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70
#269화
가시방석, 아니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다.
매종학을 따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수수 날아오는 시선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은 경외와 호기심이다.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운 좋은 촌구석 무인 취급받던 청년의 정체가, 검성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인이라는 사실을.
“맞지? 검성 매종학 대협.”
“허어, 저렇게 젊은 모습이라니. 반로환동은 황당무계한 헛소리인 줄만 알았거늘.”
“역시 매종학 대협. 무림을 뒤집어 놓으셨다.”
사람들의 숨죽인 대화가 귓가를 쏙쏙 파고들었다.
“그런데 옆에는 누구야?”
“산서잠룡 진태경이잖나. 어제 아는 사람한테 들었는데, 산서잠룡이 매종학 대협한테 이놈 저놈 하면서 목을 잡고 막, 어?”
“허어어어. 그 정도면 산서잠룡이 아니라 광룡 아닌가?”
“…….”
아니, 시벌. 내가 알면서 그랬나. 몰라서 그랬지.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노려보자 매종학이 껄껄 웃었다.
“괜찮네.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뭘.”
아주 두 번 죽이는구나.
우리는 사람들의 한적한 뒤뜰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초봄이지만 날씨는 따뜻했고 꽃은 만개했다. 이름 모를 꽃을 바라보며 걷던 매종학이 입을 열었다.
“우선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군.”
“어떤……?”
“청풍. 그 아이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고 들었네.”
“힘이랄 게 있나요.”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 아이가 은인이라고 부를 정도면 큰 도움을 받았지 않았겠나.”
“…….”
자세한 내막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데?
빙당호로 몇 개 주고 은인 소리 듣는 걸 알면 매종학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사실 그 아이에 대해 걱정이 많았거든. 하지만 이번에 자네를 보고 마음을 놓았지. 마음의 빚을 졌어.”
“아, 예.”
빙당호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 검성이 마음의 빚을 졌다는데 굳이 내 살 깎아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청 소협은 잘 있습니까?”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되었지. 눈을 뜨자마자 자네를 보러 가겠다고 떼를 쓰더군.”
“저런.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음? 만두 주니까 조용해지던걸.”
역시 20년 육아 짬밥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청풍을 다루는 법을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적 대협은 어떠신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여쭤볼 것이 있는데…….”
“뭐든지 물어보게.”
나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영영 깨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는 겁니까?”
“흐음.”
매종학이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내가 보내 준 의원은 뭐라 하던가?”
“아, 그 사람 말입니까?”
어제 잠깐 다녀간, 생쥐처럼 생긴 늙은 의원을 떠올리자 기분이 팍 상했다.
“완전히 돌팔이던데요.”
“돌팔이라니. 낙양괴의(洛陽怪醫)가 말인가?”
“낙양괴의인지 뭔지. 잠깐 살펴보더니 지금은 손쓸 방법이 없다고 휙 나가 버리는데, 그게 돌팔이지 뭡니까?”
뭔 놈의 노인네가 기백이 그렇게 대단한지, 황당함에 팔을 붙잡자 귀청이 떨어지도록 소리를 빽 질러 대더라.
다시는 적천강의 진료를 보지 않겠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들은 매종학이 혀를 찼다.
“낙양괴의라고 하면 중원에서 이름이 자자한 명의일세. 별호처럼 성격이 괴팍하긴 하지만,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럼…….”
고개를 끄덕이는 매종학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그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너무 심려 말게. 생사가 위급했다면 낙양괴의도 그냥 돌아가지는 않았을 테니.”
따뜻한 위로였지만 마음의 심란함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았던 적천강이다.
지난 일 년간 그는 내게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전해 준 스승이었고, 한편으로는 친할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아니야. 별일 없겠지.’
애써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이미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인과 명의가 적천강의 상태를 살펴봤다.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믿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생각을 끝마친 나는 화제를 돌렸다.
“암천에 관해서는 더 밝혀진 사실이 있나요?”
“암천이라…….”
매종학이 묘한 표정으로 꽃밭을 바라봤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어떤 부분들이 말입니까?”
“전부.”
“예?”
“자네한테 물어보지. 이번 사건에 대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 없었나?”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는 너무 많은 일이 다급하게 진행되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확실히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다.
“이상하다고 느낀 부분이라면…… 몇 가지가 있긴 한데요.”
“무엇인가?”
“우선 이놈들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하게.”
“암천이 무림에 타격을 입힐 의도였다면 더 큰 한 방을 준비했어야 합니다.”
정파 무림의 영수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암천의 목표가 정파를 무너트리고 천하를 장악하는 것이라면 하다못해 폭약이라도 설치해 봄 직하다.
성공 가능성을 떠나, 일거에 적의 수뇌부를 몰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하지만 희생된 것은 법왕 굉도와 소림사뿐이다. 놈들은 처음부터 명확한 표적을 정하고 움직였다.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면 어느 정도 싸울 준비를 끝냈다는 이야긴데……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면서 은자 대신 철전을 집어 간 느낌이에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매종학이 불쑥 입을 열었다.
“비유가 틀렸네. 소림사는 정파의 상징이야. 암천은 그 상징을 파괴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각인시킨 거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네. 첫째는 놈들이 정면승부를 원한다는 것.”
“……설마 그렇겠습니까.”
“마인(魔人)을 우습게 보지 말게. 그들은 오직 피와 힘으로 지배되는 자들이야. 그건 정마대전 당시의 마교도 다르지 않았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매종학이 말을 이었다.
“둘째. 암천은 장막에 불과하다는 것.”
“장막이요?”
“소림사에서 혈겁을 일으킨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음양쌍괴…… 아.”
“그래. 정마대전 당시 마교의 깃발 아래에서 흉명을 떨친 대마두지.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나, 여전히 마교를 따르고 있을 가능성도 농후해.”
암천이 마교의 체인점. 아니, 하부조직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매종학의 말처럼 충분히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혈주, 그놈도 마교 소속인 겁니까?”
“모르겠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매종학이 턱을 긁적였다.
“자네가 습득한 잠력단과 소림을 습격한 자들이 사용한 폭혈마공. 그리고 혈주라는 인물까지. 분명 마교의 냄새가 나지만…… 뭔가 달라. 더욱 어둡고 괴이해졌어.”
매종학은 정마대전을 온몸으로 겪은 산증인이다. 수많은 적과 싸우며 그들의 무공을 몸소 체험했을 것이다.
정파 무림에서는 손꼽히는 마공(魔功) 권위자. 그가 하는 말이 곧 학계 정설이나 다름없다.
“특히 마지막에 본 그 술법은 나조차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네.”
신법도, 경공술도 아닌 술법이다.
마교에 별의별 해괴한 술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그런 것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다.
마법에 익숙한 나마저도 입을 쩍 벌리고 놀랄 정도니까.
‘그 정도면 거의 마법 아니냐.’
혹시 모를 가능성을 염두에 둔 무인들이 주위를 샅샅이 수색했지만, 혈주는 발견되지 않았다. 정말 땅에 꺼진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만한 숫자의 적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네. 만약 그런 술법을 대규모로 사용할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기습이란 단어도 우습다. 적들이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난다면 날벼락이나 다름없으니까.
‘수뇌부 쪽도 난리 났겠군.’
전날 잠깐 참석했을 때도 분위기가 어수선했는데, 지금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혀를 차던 그때였다.
“그런 생각해 본 적 있나?”
매종학의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놈들이 왜 녹옥불장에 그리 집착했는지.”
“글쎄요. 소림사의 신물이라서?”
“부러트리면 그만이지.”
“빼앗는 것에 더 초점을 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솔직히 그거 가져가서 뭐에 쓰나 싶기도 하고.”
내가 기억하는 녹옥불장은 그저 조금 특별한 지팡이에 지나지 않았다.
소림 방장의 권위와 천년 소림사의 역사가 스며들어 있기에 더욱 대단해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딱총나무 지팡이도 아니고, 녹색 형광 지팡이 가져가서 뭘 하겠는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다른 이들의 의견도 그랬고.”
그 말을 끝으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매종학이 문득 입을 열었다.
“굉도 대사가 내게 서신을 남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고추털 나고 처음 듣는데요.”
“스스로의 명운을 짐작했는지 안배를 남겼더군. 서신에는 자네가 어둠을 몰아낼 신성(晨星)이라 적혀 있었네.”
“…….”
“자네는 나도 지금껏 본 적 없는 천재야. 주위를 둘러보게. 그 나이에 그만한 경지를 이룬 젊은이가 또 누가 있나?”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청풍이요.”
“아. 그렇군.”
“…….”
“풍이 그 아이가 열여덟 때 절정의 벽을 넘었지. 자네도 그 정도는 했을 것 같은데?”
“그때는 다른 의미로 잘 나갔죠. 별호가 야왕(夜王)이었습니다.”
“오, 십왕과 견줄 만하다. 뭐 그런 뜻인가?”
“아뇨. 기루를 하도 들락거려서.”
“아, 그렇군.”
“…….”
“…….”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뒤통수를 긁적이던 매종학이 허허 웃었다.
“역시 내 손자야.”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돌아서는 내 등 뒤로 매종학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조만간 다시 들르겠네! 자네가 깜짝 놀랄 소식도 같이!”
아, 왠지 기 빨린다.
* * *
“오셨습니까.”
다시 적천강이 누워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 혁무진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까 전과는 달리 군기가 바짝 든 모습에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근무는 그렇게 서서 하는 거야. 언제든지 검도 뽑을 수 있고 얼마나 좋니.”
“물론입니다.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어. 이만 가 봐.”
“존명!”
혁무진이 잽싸게 방에서 빠져나가려던 그때였다.
“소매에 넣어 둔 금덩이는 도로 내려놓고.”
“…….”
“셋 셀 때까지 안 내려놓으면 넌 오늘 피살된다. 하나, 둘.”
떨그럭.
아까 힘으로 뭉친 금가면을 내려놓은 혁무진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아,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호구로 보이니?”
“조장님 제발, 저 이번에 염왕채(閻王債)까지 땡겨 썼습니다…….”
은 십만 냥으로도 모자라서 사채까지 끌어오다니. 정신 나간 놈일세.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금덩이를 품에 넣었다.
“너 하는 거 봐서.”
“헉, 그 말씀은…….”
“지금부터 쉴 테니까 아무도 들이지 마. 큰형님조차도.”
“소, 소가주님도 말입니까?”
“그래. 지쳐서 자고 있다고 해.”
창밖을 바라보자 서서히 붉게 물드는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기한은 내일 아침까지. 할 수 있겠냐?”
혁무진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안 바칠 거 아니까 내가 말한 것만 지켜라.”
“존명!”
존명 같은 소리하네.
화색이 돈 혁무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비켰다.
나는 곤히 잠든 듯한 적천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 침상에 누웠다.
‘이게 얼마 만이지.’
쉴 틈 없이 달려왔던 지난 1년. 이제는 말고삐를 조금 풀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로그아웃.’
띠링.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