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79
#278화
아름답던 2층 주택은 흉가(凶家)로 변해 있었다.
수십 겹의 방어막이 멸염신권의 충격을 일부 흡수하지 않았다면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때, 등 뒤로 인기척이 가까워지더니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진태경 씨.”
반쯤 그을린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네.”
최 팀장과 김 집사. 그리고 송송이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정원에서부터 처참하게 널브러진 시신들을 봤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내 몰골도 썩 좋아 보이진 않을 거고.
송송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전부 죽인 거야?”
“응.”
“……!”
“농담이야. 항복한 놈들은 살려 뒀어.”
부드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단은.”
송송이에게 한 대답이지만 최 팀장과 김 집사를 향한 말이기도 하다.
최 팀장이 우려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생존자들은?”
“한곳에 모아 놨습니다.”
“아무런 조치도 없이 말입니까?”
“물론 했죠. 앞으로 몇 시간 동안은 숨 쉬는 시체나 다름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개인적인 조치라는 건 점혈이었다.
아혈과 마혈, 수혈을 짚은 뒤 블랙 헌터들을 딱 하나 남은 방에 차곡차곡 처박아 뒀다.
무력 진압을 하긴 했지만, 내가 무슨 피에 미친 살인귀도 아니고 항복하는 놈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나중에 쓰임새가 있을 수도 있고.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최 팀장의 시선이 내 발밑에 쓰러져 있는 누군가를 향했다.
“그건 누굽니까?”
“이 집 주인이요.”
발로 놈의 몸을 뒤집자 40대 남성의 모습이 드러났다.
집주인이자 블랙 헌터들의 우두머리인 임영준이다.
시체로 착각할 만큼 전신이 피범벅이었지만, 분명히 살아 있다. 그것도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놈을 살핀 김 집사가 알 만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포션을 썼군요. 그것도 여러 번 반복해서.”
“네.”
“고문을 하신 겁니까?”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대격변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블랙 헌터보다 더한 놈들도 많았고요.”
고문이라는 말에 송송이의 안색이 흐려진다. 하지만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생했어.”
거부감이 드는 건 당연하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무림에 익숙한 나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임영준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입이 무거운 놈이었고, 어지간한 협박으로는 놈의 입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어요.”
“진태경 헌터님이 하지 않았다면 제가 했을 겁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최 팀장과 김 집사가 각자 한마디씩을 보탰다.
맞다. 그들의 말처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미 내 손에 피를 묻힌 마당에 고문을 망설일 이유는 없다.
고개를 흔들어 심란한 마음을 털어 낸 내가 입을 열었다.
“물증은 없어요. 제가 침입하고 경보 마법이 울리자마자 관련된 정보를 모두 삭제했다더군요.”
“전부 말입니까?”
“네. 집에는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은 임영준을 포함해서 단 두 사람만 가지고 있었어요. 그마저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대포폰이고.”
나는 미리 챙겨 둔 휴대폰의 잔해를 보여 주었다.
이쪽으로는 장님이나 다름없는 내가 봐도 복구가 불가능해 보인다. 부품은 죄다 으스러졌고 SD카드는 불에 태웠다고 했으니까.
잔해를 본 최 팀장이 작게 혀를 찼다.
“철두철미하군요. 이 정도면 서류 같은 게 남아 있을 리 없을 테고.”
“네.”
“다른 블랙 헌터들은요?”
“열 명이 살아남았는데, 하나같이 아는 사실이 없어요. 부팀장 격인 놈은 저한테 죽었고. 여기 있었던 놈들 전부 임영준이 포섭하고 훈련시켰답니다.”
파악한 바에 의하면 놈들은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움직였다.
신분 세탁부터 보수 지급까지. 블랙 헌터의 모든 것들은 임영준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임영준이 살아 있었으니 다행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건…….”
나는 문득 말을 멈췄다.
세 번의 분근착골(分筋錯骨)을 겪은 그가 비명처럼 외친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며, 명동 길드! 명동 길드라고!’
국내에서 열 손가락은 자신할 수 없어도 20위 안에는 충분히 꼽히는 대형 길드. 그리고…….
‘지훈이.’
얼마 전 다시 만난 오랜 친구가 소속된 길드이기도 하다.
나는 고민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요?”
“……?”
“개인적으로 확인해 볼 문제가 있어서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최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현장을 정리하겠습니다. 확인해 보시고 알려 주세요.”
“네.”
“바로 시작하시죠.”
최 팀장의 말에 김 집사가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스태프를 휘둘렀다.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며 혈도가 짚인 열 명의 블랙 헌터들이 공중으로 붕 떠서 차례차례 집 밖을 빠져나갔다.
그들 사이에 임영준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낮은 목소리로 경고한 김 집사가 주문을 읊었다.
마나가 출렁임과 동시에 거대한 화염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2층 주택을 집어삼켰다.
불길은 정원까지 휩쓸었고 모든 것을 말소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화르르륵!
불과 함께 매캐한 연기구름이 솟구친다.
그러나 저택이 위치한 한적한 시골 마을의 평화는 깨지지 않았다.
마법으로 모든 시야와 소리가 차단된 저택은 한참 후에야 발견되겠지.
“이걸로 될까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아니어도 놈들이 나서서 이곳의 존재를 지울 테니까요.”
하루아침에 사람이 사라지고 집이 불탔지만, 그뿐이다.
한동안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힘과 권력을 가진 괴물들의 방식이니까.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가람중 동창 박지훈]지금 내 휴대폰에 저장된 이 번호의 주인은 도대체 어느 쪽일까.
* * *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박지훈은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입구에는 정복 차림의 리무진 기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이런 시간에 갑자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댁에 가서 모셔오라는 길드장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긴. 일개 운전기사가 뭘 알겠나.
작게 혀를 찬 박지훈은 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부드럽게 내달리던 리무진은 고급 아파트와 빌라가 즐비한 한남동 모처에 정지했다.
거대한 저택. 돌담을 따라 경비를 서고 있던 경호원 중 하나가 달려와 박지훈에게 고개를 숙인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박지훈은 유럽 귀족 저택을 연상케 하는 철제 대문을 지나고, 운동장보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고 난 후에야 자신을 호출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침 먹었나?”
그는 반백의 50대 장년인이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체구는 당당했고, 흰색 가운 너머로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이 보였다.
박지훈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직 식전입니다.”
“그럼 와서 들게. 오늘 소고기 뭇국이 아주 잘 됐어.”
이제 겨우 새벽 여섯 시. 이른 새벽에, 그것도 자다 깨서 먹는 아침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러나 박지훈은 군말 없이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수저를 들었다.
“길드장님께서는 안 드십니까?”
“난 이미 먹었네. 신경 쓰지 말고 마저 식사하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그가 신문을 펼쳤다. 오늘 자 조간신문이다.
1면에는 숙연한 얼굴로 고개 숙인 정장 차림의 장년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故정현우 헌터의 빈소를 찾은 박태섭 명동 길드장. “그저 비통한 마음뿐, 유가족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
박지훈은 그제야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영감쟁이가 뿔이 났군.’
컬러 사진 속 장년인과 똑 닮은 그가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사진 어때. 잘 나왔나?”
“예. 워낙 인물이 좋으시니까요.”
“자네는 그게 문제야. 무슨 말을 해도 항상 빈말처럼 들리거든.”
“진심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장년인, 명동 길드장 박태섭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의 인내심이 끊어졌다는 신호였다.
“정현우. 이 친구는 왜 죽였나?”
올 게 왔군.
박지훈은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럼 코를 막는 정도로 끝냈어야지.”
“그건 명동 길드에서 해야 할 역할입니다. 제 역할은 구린내 맡은 놈들이 어딘가에서 떠벌리기 전에 목을 비트는 거고요.”
“내 허락도 없이?”
“허락도 받아야 합니까?”
쾅!
박태섭의 주먹이 식탁을 후려쳤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식탁이 부서지며 유리와 음식이 사방으로 튀었다.
“길드장님!”
황급히 달려온 경호원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창노한 외침이었다.
“모두 썩 물러가라! 내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마!”
“……!”
순간 멈칫한 이들이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박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튄 국물을 닦았다.
“아쉽네요. 맛있었는데.”
“이 젖비린내 나는 놈이 감히.”
“어차피 피차 구린내 나는 건 마찬가진데, 젖비린내가 더해져 봤자 티도 안 납니다.”
“내가 피 흘리며 세운 내 길드다. 그런데 네깟 놈이 말도 없이 길드원을 죽여?”
“거 참. 길드장님.”
주름 하나 없는 박지훈의 매끈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에 쥔 손수건이 산산조각 난 테이블 잔해 위로 툭 떨어졌다.
“그럼 어떡합니까?”
“뭐라?”
“구린내 맡은 놈들이 입 열면 골치 아파지는 거 모르세요? 이거 한 번 불똥 튀면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겁니다. 혼자 살림 태우시겠다면 별말 안 하겠는데, 우리 쪽에도 옮겨붙으니까 제가 나선 거죠.”
“그래도 이 자식이……!”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격변에서 피땀 흘려 가며 싸운 전쟁 영웅? 인정합니다. 하지만 명동 길드를 본인 길드라고 우기시는 건 좀…….”
피식 웃은 박지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 잘 먹었습니다. 몇 숟가락 뜨지도 못했지만.”
그 모습을 보며 부르르 떨던 박태섭이 입을 열었다.
“앉아.”
“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통화로 해 주십시오. 자꾸 이러시니까 대선배님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려고 하네요.”
“앉으라고 했다.”
주위의 공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명동 길드장 박태섭은 대격변이 낳은 영웅이자 국내 최상위 랭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박지훈은 그가 자신에게 손을 대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그가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네놈이 튀긴 불똥 때문에 초가삼간 다 태우게 생겼다. 그건 몰랐나 보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현우 팀장 건은 뒷말 안 나오도록 확실히 처리했습니다.”
“블랙 헌터. 얼마 전에 평화 길드의 D급 헌터를 건드렸다며?”
박지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뭡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 순간, 코트 안 주머니에 넣어 둔 박지훈의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뭔가에 홀린 듯이 핸드폰을 꺼낸 그는 컴컴한 시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이름을 응시했다.
[진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