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6
#265화
분명히,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다.
설령 완전히 숨이 끊기지 않았더라도 더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상태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스르륵. 우두둑!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손이라도 닿으면 바스러질 듯 까맣게 타들어 갔던 피부가 뽀얀 속살로 뒤덮이고, 튀어나와 있던 뼈들은 제자리를 찾아 모습을 감췄다.
‘이게 무슨.’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회복? 아니다. 이건 재생이다.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마치 몬스터 같은 재생력.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청풍이 외마디 탄식을 토해 냈다.
“아, 아아…….”
그사이 마지막 변화가 끝났다. 근육까지 드러났던 안면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우득. 목뼈를 어루만진 놈이 우리를 향해 히죽 웃었다.
“머리를 부쉈어야지. 확실하게.”
석상처럼 굳어 있던 적천강이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어떻게?”
혈주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우선은 마공(魔功)이라고 해 둘까. 어차피 너희 같은 정파 놈들한테는 다 똑같잖아?”
“네, 네놈은……. 쿨럭.”
“노야!”
나는 깜짝 놀라 적천강을 부축했다. 하얗게 질린 안색, 붉은 핏물이 그의 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틀렸다. 적천강은 이미 모든 힘을 소진했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펼친 화신귀무조차 허사로 돌아가 버린 지금, 내 품에 안겨 있는 것은 화왕이 아니라 지친 노인일 뿐이다.
“어, 어서 도망…….”
적천강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황급히 맥을 짚어 보니 희미하긴 하지만 여전히 뛰고 있다.
‘아직은 괜찮아.’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에는 너무 일렀다.
“보아하니 천하의 화왕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혈주가 즐거운 표정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오싹하기까지 했어. 이런 상황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똥내 난다. 아가리 닥쳐.”
나는 잠시 내려놨던 백염을 말아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적천강은 이미 전투 불능이다. 여기서 더 힘을 소모한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혼자서 날 막겠다? 기특한 생각을 했군.”
“눈깔 하나는 엿 바꿔 먹었냐? 둘이다.”
혈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야. 난 겁에 질린 쥐새끼는 사람으로 안 치거든.”
겁에 질린 쥐새끼라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어붙어 있는 청풍이 보였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동공. 검 자루를 쥐고 있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그것이 지금의 청풍에게서 느껴지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아직 젖비린내도 안 가신 애송이를 강호에 내보내다니. 검성이 제자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군.”
저벅.
아직 오십 보 이상 떨어진 거리. 그러나 혈주가 한 걸음을 내딛자 청풍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이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똑똑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경험하고 수많은 이들이 걸어간 그 길을, 지금의 청풍은 뒤늦게 걷고 있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무인이라면, 헌터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이지만 눈앞의 천재에게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
내 얼굴에 떠오른 생각을 읽은 혈주가 씩 웃었다.
“너도 알지? 이미 저놈은 글렀어. 난생처음 느껴 보는 무력감, 죽음에 대한 공포. 그런 것들에 한 번 사로잡히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지.”
“……종리추.”
틀림없다. 종리추와의 비무 때문이다.
바로 그가 청풍에게 두려움이라는 씨앗을 심은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혈주라는 또 다른 강자를 만나 싹을 틔웠다.
“그래. 당최 어디서 온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큰일을 했어. 덕분에 정파 놈들 이목도 끌고, 검성의 제자까지 쓱싹. 하하!”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꺼끌거렸다.
청풍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고, 혈주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시시각각 거리를 좁히고 있다.
‘빌어먹을.’
다행히도 내게는 최후의 한 수가 남아 있다. 문제는 정말 ‘최후의’ 한 수라는 거다.
성공해도 결과는 장담할 수 없고, 실패한다면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나는 이제 일 할도 채 남지 않은 공력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일섬, 모든 힘을 쏟아부은 일격으로 놈의 머리를 부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은 곱게 접어 태워 버렸다.
‘해내야 한다. 어떻게든.’
의문보다는 확신을. 확신보다는 필사의 의지로 움직여야 한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생길 테니까.
“청 소협.”
따닥. 따다닥.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청풍의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라는 것을. 나는 힘껏 외쳤다.
“청풍!”
헉, 하고 헛숨을 토해 낸 청풍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번 말 안 한다. 똑똑히 듣고 직접 결정해.”
“예, 예?”
“당신한테 남은 선택은 두 가지야. 첫째, 노야를 업고 최대한 멀리 도망친다.”
“으, 은인!”
“아직 말 안 끝났어. 둘째, 겁쟁이 새끼처럼 벌벌 떠는 건 집어치우고, 나와 함께 죽을힘을 다해 저놈과 싸운다.”
“……!”
파르르 떨리는 청풍의 숨결에서 격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몇 걸음 물러섰던 그의 발걸음이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저벅. 우리는 혼절한 적천강의 앞에 나란히 섰다.
“대답. 아직 못 들었다.”
“이게 제 대답이에요.”
“솔직하게.”
“무서워요, 은인.”
“시벌, 더럽게 솔직하네.”
“하지만 진짜 무서운걸요.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일 정도로.”
나는 느릿느릿 다가오는 혈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도망치지 왜?”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여기서 도망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요.”
그 후회. 뭔지 안다.
나는 힐끗 청풍을 바라봤다. 여전히 겁에 질린 채로 손을 떨고 있지만, 앞으로 나선 발걸음은 굳건하다. 깊게 뿌리내린 채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이었다.
“후회? 도망쳐?”
이십 보 앞. 걸음을 멈춘 혈주가 대단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풋내기들이 맹랑한 말을 지껄이는구나.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게 강자의 권리고 약자의 필연이다.”
“뭐, 일부분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창을 들어 놈을 겨눴다. 백염의 투명한 창날이 햇빛 아래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왜 하나 같이 좆 같을까.”
“진실은 불편한 법이거든. 약자에게는 더더욱.”
“안 되겠다. 환자분 아가리 벌리세요. 포경수술 시작합니다. 창으로 마취 없이 하는 거라 좀 아플 거예요.”
“푸하핫!”
“웃어? 넌 안 그럴 것 같지? 근데 세상 사는 게 다 그렇더라고. 엄마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놈의 입가에 서린 웃음이 짙어졌다.
“산서잠룡.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놈이란 말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한 무공에 기백도 있고……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
“내 밑으로 들어와라. 화왕을 살려 줄 수도 있다.”
“좆이나 까 잡수십쇼. 너 같은 새끼랑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상종할 일 없으니까.”
“누가 그런 말을 했었지.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인연. 세 번째 만남은 운명이라고.”
“시벌놈이 연애소설 쓰고 자빠졌네.”
혈주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글쎄. 남녀관계는 아니지만, 이 드넓은 천하에서 두 번이나 마주쳤다면 인연 정도는 되지 않을까?”
“두 번?”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자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너, 혹시 성라대연에서 나 본 적 있냐?”
“아무렴. 봤지.”
장난기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이어졌다.
“팔천협에서.”
“……뭐?”
“장관이더군. 시체가 산이 되고,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네가 진백양의 목숨을 거두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아마 그때부터 산서잠룡이라고 불렸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화양검 진백양. 병신 같은 놈이었어. 처음에는 간이며 쓸개며 다 빼 줄 듯이 굴던 자가, 늙을수록 같잖은 회의감이 들었는지 일을 망쳐 버렸지. 어떤 무능한 놈이 그런 어설픈 놈을 포섭했는지. 쯧쯧.”
나는 혀를 차는 혈주를 멍하니 바라봤다. 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모두 공허하고 낯설게 들렸다.
“아, 항산검문인가 하는 그 삼류 문파는 아직 남아 있나? 아랫놈에게 문주의 아들놈 하나를 죽였다는 보고를 듣긴 했는데. 팔천협 이후로는 영 관심이 안 생겨서 말이야.”
“……!”
번개에 관통당한 것처럼 한 줄기 전율이 척추를 타고 찌르르 울렸다.
“그럼, 네가?”
“말했잖나.”
혈주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인연. 세 번은 운명이라고. 어때, 우리 정도면 인연이 아닐까?”
순간 숨이 막혔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저놈이, 바로 그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니.
내 표정을 본 혈주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표정이 왜 그래? 덕분에 술술 풀렸잖아. 태원진가는 산서 제일가. 자네도 화왕의 제자가 되어 성라대연의 우승까지 거머쥐었으니 내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명이 죽었더라.’
모르겠다. 천? 이천?
아무 의미도 없는 대전쟁에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완전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병기를 휘두른 무인, 아무런 연관도 없는 양민이 죽었고 그 이상의 전쟁고아가 생겨났다.
산서 무림이 휘청이자 고원의 마적들이 발호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은 역사가 반복되었다.
‘그런데 감사 인사라.’
나는 푸석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창대를 잡은 손아귀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지쳐 있던 몸에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었다. 시스템 창에는 표시되지 않는 능력치.
바로 분노다.
“야.”
“응?”
“한 번은 우연. 두 번은 인연. 어쩌구 하는 그 개소리 말인데.”
크게 심호흡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서 불덩이가 쏟아질 것 같았다.
“너랑 나는 경우가 다르다. 그냥 다 건너뛰고 운명으로 하자.”
“운명?”
“어. 둘 중에 하나 뒈지는 운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지면을 박찼다. 단숨에 거리가 지워지고 웃음기 서린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일섬.’
고오옹.
창날이 공간을 갈랐다.
* * *
콰직!
“크아아악!”
팔이 부러지고 하얀 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왔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극통에 청년은 비명을 질렀다. 솟구친 피가 주인의 얼굴에 튀었다.
역한 혈향을 맡자 욕지기가 치민다. 순간 헛구역질을 하기 위해 허리를 숙인 청년의 복부를, 두꺼운 다리가 후려쳤다.
퍽. 콰과광!
“병신 같은 놈. 너 같은 얼뜨기를 제자로 둔 검성이 불쌍하다.”
나가떨어진 청년, 청풍은 힘겹게 몸을 뒤집었다.
아프다. 쓰러지고 싶다. 전신이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고 깊은 절망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몸이, 몸이 말을 안 들어.’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은 그의 시야에 넓게 펼쳐진 하늘이 들어왔다.
화산 연화봉에서 보는 하늘은 언제나 맑고 아름다웠다.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별이 빛났고 노루며 토끼가 힘차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곳의 하늘은 왜 이렇게 붉을까.’
이곳의 하늘은 달랐다. 붉고, 암울했다.
눈을 깜빡이던 청풍은 눈동자의 실핏줄이 터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핏줄이 터져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놀라지 않았다.
‘이미 뼈도 처음 부러졌고, 피도 많이 흘렸는걸.’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자 저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져 왔다.
드러누운 채 헐떡거리는 청풍의 귓가에 섬뜩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쉭, 콰직!
“커헉!”
“이 새끼가!”
청풍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기울여진 시야에 혈투를 벌이고 있는 두 인영이 비쳤다.
아니, 그건 더이상 싸움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퍽! 퍽! 퍽!
“흐읍!”
“이래도 안 죽는단 말이냐? 이래도?”
퍼버벅! 우당탕!
코뼈가 주저앉는다. 발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돌아갔다.
한 번, 세 번, 열 번…….
그러나 어떤 부상을 입어도,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난다.
백 번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풍이 아는 청년은 그런 사람이니까.
‘은인.’
희망과는 달리 현실은 냉정했다.
승부는 금방 갈렸다.
어떤 무공인지는 모르겠으나 진태경의 일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력했다. 검강이 주입된 혈주의 적도(赤刀)를 부수고 그의 몸에 타격을 입혔으니까.
하지만 불과 촌각 만에 혈주는 몸을 회복시켰고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미친놈…… 천하의 독종이 따로 없군.”
이제 모든 것이 끝나려 한다.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젓는 혈주 역시 전신이 피범벅이었다.
처음과 달리 그는 상처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웃음도 사라진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지면 깊숙이 박힌 진태경의 창을 뽑아 들었다.
“훅, 후욱, 오냐. 죽여 주마.”
죽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청풍의 손바닥이 땅을 짚었다. 부러진 팔과 다리에서 나오는 고통도, 혈향도 옅어지는 듯했다.
그저 붕 뜨는 듯한 감각만이 전신을 지배했다.
‘이게 뭐지?’
알 수 없다. 비틀거리는 그의 발걸음 끝에 혈주가 있었다.
“허, 이건 또 뭐야. 네놈도 죽고 싶으냐?”
광포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혈주의 등 뒤에 쓰러져 있는 진태경을 보자 서서히 떨림이 잦아들었다.
“은인, 은인.”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기가 찬 헛웃음을 토해 낸 혈주가 창을 휘둘렀다.
촤아악!
비틀거리며 몸을 비튼 청풍의 앞가슴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아프다.’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지도 않았다. 이미 힘을 잃은 손아귀에서는 검 자루가 미끄러진 지 오래다.
“뭐 이런.”
황당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혈주가 억센 손으로 청풍의 목을 움켜쥐었다.
“커헉!”
“뭐냐? 왜 이렇게까지 먼저 죽지 못해서 지랄들인 거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목소리.
청풍은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입을 열었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러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그게 이유냐? 너 같은 겁쟁이 새끼가 물러서지 않는 같잖은 이유?”
살기가 한층 광포해졌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어쩐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연화봉에서 지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청풍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헤헤. 네.”
혈주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웃었다. 자신을 앞에 두고 웃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유언, 잘 들었다.”
청풍의 가슴을 향해 창날을 밀어 넣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껍질을 깼구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풍이 기억하는 화산의 푸른 하늘과 꼭 닮은 목소리.
이제야 알 것 같은 그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