내 사제다. 못 본 사이 많이 컸군.”
“……그러게요.”
얼마나 많이 컸는지 칠순도 넘어 보이네.
순간 할 말을 잃은 그때, 늙은이의 타오르는 시선이 우리를 훑었다.
“네놈들뿐이냐?”
적천강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흐흐, 늙은이가 드디어 죽을 자리를 찾았구나.”
“아무리 대가리가 비었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죽을 자리가 아니라 죽일 자리니라. 그것도 네놈을 포함해서 전부.”
늙은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광오하군. 달라진 것이 없어.”
“달라진 게 없다? 노부와 마주친 적이 있느냐?”
“멀리서 한 번 보았지. 자웅을 겨루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었다.”
“이름이 뭐냐?”
“염호! 남만의 호랑이가 바로 이 몸이니라!”
“음양쌍귀? 잘됐군. 한 놈이 더 있을 테니 생포할 필요 없이 죽여도 괜찮겠어.”
적천강이 혀를 찼다.
“그나저나 억세게 운 좋은 놈이군. 삼도천을 눈앞에 두고 돌아섰으니.”
“과연 그럴까?”
늙은이, 염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동시에 바위처럼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주먹에 권강(拳强)이 맺힌다.
충분히 예상했지만, 저 늙은이도 초절정 고수였다. 심지어 우리와 같은 성질의 열양지기를 수련한.
“들은 것보다 훨씬 빨리 오긴 했지만……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지.”
들은 것보다?
순간, 염호가 어떻게 정보를 이토록 빨리 전달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전서구를 썼다고 해도 분명 우리가 더 빨랐을 텐데.’
그러나 의문은 이쯤에서 접어 둬야 했다. 염호가 굉천의 머리를 터트릴 듯이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온통 피 칠갑을 한 노승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쿨럭, 쿨럭.”
“이 중놈을 살리고 싶나?”
“…….”
적천강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염호와 우리의 거리는 삼십 여장. 아무리 적천강이라 한들 섣불리 나섰다간 굉천의 머리가 두부처럼 으스러질 것이 분명하다.
“당장 내려놓지 못할까.”
침착한 목소리 아래,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염호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법왕, 그 땡중과 친분이 두텁다고 들었는데 사실인 모양이로군. 그놈이 죽으면서 사제를 부탁하던가?”
“굉도는 누구보다 현명한 고승(高僧)이었다. 네놈의 더러운 주둥이에 오를 만한 이름이 아니야.”
“그래 봤자 이미 뒈진 놈이지. 지금쯤 삼도천을 건너고 있으려나?”
침잠한 눈빛으로 염호를 응시하던 적천강이 입술을 뗐다.
“계속해 보아라.”
“뭐라?”
“계속하란 말이다. 그 정도로 노부를 흔들 수 있을 것 같더냐?”
“이, 이 빌어먹을 노괴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염호가 굉천의 머리를 흔들었다.
“이 중놈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냐!”
“상관없다.”
“뭐, 뭐?”
“그를 구하지 못하는 건 애석한 일이지만, 굉도가 노부에게 부탁한 것은 사제가 아니라 소림이었다.”
츠츠츠츠!
그 순간, 적천강의 손아귀에 막대한 공력이 모여들었다. 빠르게 형체를 갖춘 그것은 화살처럼 쏘아졌다.
염호가 아닌,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던 복면인들에게.
콰아아아아!
적천강의 손에서 뿜어진 가공할 공력의 집약체는 정확히 놈들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마치 굶주린 화룡처럼 날뛰며 스치고 닿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고 태웠다.
화르르륵!
복면 위로 드러난 놈들의 무감각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바로 공포와 고통이었다.
“끄아아아!”
“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불길이 치솟는다.
활활 불타는 몸으로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놈들이 수십여 명. 이미 숨이 끊긴 놈들 또한 수십 명에 달했다.
그 광경에 멈칫한 복면인들의 전신으로 승려들의 계도와 선장이 날아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악적들을 몰아내라!”
쉬쉬쉬쉭! 서걱!
열세에 몰려 있던 상황을 단숨에 뒤집어 버린 적천강이 서늘한 눈빛으로 염호를 노려봤다.
“죽일 거면 죽이고, 아니면 곱게 내려놔라. 곰 같은 새끼가 어쭙잖게 여우 흉내 내지 말고.”
“이, 이런 개 같은 늙은이가!”
쐐애애액!
염호는 끝까지 여우 흉내를 냈다. 우리를 향해 굉천을 집어던짐과 동시에 그 뒤에 바짝 붙어 쇄도한 것이다.
굉천의 몸을 방패 삼아 허점을 노리겠다는 의도가 빤히 읽혔다.
– 네가 굉천을 맡아라.
귓가를 파고드는 한 줄기 전음.
나와 적천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을 박찼다. 서로를 향해 쏘아지는 네 개의 신형.
나는 굉천의 몸을 받아 들었고, 적천강은 굉천을 뛰어넘으며 그 뒤에 숨은 여우, 아니 곰을 공격했다.
꽈아아앙!
무시무시한 격돌과 함께 휘몰아친 풍압에 몸을 맡겼다.
그대로 이십여 장을 미끄러진 나는 근처 풀숲에 굉천을 눕혔다. 그리고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두 초절정 고수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물론 허허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을 염호가 아니었다.
“놈!”
쉬리리릭, 퍽!
통나무처럼 두꺼운 발을 막아 낸 무릎이 찌르르 울린다.
하지만 그뿐이다.
초절정과 절정. 그것은 어떤 행운이 따르더라도 메울 수 없는 간격이었지만 내게는 행운이 아닌 천운이 따른다.
시스템이라는 천운이.
‘상대할 만해.’
일 대 일이라면 무리지만 염호는 적천강을 상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다.
이 늙은이의 유일한 실수는 나라는 존재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에 있었다.
“틀니 넉 달 압수.”
씩 웃는 내 얼굴에 염호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이 새파란 애새끼가!”
“이 샛노란 늙은이가!”
“크아아악!”
적천강을 떨쳐 낸 염호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네놈부터 죽여 주마!”
쐐애애애액!
강맹하기 이를 데 없는 일 권. 권강이 맺힌 공격을 맨몸으로 맞았다가는 나도 무사할 수 없다.
한 걸음 물러서며 등에 멘 백염을 잡고 휘둘렀다.
쾅!
굉음과 함께 주먹이 멈췄다. 염호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만년한철?”
“역시 무기는 비싼 게 최고야. 안 그렇습니까, 노야?”
적천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청백색으로 물든 그의 일 권이 염호를 향해 날아드는 중이었다.
꽈앙!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정확히 맞닿은 두 개의 주먹, 하지만 한 사람의 주먹은 뼈마디가 으스러지고 새카맣게 그을렸다.
염호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어떻게?”
“열양지기를 익혔다고 다 같은 줄 알았더냐?”
무심한 목소리. 그러나 적천강의 눈동자에는 용암이 깃들어 있다.
염호라는 불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가 그의 전신에서 뻗어 나와 사방을 짓눌렀다.
염호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화왕…….”
“그래. 노부가 바로 열화문의 십팔 대 계승자, 화왕 적천강이니라.”
“이건 말도…… 쿨럭!”
나는 핏물을 토해 내며 도망치려는 염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 딜도 망가.”
콰직!
힘차게 내리찍은 발이 놈의 발등을 부수며 땅 깊숙이 파고든다. 염호의 잇새로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핏물이 튀었다.
다음 순간, 상반신을 휘청거리는 그의 복부에 파고드는 두 줄기의 섬광이 있었다.
쐐애애액!
경지의 차이만큼 위력도 다르지만, 무공의 이름은 같다.
‘멸염신권(滅炎神拳).’
퍼억!
철갑처럼 전신을 두르고 있던 호신강기가 깨어져 나갔다. 쩍 벌린 염호의 아가리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쿠에에엑!”
같은 초절정 고수지만 그 차이는 컸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채 숨을 헐떡이는 염호를, 적천강이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네놈의 운도 여기까지다.”
“쿨럭. 자, 잠깐만 기다려라.”
“그럴 이유도, 시간도 없다.”
“내가 모두 말해 주겠다! 그, 그렇지! 암천! 암천에 대한 모든 것을…….”
“노부가 말하지 않았더냐. 여우 흉내 내지 말라고.”
쉬이익, 퍽!
적천강의 손속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가 사라진 염호의 신형이 휘청이더니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나는 얼굴에 튄 피를 슥 닦아 내며 말했다.
“살려 두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곰처럼 우둔한 놈에게는 중요한 비밀을 알려 주지 않는 법이다.”
“그래도…….”
“곰은 죽었으니 이제 여우를 잡아야지.”
적천강은 뜻 모를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백여 장 떨어진 곳에서 한 노인이 우뚝 굳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녹색 빛이 감도는 짧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녹옥불장!”
“음귀(陰鬼) 한수. 다음은 저놈이다.”
다음 순간,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한수의 신형이 눈부신 속도로 쏘아졌다.
* * *
쉬이이익!
한수는 전력을 다해 신법을 발휘했다. 등 뒤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까워지는 두 개의 기운이 느껴졌다.
‘빌어먹을!’
첫눈에 알아봤다. 화왕 적천강.
하필이면 십왕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는다는 괴물이 이토록 빨리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데 다른 젊은 놈은 누구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그 어린놈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과 대등한 무위를 지닌 염호가 놈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머저리 같은 놈. 벽력도왕도 아니고 화왕에게 덤비다니.’
그와는 정마대전 당시 처음 만나 수십여 년을 함께 했지만, 도원결의를 맺은 의형제는 아니다. 한수는 한날한시에 염호와 함께 죽을 생각은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임무는 완수했다. 손에 들린 녹옥불장이 바로 그 증거다. 정해진 장소로 가서 ‘그’와 접선한다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화왕조차 당해 낼 수 없을 고수니까.
‘이보게 염호.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 자네의 원수를 갚아 주지.’
녹옥불장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 그때, 한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저 멀리 가까워지는 또 다른 기운. 이번에는 뒤가 아니라 앞이다.
처음에는 정파 무림 놈들의 지원군인가 싶었지만, 이번에 느껴진 기운은 고작 하나였다. 기세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일이 꼬이는군.’
잠깐이라도 발목이 잡힌다면 화왕에게 붙잡힐 수도 있는 상황.
입술을 질끈 깨문 한수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풀숲을 돌파한 그 순간이었다.
“아!”
외마디 탄성, 환희로 물든 얼굴.
그 어떤 감정도 죽음 끝에서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한수가 기쁨에 찬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혈주(血主)!”
* * *
나와 적천강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허겁지겁 달아나던 도망자에서 기세등등한 포식자로 발돋움한 한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놈들이오! 화왕, 저 쳐 죽일 늙은이와 어린놈이 염호를 죽였소!”
아니, 한수는 포식자가 아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호랑이의 기세를 등에 업은 여우일 뿐이다.
진정한 포식자는 한수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저놈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서 이상했고, 그렇기에 더욱 위험해 보이는 놈.
그러나 적천강은 달랐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넌 누구냐?”
“당신의 원수.”
청년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가장 소중한 벗을 죽인 원수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