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7
#26화
“그러니까……”
공야청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바로 그 진태경 공자셨구려.”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세 번째로 기절한 혁무진의 멱살을 놓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 제가 바로 그 진태경입니다.”
야영 준비를 하고 있던 순찰조원들의 귀가 쫑긋거린다. 지금 우리는 가문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전투가 벌어진 오두막으로부터 다섯 시간을 넘게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이동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공야청이 이제야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저 새끼만 아니었어도.’
나는 눈치 빠른 순찰조원에 의해 질질 끌려가는 혁무진을 노려보았다. 한 대만 더 때리고 놔줄걸.
아쉬워하는 내게 공야청이 말했다.
“공자의 소문은 익히 들었소.”
“……그러시군요.”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공자를 알 거요. 아마 본가 최고의 유명 인사겠지.”
이쯤 되면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다.
“천성이 게으르고 오만방자하다. 주색에 빠져 무공도 익히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려. 오늘 공자가 보여 준 무위는 실로 대단했소.”
“…….”
강호의 소문들을 모은 강호일보, 뭐 이런 게 있다면 바로 구독 신청을 하고 싶다. 제법 신빙성이 있는데 그래.
‘그보다…….’
공야청 이 사람, 설마 모르고 있나?
항산검문 놈들이 어떤 개수작을 부렸든 간에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공야청과 소천이 내게 원한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이름을 숨긴 거였고.
‘모른다면 다행이지.’
잔인무도한 절정 고수에게 쫓기는 상황이다. 괜한 분란은 사양이다.
“본가까지 얼마나 걸리겠소?”
공야청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이틀에서 사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필 이럴 때 눈이라니…….”
공야청이 한탄했다. 아직도 눈을 펑펑 쏟아 내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공자,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겠소.”
“최악의 상황이요?”
폭설에 발이 묶이긴 했지만 그건 적들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놈들이 추격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나 공야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낭인을 우습게 보지 마시오. 내력의 정순함과 익힌 무공의 수준은 떨어질지 모르나 놈들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따로 있소.”
나는 정답을 말했다.
“경험.”
“맞소. 백전(百戰)을 치르며 얻은 경험. 우리를 쫓는 건 무인이 아니라 낭인이오. 같지만 아주 다른 존재지.”
같지만 다른 존재.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요컨대 놈들은 잘 훈련된 사냥개라는 뜻이다. 그 목줄을 쥔 자가 일문일살 조필이다.
“조필이 진정 두려운 이유는 놈이 절정 고수이기 때문만은 아니오. 그 집요함. 악랄함. 그는 단 한 번도 의뢰에 실패하거나 표적을 놓친 적이 없소.”
나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겠군요.”
“아마도.”
공야청이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마치 뭔가가 튀어나와 우리를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우린 그런 놈에게 쫓기고 있는 거요.”
휘이잉. 눈바람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야영 준비가 끝났다. 작은 토굴을 여러 개 판 다음 나뭇가지, 낙엽 따위로 입구를 막은 조잡한 형태였지만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려.”
공야청은 어느새 곤히 잠든 남매를 안고 사라졌다. 그의 입가에 매달린 지친 미소가 자꾸 생각났다.
‘어른이구나.’
살고자 했으면 진작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공야청은 무공을 익힌 고수였고 경륜 있는 무림인이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린 남매를 위해 목숨까지 걸어 가며 싸웠다.
그래서 공야청은 좋은 어른이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문득 드는 의문을 털어 냈다. 이곳은 게임이다. 곧 사라질 환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건 좋지 않다.
맞다, 곧 사라질 환상이다.
‘퀘스트창 오픈.’
띠링.
퀘스트
[로그아웃]이제 당신은 이 험난한 무림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더욱더 강해지고, 유명해지십시오.
언젠가 다가올 그 날을 위해…….
등급 : 메인 퀘스트
제한 : 진태경
임무 : [일류] 경지 달성 (미완료)
Lv.30 달성 (24/30)
명성 500 달성 (250/500)
보상 : [로그아웃]
적들을 처리하고 받은 경험치와 명성. 거기에 퀘스트 보상까지. 슬슬 이 험산의 정상이 보인다.
상태창을 열어 남은 포인트를 모두 분배하니 지쳐 있던 몸에 활력이 돈다.
‘거의 다 왔어.’
이번 고비만 넘기면 된다. 일문일살 조필. 얼굴도 모르는 그놈만 피하면 이 지긋지긋한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레벨이나 명성은 어찌어찌 채운다 치고, 이놈의 경지는 어떻게 올리는 거야?’
처음 튜토리얼 퀘스트를 깨기 시작할 무렵 능력치 분배로 삼류에서 이류로 경지를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후로는 영 깜깜무소식이다.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지?’
무림에서 나는 비상식적인 존재다. 누구보다 빠르게 무공을 익히고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 여러 부분에서 시스템의 힘을 빌려 강해졌다.
그게 널리고 널린 이류 주제에 어지간한 일류 무림인을 말 그대로 발라 버릴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정작 내가 일류가 아니라니!
‘진위경한테라도 물어볼걸.’
처음엔 계속 스탯이나 공력을 올리면 되겠지, 싶었는데 근래 들어서 뭔가 헛짚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레벨? 스탯? 공력?’
그게 뭘까. 이 퍼즐을 완성할 마지막 한 조각이.
답은 금방 나왔다.
‘모르면 찾아야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걷다 보면 출구는 나온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호흡했다. 단전에 똬리 튼 공력이 내 부름에 응답했다.
* * *
“놓쳤군.”
조필이 중얼거렸다. 독사처럼 까만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놈들을 놓쳤다. 그러나 흔적은 남았다. 미세하게 남은 그 흔적들이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스무 명 전후. 약 두 시진 전에 자리를 떴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조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은 삼류지만 추종술은 절정이다. 그의 밑에는 이런 사냥개들이 수두룩했다.
‘두 시진이라.’
어느새 거리가 두 시진으로 좁혀졌다. 도망자들을 따라잡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길어야 반나절이다.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어야지. 뒤도 안 돌아보고. 거추장스러운 혹은 떼고 낙오자는 버리고 악착같이 뛰었어야지.’
그랬다면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은 방심했다. 폭설에 발이 묶였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차이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나는 좀 다르거든.’
지난밤은 길었다. 추적에는 이골이 난 수하 중에서도 낙오자가 생길 정도였다. 폭설이 내리는 산중에서의 낙오란 죽음과 동의어다.
전장에서의 죽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천천히 죽는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조필은 지시했다.
‘죽여.’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조필의 생각은 달랐다. 일평생 뒷골목을 전전하던 삼류 인생에게 남길 이름이 있겠나. 가죽이라도 남겨야지.
발가벗겨진 스무 구의 시신을 뒤로하고 그들은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긴 밤이 끝나고 동틀 무렵, 놈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만날 수 있겠군, 친구.’
조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랜만에 그의 흥미를 끈 수수께끼의 고수다. 굳어 있던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었다.
* * *
부르르.
“어흐. 뭐야.”
순간 오한이 들었다. 팔뚝을 들어 보니 닭살이 오소소 돋아 있다. 지금이 소설의 한 장면이었다면, 주인공은 왠지 꺼림칙하다는 말과 함께 가던 길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확실한 심증을 갖고 움직인다.
“야. 잽싸게 튀어와.”
보이지 않지만 느껴진다. 뒤에서 터벅터벅 걷고 있던 누군가의 발걸음이 움찔한다.
“왜, 왜요.”
“셋 센다. 하나, 둘. 셋.”
셋을 셈과 동시에 혁무진이 잽싸게 옆에 붙었다.
“너지?”
“예?”
“너잖아. 솔직히 말하면 봐준다.”
“뭘요? 저 아닙니다!”
나는 찐빵처럼 부푼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방금 뒤에서 나 욕했지?”
“헛.”
“욕한 거 맞지?”
“마, 맞습니다…….”
역시 이 자식이었군.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혁무진이 눈을 질끈 감는다.
세 번 정도 얻어터지자 녀석은 전의를 잃어버렸다. 거기에 더해 생활의 지혜도 터득했다.
피하면 더 맞는다는 사실을.
“좋아. 솔직히 말했으니 이번만은 봐준다.”
혁무진이 고개를 번쩍 치켜든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 하지만 앞으로도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관심법으로 널 지켜보고 있을 테니.”
혁무진은 마구니가 가득 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제 자리로 튀어 갔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철퇴로 머리를 으깨 주었을 텐데. 나는 아쉬움을 삼키고 계속 걸었다.
“관심법이 모야?”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귀가 간지럽다. 소천의 여동생인 소율이다. 다섯 살이라고 했나? 녀석은 내 배낭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
“무공이야?”
“비슷하지.”
“관심법, 세?”
“엄청 세지.”
“와! 소율이도 관심법 배우고 싶어요!”
“근데 눈이 애꾸여야 돼.”
“헉!”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화들짝 놀란 소율의 얼굴이 보인다. 휘둥그레진 눈동자가 장난 아니게 귀엽다.
‘하연이도 저랬었는데.’
지금이야 징그러운 여동생이지만 어릴 때는 아기 천사가 따로 없었다. 아역 모델 제의도 받고 그랬었는데…….
딱 그 시절의 하연이를 업고 다니는 기분이다.
“나한테 배울래?”
“……소율이는 무공 같은 거 안 좋아해요. 참한 규수가 될래요.”
“그것도 좋지.”
“으응. 아저씨는 무공 좋아해요?”
“나?”
“우리 오빠가 그러는데요, 아저씨가 엄청 세대요. 아빠는 열심히 하는 사람만 세질 수 있다고 했어요.”
“아빠가 그러셨어?”
“네. 우리 아빠도 엄청 세요. 왜냐하면요…….”
조잘조잘. 한동안 잔뜩 신나서 떠들어 대던 소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소율이는 아빠 보고 싶은데. 아빠는 아닌가 봐요. 오빠가 그러는데요, 나랑 오빠 놔두고 엄마랑 놀러 갔대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오래전의 기억이 눈 앞을 가린다. 온통 검고 흰 장례식장에서 어린 하연이는 아버지를 찾았고, 나는 뻔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천이 소율에게 했던 것처럼.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더 무슨 말을 하겠나. 나는 대열의 중간에서 따라오고 있는 소천을 바라봤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녀석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힘들 텐데.’
나이답지 않은 의지력이다. 고통이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는 말은 좆 같지만 사실이다.
소천은 단 한 번도 뒤처지지 않았고 그 모습에 다른 순찰조원들도 감탄했다.
‘문제는 따로 있어.’
공야청이다. 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내가 준 벽곡단의 뛰어난 효능과 지난밤의 운기조식이 아니었다면 진작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힌다.’
해가 떴음에도 쌓인 눈은 쉽사리 녹아내리지 않았다. 내가 앞장서서 눈을 헤치며 길을 뚫고 있지만 다들 지쳤고 속도는 느려진다. 거기에 더해 부상자와 아이까지.
‘혼자라도 도망칠까?’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게임인데 뭐 어때. 공야청도, 저 어린 남매와 순찰조원들 모두가 창조된 인공지능이고 NPC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살아 있다. 이들 가운데 나 홀로 진짜고 실체다.
하지만…….
‘시발. 간단한 문젠데…… 왜 이래?’
이유 모를 거부감이 솟구쳤다.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의 거부감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도대체 왜?’
모르겠다. 그 후 몇 시간 동안이나 나는 정답을 찾지 못했고,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