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69
#268화
법왕 굉도의 죽음. 그리고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에서 벌어진 의문의 혈겁(血劫).
달리는 말보다 빠른 것이 사람들의 목소리다.
수많은 목격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다.
“다들 그 소식 들었나? 성라대연에서…….”
“무림인들이 숭산을 에워싸고 있네. 소림사에서 혈겁이 벌어졌다더군.”
성라대연을 맞이하여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던 하남성은 발칵 뒤집혔다.
노인은 수십여 년 전 천하를 휩쓸었던 마교의 준동을 떠올렸고, 젊은이는 케케묵은 과거라 취급했던 전쟁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교가 나타나다니, 큰일이야. 큰일.”
“일설에 의하면 마교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 저지른 짓이라던데?”
“그런 짓을 저지를 만한 놈들이 마교 말고도 또 있단 말인가?”
“정확한 사실까지는 나도 잘 몰라. 그냥 오다가다 들었네.”
“그럴 리가. 이번에 소림을 습격한 흉수들의 우두머리가 그 무시무시한 음양쌍괴(陰陽雙怪)라던데.”
“음양쌍괴? 나는 마교주인 천마(天魔)가 직접 나섰다고 들었네만.”
“처, 천마?”
여러 가지 말들이 쌓이고 쌓이니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사실과 거짓 속에서 혼란을 겪던 사람들의 이목이 한 곳을 향해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맹의 옛터.
정파 무림의 크고 작은 기둥들이 위치한 그곳으로.
* * *
“이야기 들었습니다. 종리추, 아니 검성 매종학 대협에 관해서요.”
“…….”
“힘내십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
“저도 이번에 완전히 알거지, 휴우……. 여하간 그렇게 됐는데. 조장님 소식 듣고 힘이 솟더라고요.”
“왜?”
“예?”
“왜 힘이 솟냐고.”
“그거야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옛 성현들이 말씀하시길, 아픔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고…….”
퍽!
“흐억.”
정확히 명치를 가격당한 혁무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였다.
훤히 드러난 뒤통수를 보자 저절로 손이 간다. 손이 가.
빡!
“힘이 솟구치냐? 어?”
“자, 잠시만요. 명치 맞았어요. 명치.”
“저는요. 니 새끼 때문에 혈압이 솟구쳐요. 피가 거꾸로 솟아요!”
빡빡빡!
폭풍처럼 뒤통수를 후려치고 나자 속이 좀 풀린다.
이 자식은 가뜩이나 심란한데 사람을 건드리고 난리야.
“지금 분위기 심각하니까 말조심해라. 응?”
혁무진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너무 심각해 보여서 풀어 드리려고 한 건데.”
“그냥 조용히 있어, 인마.”
“……옙.”
혁무진을 침묵시킨 나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봤다.
정신없이 사방을 오고 가는 무인들과 누구 하나 티 내는 사람이 없는데도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그러나 그 와중에도 하늘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힘 빠진 혁무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뭐가.”
“그냥. 다 실감이 안 나요.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나도 그래.”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전날 있었던 모든 일이 무엇 하나 실감 나지 않았다. 전부 꿈처럼 느껴질 만큼.
마지막 숨을 내쉬던 굉도와 피로 물든 소림사의 광경이 눈앞을 스치고 음양쌍괴와 혈주, 검성 매종학의 등장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문제는 이게 프롤로그라는 거지.’
영화관이었다면 슬슬 엔딩 크레딧이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은 타이밍. 하지만 이건 불길한 전조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가 예감하는 왠지 모를 위기감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뭔가가 바뀌고 있다.’
작금의 천하는 이미 거대한 화약고로 변해 버렸다. 도화선을 쥔 것은 정파 무림이지만 암천의 손에는 부싯돌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이 모든 일의 결말은 아직 모르겠지만 과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겠지.’
산서성 때와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나도 내심 짐작하고 있는 것을 수뇌부가 모를 리 없다.
정파 무림의 수뇌부는 이미 이번 사건의 사태 수습과 회의에 여념이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까 조장님도 어제 회의 참석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태원 진가도 엄연한 산서성의 패자다.
특히나 산서성은 암천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곳이니 수뇌부들의 지대한 관심이 몰린 것은 당연했다.
“뭐랍니까?”
“대장로와 적풍단에 관해서 묻더라고. 아는 선에서 다 대답해 줬지.”
“대장로는 그렇다 치고 적풍단이요?”
“적풍단주 풍양이 썼던 잠력단(暫力丹)이 암천과 연관이 있으니까.”
“아.”
혁무진도 이제는 가문의 고위 관계자라 어느 정도의 사정은 알고 있다. 잠력단과 암천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그냥 나왔어. 어차피 중요한 소식은 큰형님이 듣고 전해 줄 테고…….”
입술 사이로 나도 모르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야를 계속 혼자 놔두기에는 불안해서.”
창밖을 바라보던 시선이 저절로 한 사람을 향했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침상에 누워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
주름진 손을 잡자 맥박이 느껴지고 작게나마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에선 호흡이 느껴졌지만, 그는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언제쯤 깨어나실까요?”
“그걸 정확히 모르는 게 문제지.”
“그 누구더라, 명의로 이름이 자자한 의원 하나가 다녀가지 않았습니까?”
“자기도 손쓸 방법이 없대.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까 우선은 지켜보자고 하더라고.”
화신귀무(火神鬼武). 열화문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신공.
천 명의 무인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녔지만, 모든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이미 백 세를 훌쩍 넘은 노인에게는 그 여파를 감당할 체력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렸다.
부정적인 생각은 접어 두자.
검성도, 의원도 분명히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적천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내가 자리 비우는 동안 수상쩍은 놈은 없었지?”
무림맹 내부에서 소림사 방장이 암살당했다. 누구도 안전하다 할 수 없었다. 적천강이 혈주로부터 나를 지켰듯이, 나도 그를 지켜야 한다.
혁무진이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룡대(進龍隊)가 전각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진룡대? 태원 진가의 최정예라는 거기?”
“예. 소가주님께서도 적 대협의 안위를 걱정하셔서 저를 붙이셨습니다. 제가 누굽니까? 진룡대의 부대주, 혁무진 아닙니까?”
“어…….”
나는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혁무진의 표정이 대번에 떨떠름해졌다.
“뭡니까, 방금 그 반응은?”
“아무것도 아냐. 그냥 앞으로는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마 지금 본가 최정예인 진룡대의 실력을 못 믿으시는 겁니까?”
“어허. 아니라니까. 그냥 넘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혁무진이 벌떡 일어났다.
“됐습니다. 그냥 소가주님께 보고드리고 철수시키겠습니다.”
“에헤이, 말을 왜 또 그렇게 하냐. 요즘 사춘기야?”
“조장님이 너무 섭섭하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이게 한두 번이에요? 예?!”
“목소리 줄여. 노야 깨신다.”
“깨면 좋죠.”
“…….”
그건 그러네.
내가 순간 할 말을 잃은 사이 혁무진이 문을 향해 걸음을 뗐다.
한눈에 봐도 붙잡아 주길 바라는 액션이다. 이럴 때는 또 기대에 부합해 줘야지.
“야, 어디 가!”
혁무진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됐습니다. 다른 건 다 참아도, 제가 아끼는 수하들까지 무시하는 발언은 참을 수 없습니다!”
“헉.”
“또 왜요?”
“네 주둥이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어서. 무진이 다 컸네. 넌 입에 포경 수술 안 받아도 되겠다.”
“……저 진짜 갑니다.”
“알았어, 알았어. 앉아. 진정하고 여기 물 한잔해.”
“흥. 싫습니다.”
“허허. 우리 무진이 진짜 많이 컸네. 두 번 말하게 만들고.”
“……!”
멈칫한 혁무진이 슬그머니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래도 사과는 받아야겠습니다.”
“응? 무슨 사과?”
“제 수하들 무시하셨던 거요.”
“내가 왜? 난 걔들 무시한 적 없어.”
“조금 전에는 못 믿으시겠다면서요. 지금 조장님보다 무공 약하다고 무시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차갑게 식은 차를 호로록 들이켰다.
“뭐, 우리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도 아닌데 그 동네랑 수준 차이는 당연히 나지. 그런데 진룡대 애들, 하나같이 젊고 재능도 뛰어나다며? 어제는 뛰어난 활약도 보였고. 무명을 구한 것도 진룡대 아냐?”
소림사는 거목이다. 어제 사건으로 법왕이라는 큰 가지와 수많은 열매를 떨궈야 했지만 뿌리는 남아 있었다.
소림의 무공. 그리고 살아남은 무명의 존재가 그것이었다.
아, 굉천이라는 노승도 살았다고 했었나?
“맞습니다. 암천 놈들과도 물러섬 없이 싸웠고요.”
혁무진이 자부심에 가득 찬 얼굴로 가슴을 쭉 폈다.
“그래. 그럼 된 거지. 보니까 애들도 똘똘해 보이더만. 가문에 대한 충성심도 깊고. 근데 딱 하나가 문제야.”
“그게 뭔데요?”
“부대주가 너라는 거.”
“…….”
“수하들은 아래에서 꼿꼿이 서서 근무하는데, 부대주라는 놈이 여기서 노가리를 까?”
“그, 그건…….”
“수하들 아낀다며? 자랑스럽다며?”
“사실입니다! 제가 얼마나 저 녀석들을 아끼는데…….”
주춤했던 혁무진이 정신을 차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술술 쏟아 냈다.
“그리고 제가 이번에 맡은 임무는 적 대협과 조장님의 곁을 지키는 겁니다.”
“그전에는?”
“예?”
“그전에 맡은 임무는 뭐였냐고.”
“그거야 당연히 소가주님 경호죠.”
“그래?”
나는 허허 웃으며 품에서 ‘그것’을 꺼내 탁자 위로 던졌다.
떨그럭.
금속음과 함께 누렇게 번쩍이는 금가면을 목격한 녀석이 헛숨을 들이켰다.
“헉! 이, 이걸 어디서…….”
“어디서긴. 어쩐지, 네가 그럴 놈이 아닌데 예선 끝나고 징글맞게 달라붙더라.”
“잠시만요. 오해십니다. 저는 진짜로 경호를 맡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
“오해? 오해 좋지. 앞으로 눈코 뜰일 없게 해 줘?”
콰드득.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한 금가면이 작은 공처럼 쪼그라든다. 혁무진의 눈동자가 지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경호를 도박장에서 하냐, 이 자식아? 하도 유명해서 알아볼 필요도 없더라. 웬 놈이 한 번에 은자 십만 냥 따고 바로 십만 냥 잃었다고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취급받더만.”
지금처럼 심각한 분위기에서도 내 귀에 들릴 정도니 말 다 했다.
무림맹에서 일하는 하인 중 한 명은 토토, 아니 도도로 대박이 터졌는지 총관 싸대기를 갈기고 떠났다는 썰까지 들었다.
“그렇게 수하를 아꼈으면 회비 걷어서 돈 걸었겠지. 그걸 배당률 떨어질까 봐 혼자 날름 처먹어?”
“…….”
묵묵부답.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창백한 얼굴로 굳어 있던 혁무진이 간신히 입을 뗐다.
“원래 인생은…… 한 방입니다.”
“…….”
이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네.
어이없는 눈빛으로 혁무진을 바라보던 내가 주먹을 치켜든 그 순간이었다.
스윽, 탁.
이렇다 할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마치 마법처럼 십여 장의 높이를 올라 창문에 내려앉은 청년, 아니 노인이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친구?”
친구는 무슨.
나는 검성 매종학을 보며 내심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