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81
#280화
“박지훈, 이 씨발 새끼야.”
– …….
수화기 너머에서 이어지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보이지는 않아도 충분히 전해진다. 지금 이 순간, 놈이 느끼고 있을 당혹감과 동요가.
“뭐 하냐.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답이 들려왔다.
– 혹시?
“그래, 나다. 이 새끼야.”
격앙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고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그러나 머리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차가웠다.
어쩌면 이미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마 설마 했는데.’
놈의 입에서 튀어나온 스물여덟이라는 숫자는 한줄기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다만 궁금한 것은 도대체 누구의 지시로, 얼마나 깊숙이 연관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 자식들, 네가 보낸 거냐?”
낮고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 글쎄.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 왜. 발뺌할 줄 알았나 봐?
이 자식 봐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한 녀석의 태도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누구한테 들었어? 임영준? 하긴, 그놈밖에 없지. 그나마 입 무거운 놈인 줄 알았는데…… 사람을 잘못 봤어.
쯧, 하고 혀를 찬 박지훈이 말을 이었다.
– 병신 같은 새끼. 그놈한테 맡기는 게 아니었는데.
“똥이 무슨 죄냐. 공공장소에서 엉덩이 까고 힘준 놈이 잘못이지. 그런데 너…….”
우드득.
내 손아귀에 목을 붙잡혀 발버둥 치던 1팀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똥 싸지른 후에 뒤처리는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봤냐?”
– 일이 이렇게 된 건 뜻밖이긴 한데…… 설마 뒤처리도 생각 안 하고 일 봤을까.
“어. 그래 보여서 하는 말인데.”
– 뭐?
“너, 나 감당할 수 있겠냐?”
순간 침묵이 흘렀다. 일 초, 이 초, 삼 초.
그리고 그 짧은 침묵 끝에는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싸늘하고 날 선 목소리가 있었다.
– 거기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가면 너나 평화 길드나 전부 끝장이야.
“그래서?”
– 아직 안 늦었다. 이 이상 일 키우지 말고 나와.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그 말을 듣고 문득,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전투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기를 잡은 놈은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두려움을 품은 놈은 먼저 한발 물러선다.
그리고 나는 놈이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알고 있었다.
‘블랙 헌터.’
대형 길드의 불법 사병들이라 할 수 있는 블랙 헌터의 존재.
그것이 박지훈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무리?”
– 그래.
“누구 마음대로?”
– ……!
“먼저 시작한 건 너희들이야. 어디서 끝낼지는 내가 결정한다.”
수화기 너머, 박지훈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 이거 참. 멍청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이네.
“결과도 생각 이상일걸. 존나게 기대하세요. 이 시벌놈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띵.
– 19층입니다.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렸다.
높은 천장과 넓은 복도. 그 사이를 오가는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보인다.
그중 몇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쪽을 향했다. 그리고 이내 입이 딱 벌어졌다.
“티, 팀장님?”
“거기 당신! 도대체 누구…….”
나는 대답 대신 1팀장을 내던졌다. 삿대질하며 다가오던 헌터 하나가 1팀장과 함께 벽면에 처박혔다.
동시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이 비명과 함께 비상벨을 눌렀다.
위이이이이잉!
“비상! 비상!”
“침입자다! 1팀 전원 무장 갖춰!”
찢어지는 소음 속, 박지훈의 마지막 한마디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 그래, 해봐. 어디 한 번.
뚜, 뚜. 뚜…….
나는 통화가 끊긴 1팀장의 핸드폰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시 주머니에서 손을 뺐을 때, 내 손에는 핸드폰 대신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어디 한번 해보라고?’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누구냐!”
“무장 해제해! 죽기 싫으면 당장!”
빠른 속도로 무장을 갖춘 명동 길드의 최정예 헌터들이 나를 반원으로 에워쌌다.
등 뒤에는 엘리베이터. 그리고 석고상처럼 굳은 채 중얼거리는 한 사람뿐이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그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폰 뭐 써요?”
“헉!”
“폰. 핸드폰이요.”
“어, 어른폰25 씁니다.”
“아. 사과 씹다 뱉은 거.”
“예, 예. 맞습니다.”
“꺼내서 동영상 찍어요.”
“옙!”
우렁차게 대답한 그가 핸드폰을 꺼내다 말고 멈칫했다.
“예, 예? 죄송하지만 지금 뭐라고…….”
“어른폰25 쓰신다면서요. 내 거보다 화질 훨씬 좋으니까 그걸로 찍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뭐, 뭘 말입니까?”
“전부 다.”
그때, 쓰러져 있던 1팀장이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내질렀다.
“뭐 해, 이 자식들아. 저 새끼 당장 족쳐!”
“팀장님, 저 사람 진태경 헌터 아닙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책임은 내가 진다.”
어느 길드를 가도 1팀은 해당 길드의 상징이자 최정예다.
국내에서 늘 10위 안에 꼽히는 명동 길드의 1팀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프로 중의 프로. 숨 쉬는 전투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이다.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라고 생각하고 전투에 임해.”
팀장의 확실한 지시가 떨어지자 수십 쌍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일선에 선 다섯 개의 타워 실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대리석 바닥을 내리찍는다.
쿵!
“포메이션-!”
평화로운 일상 속.
도심지의 빌딩이 전장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 *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명동 길드의 보안팀에 소속되어 있는 C급 헌터 이민수는 눈을 깜빡였다.
그만큼 지금 그의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콰드드득! 퍼펑!
장갑차만큼 단단하다는 타워 실드가 박살 나고, 거구의 탱커는 거인의 망치에 맞은 것처럼 저 멀리 튕겨 나간다.
간신히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 아주 짧은 순간 무너진 그 틈을 희끄무레한 인영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쉬리리릭! 서걱! 서걱!
“크아악!”
“허억!”
번쩍이는 빛과 함께 방패 벽이 허물어졌다.
볼썽사납게 앞으로 철퍽 엎어지는 탱커들의 종아리 힘줄은 깔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일격.
눈을 한 번 깜빡이면 두 사람이 쓰러졌고, 두 번 깜빡이면 서너 명이 쓰러졌다.
회색 후드티를 걸친 청년, 진태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피가 솟구치고 비명이 넘쳐 흘렀다.
“막, 막아!”
“딜러어!”
탱커들이 버티고 있던 일선은 이미 전투 시작과 동시에 허물어졌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진태경을 향해 다섯 개의 칼날이 힘차게 휘둘러졌다.
쉬쉬쉬쉬쉭!
두 어깨와 가슴. 그리고 두 다리.
세 개는 상반신을, 두 개는 하반신을 노렸다. 물러서지 않고서는 피할 수 없는 공격.
“됐다!”
누군가의 입에서 희열에 찬 외침이 터진 그 순간, 진태경의 손에 들려 있던 단검이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카카카캉!
모두가 적중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다섯 개의 칼날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검 자루를 쥐고 있던 이들이 경악에 가득 찬 눈빛으로 진태경을 바라봤다. 튕겨 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간 손아귀는 핏물로 흥건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비명처럼 토해 낸 외침에 진태경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되는데?”
스걱!
한 줄기 선이 수평으로 그어졌다. 피할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공격.
바로 그 궤적에, 막 공격을 시도했던 다섯 명의 헌터가 있었다.
촤아아악!
가슴에서 피 분수를 뿌리며 쓰러지는 헌터들 사이로, 한 줄기 섬광이 파고들었다.
쐐애애액! 턱!
화살촉이 진태경의 가슴 어림에서 정지했다.
A급 헌터가 마나를 실어 정확히 쏘아 보낸 화살.
하지만 그것을 막은 것은 각종 마법으로 코팅된 방패도 아니고, 날카로운 병장기도 아니었다.
뚜둑.
두 손가락으로 화살대를 부러트린 진태경이 손을 흩뿌렸다.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왔던 방향을 가로지른 화살은 세 개의 방어 마법을 깨트리고 주인의 양어깨에 박혔다.
푸푹!
“커흑!”
“화살 한 번 더 날리면 그때는 불알 홀수로 만들어 줍니다.”
“……!”
“다른 분들도 짝 불알 되기 싫으면 물러나세요. 힘 조절하는 것도 짜증 나니까.”
힘 조절을 했다고?
1팀 소속 헌터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냉수 한 잔 마실 시간에 십수 명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것도 믿기지 않는데, 이게 힘 조절을 한 거라니.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무슨 괴물이지?’
자신들이 누구인가. 명동 길드의 최정예이자 닳고 닳은 베테랑 헌터들이다. 짧게는 8년부터 길게는 20년 이상의 고참도 있다.
동급의 헌터에 비해 특출난 실력을 지녔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자부심은 드높았다.
오늘, 이곳에서 진태경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좋게좋게 존댓말 써 줄 때 비키십시오. 선배님들. 마음 같아서는 죄다 죽통 깨고 싶은데……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것 같아서 이 정도만 해두는 겁니다.”
늘어진 츄리닝 바지에 회색 후드티. 집 앞 카페에 들른 것처럼 간편한 차림이지만 진태경의 말을 흘려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힘을 보여 주었고, 모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러니까, 길 터.”
게이트에서 수많은 격전을 치러 낸 베테랑들도 숨이 막힐 정도의 기세가 장내를 짓눌렀다.
그건 지금껏 싸운 어떤 몬스터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원초적인 두려움이었다.
‘괴물. 저놈은 진짜 괴물이다.’
저벅. 저벅.
그 괴물이 바로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헌터들이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길을 비켜 준 그때였다.
“버닝 핸즈(Burning Hands)!”
화륵!
거센 열기와 함께 화염에 휩싸인 손이 진태경을 덮쳤다.
어지간한 암석조차 녹여 버리는 화염 마법이었지만,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손은 진태경의 손바닥과 부딪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 마법?”
“화염신장이라는 건데. 쓸 만하지?”
청염(靑炎)에 휩싸인 손바닥을 목격한 1팀장이 눈을 부릅떴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진태경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마치 잊고 있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모습이었다.
“아, 조금 전에 했던 말에서 당신만큼은 예외야.”
“헉.”
쉬릭!
유령처럼 흩어지는 진태경의 신형.
그러나 1팀장 역시 명동 길드의 최정예 팀을 이끄는 만큼 뛰어난 실력의 전투 마법사다. 그는 당황한 와중에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블링크(Blink)!”
10m 이내, 시야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순간이동 마법이다.
‘등 뒤에서 일거에 공격 마법을 쏟아붓는다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놈이라도…….’
블링크 마법으로 진태경의 후방으로 이동한 1팀장은 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진태경의 맑고 깊은 검은색 눈동자가 그의 코앞에 있었다.
턱. 열기가 남아 있는 손바닥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뭘 그렇게 놀라실까.”
“……!”
“눈깔을 그렇게 보란 듯이 굴려 놓고.”
시선의 움직임으로 방향을 예측했다고?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1팀장의 신형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이놈의 움직임이…… 내 블링크 마법보다 빠르다.’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란 말인가.
그리고 박지훈은, 명동 길드는 어떤 괴물을 건드린 걸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준비해 둔 마지막 주문을 읊었다.
“포, 포이즌(Poison).”
화아아악.
뿜어져 나온 녹색 독무(毒霧)가 진태경의 얼굴을 휘감았다.
그러나 1팀장이 내심 느낀 불길함처럼, 괴물은 이번에도 자신이 괴물임을 입증했다.
“어우. 방귀 냄새.”
잘생긴 이마가 찡그려진다.
포이즌 마법에 대한 반응은 그것이 전부였다.
절정에 오르며 백독불침(百毒不侵)의 경지에 다다른 진태경이 얼어붙은 1팀장을 향해 입김을 불었다.
“후욱.”
“허억.”
독무를 들이마신 1팀장의 안색이 푸르게 물들었다.
마비독으로 전신이 뻣뻣하게 굳은 그의 뒷덜미를 움켜잡은 진태경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박지훈. 그 개새끼 사무실 어디 있어요?”
스스슥!
열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문을 향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