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82
#281화
리무진은 일체의 흔들림 없이 도로 위를 질주했다.
내부에 설치된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낸 박지훈은 맞은편에 앉은 장년인에게 권했다.
“드시겠습니까?”
“이 상황에? 그리고 남의 물건을 제 것처럼 권하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지?”
“그럼 절반만 마시는 건 괜찮겠군요. 지금의 명동 길드가 있기까지 저한테 그 정도 지분은 있으니까요.”
“…….”
장년인, 명동 길드장 박태섭은 말없이 생수병을 기울이는 박지훈을 노려봤다.
“태평하군.”
딱 절반을 비운 후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댄 박지훈이 대답했다.
“근심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 사달이 났는데 아무렇지 않다고?”
“사소한 해프닝일 뿐입니다.”
“모래탑은 물 한 방울로도 무너지는 법이야.”
“그건 모래탑이니까요.”
“명동 길드는 다르다?”
“소속 헌터 오백 명. 그중 A급 헌터만 스무 명입니다. 이만하면 모래탑이 아니라 철탑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텐데요. 그리고…….”
박지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명동 길드는 논외로 쳐야죠. ‘그분’이 계시잖습니까.”
“……그건 사실이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그런 박태섭의 모습에 박지훈이 물었다.
“뭡니까?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시는 겁니까?”
잠시 침묵하던 박태섭이 입을 열었다.
“느낌.”
“네?”
“내 나이쯤 되면 알 수 없는 직감이라는 게 생기거든.”
하.
박지훈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무슨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결국 환갑 넘은 노인네의 투정이 아닌가.
‘단순히 느낌이라니.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그런 생각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박태섭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연륜이 짧지 않았다.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이해해. 자네 같은 햇병아리들은 알 수 없는 영역이니까.”
“아,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그 말투도 햇병아리라서 할 수 있는 거고.”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말입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시는 겁니까?”
짧은 침묵 끝에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진태경.”
한숨처럼 내뱉은 이름이다. 11팀과의 연락이 두절된 직후부터 내내 뇌리를 맴돌던 그 이름.
아주 잠깐, 일이 어그러진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대격변마저 버텨 낸 그의 직감이 이 고민의 해답을 내놓았다.
“놈은 공성포야. 모래탑이 아니라 철탑에도 균열을 만들 수 있는.”
박태섭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었다. 박지훈이 남겨둔 생수병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말을 끝마치자 목이 타서 견딜 수 없었다.
반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박지훈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노인네가 노망이 났나…….’
일을 처리하는 과정이 조금 매끄럽지 않았음은 인정한다. 특히 블랙 헌터, 11팀에 관해서는 예상치 못한 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감안하더라도, 지금 박태섭의 반응은 너무 과했다.
‘그분’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박지훈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당연했다.
“진태경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결과를 보여 줬으니까.”
“진태경은 두각을 드러낸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걸 보여 준 것도 사실이야.”
“보여 줬다고요?”
박지훈이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원명훈 그놈은 쓰레기였습니다. 랭커 중에서도 말석. 그것도 한류 열풍이니 뭐니 할 때 적선하듯이 한 번 이름 올려 준 게 전붑니다. 길드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멍청하고, 탐욕스러운 것으로도 모자라 실력도 유명세로 포장한 놈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리고 네임드 몬스터요? 말이 네임드 몬스터지, 그 블랙 드레이크는 근 20년 사이 출몰한 네임드 몬스터 중에 가장 약체였습니다. 사체에서 나온 마정석도 A급 몬스터와 큰 차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자넨 그 약한 네임드 몬스터를 혼자 잡을 수 있겠나?”
“못 할 것도 없지요.”
박지훈의 대답은 막힘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그분’의 선택을 받는 영광을 누렸고,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명동 길드장의 맞은 편에 앉아 눈을 맞추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질문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자네가 진태경과 싸운다면? 그를 상대로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나?”
“……물론입니다.”
이번 대답은 반 박자 느렸다. 그 사실을 깨닫고 지그시 입술을 깨무는 그를 보며 박태섭이 말했다.
“방금 그 망설임이 진태경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는 것 같은데.”
박지훈이 차갑게 대꾸했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아, 친구라고 했던가?”
“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군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번 일이 길드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11팀은 아직 생사도 파악하지 못했고, 현재 국내 최고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유명 인사가 명동 길드 본사에 쳐들어왔는데 심각한 일이 아니다?”
“멍청한 놈입니다. 그러니까 순간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겁도 없이 명동 길드 본사에 침입한 거겠죠.”
약 10분 전, 1팀장과 통화를 나누던 박지훈은 갑자기 들려온 진태경의 목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동시에 안심했다.
‘일이 쉽게 풀리겠군.’
명동 길드에 소속된 헌터는 오백 명이 넘는다. 그중 절반이 레이드로 빠져나갔다고 해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본사에 상주했다.
물론 그중에는 길드 최정예인 1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태경은 호랑이 소굴로 들어간 겁니다. 놈을 붙잡아 둔 상태에서 교통 정리하면 끝나는 일이에요.”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끼어든다고 해도 걱정 없다.
그에게는, 아니 ‘그분’에게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먹통으로 만들 힘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안에 깔끔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박태섭은 부쩍 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상치 않아.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슬슬 힘에 부치는군.”
“단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대격변이라는 태풍까지 버텨 내신 분이 다리가 후들거리면 곤란하죠.”
격려보다는 질책이 담긴 말뜻을 알아차린 박태섭이 입을 다문 그때, 어디선가 단조로운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제 전화는 아닙니다만.”
“내 거야.”
“누굽니까?”
“내 경호 담당인 김 실장. 11팀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라고 시켰지. 이제 막 도착한 모양이군.”
“잘됐군요. 우선 11팀에 관한 흔적은 전부 지우라고 하십시오.”
“지금 나한테 명령하나?”
인상을 찡그린 박태섭이 전화를 받았다.
“나일세. 어떻게 됐나? 응? 아, 그래.”
미간이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 눈동자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표정이 점점 묘해지던 박태섭이 귀에서 핸드폰을 뗐다.
“어떻게 됐습니까?”
“받아.”
박태섭이 자신의 핸드폰을 그에게 건넸다. 이마 위로 핏줄이 불끈 도드라져 보였다.
“네?”
“어서!”
박지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핸드폰을 건네받아 귀에 댔다.
그러자 고양이 발바닥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명동 길드 1팀 박지훈 헌터님?
박지훈은 듣는 순간 깨달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오다가다 몇 번인가 마주쳤던 김 실장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젊었고, 정중하면서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을 물씬 풍겼다.
“본인인데, 누구십니까?”
느낌이 좋지 않다.
본능적인 불안감이 담긴 박지훈의 물음에 낯선 목소리가 대답했다.
– 최민우라고 합니다.
“누구요?”
– 아, 소속은 평화 길드입니다. 직책은 팀장이고요.
“……평화 길드?”
– 예.
이런 씨발. 박지훈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몇 마디만으로도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기에는 충분했다. 평화 길드가 파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다.
핸드폰의 주인인 김 실장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꽁꽁 묶여 기절해 있거나, 자신의 핸드폰이 쓰이는 것을 원통하게 바라보고 있겠지.
‘명동 길드, 이 병신 같은 새끼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최 팀장의 목소리는 승자의 그것처럼 느긋했다.
–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이를 악문 박지훈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던 그때, 가슴으로부터 진동이 전해졌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박태섭의 핸드폰이 아니다.
– 박지훈 헌터님?
“잠시만. 잠시만요.”
박지훈은 남은 손으로 정장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어 확인했다.
문자 한 통이 와 있었고, 발신인은…….
[1팀장]됐구나.
박지훈의 입가에 안도의 웃음이 맺혔다. 명동 길드라는 호랑이굴로 들어간 진태경이 드디어 무릎을 꿇은 것이 분명했다.
저쪽으로 기울었던 저울추가 이제야 맞춰진 셈이다.
그러나.
“……어?”
문자를 확인한 박지훈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6인치의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진태경을 사로잡았다는 1팀장의 보고가 아닌 한 장의 이미지 파일이었다.
‘이게 무슨.’
낯익은 얼굴들이다.
핏방울이 튄 얼굴로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청년. 그리고 마치 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그에게 붙들려 있는 중년인.
‘진태경, 1팀장?’
그뿐만이 아니다. 두 사람의 등 뒤로 익숙한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명동 길드 1팀 박지훈 헌터’라고 적힌 자신의 명패는 그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 주는 결정적인 단서였다.
그리고 하나 더.
‘설마……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진태경 저놈 하나를?’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박지훈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흔들리던 그 순간이었다.
우웅.
진동과 함께 새로운 문자가 도착했다. 내용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딱 다섯 글자로 박지훈의 멘탈을 으깨 놓았으니까.
〈 1팀장
1팀장
올 때 메로나
“이, 이 씨발……!”
우지직. 박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명동 길드장 박태섭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좆 됐군.”
* * *
〈 최 팀장님
최 팀장님
명동 길드에서 파견된 인원들 붙잡았습니다.
최 팀장으로부터 도착한 문자다.
몇 시간 전, 블랙 헌터들이 사용하던 비밀가옥을 불태운 우리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한 매복조. 그리고 개별 행동을 요구한 나.
반드시 증거나 증인이 될 만한 무언가를 잡아야 한다는 최 팀장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 말이 맞지.’
치밀하게 관리한 탓에 임영준을 포함한 블랙 헌터 전원은 이미 전부 신분 세탁을 거쳤다. 명동 길드와 어떤 연결 고리도 없음은 물론이다.
최 팀장은 그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다.’
돌이켜 보면 그는 늘 방향을 잃지 않았다.
뛰어난 마법사이자 현명한 조언자인 김 집사의 역할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이걸로 확실한 약점 하나는 우리 손에 넣었군.’
생포한 블랙 헌터에 더해서 명동 길드의 정식 직원들까지.
이 정도면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비수로 쓸 수도 있고.’
고생하셨다는 내용과 함께 아까 찍은 사진을 보냈다.
역시 어른폰이라 그런가, 발로 찍어도 잘 나오더라.
“나도 이참에 폰이나 바꿀까.”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몸을 움찔 떨었다. 오늘 하루 내 전담 카메라맨으로 고용한 보안팀 헌터다.
물론 보수는 없지만.
“왜요?”
“아, 아닙니다!”
“편하게 계세요. 서 있지 말고 소파에라도 좀 앉으시든가.”
“이대로가 편합니다!”
“아무리 봐도 불편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악!”
기분 탓인가. 외침에 울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일개 보안팀 헌터인 그로서는 감히 눈도 제대로 못 맞추는 최정예 1팀을 개박살 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중에 온 놈들도 비슷했지.’
뒤늦게 달려온 명동 길드의 다른 헌터들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히 내게 덤벼들지 못했다.
물론 투철한 애사심으로 무장한 이들이 상당수 있긴 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실력은 없어서, 내게 달려들었던 놈들은 전부 죽사발이 나서 실려 갔다.
그렇게 오십 명쯤 쓰러트리자 더 이상 덤벼드는 놈은 없었고, 박지훈의 사무실은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금지(禁地)가 되어 버렸다.
나는 놈이 쓰던 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했다.
‘지금쯤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겠지.’
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다.
장장 10년 만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중학교 동창.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박지훈의 본 모습이었을까.
‘빨리 와라. 더 화나기 전에.’
우둑.
손아귀의 힘으로 의자 팔걸이가 부러진 그때였다.
“오, 오셨다!”
“길드장님!”
사무실 문밖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웅성거림.
동시에 이쪽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커다란 두 개의 기운이 느껴진다.
‘왔구나.’
그리고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문이 터져 나갔다.
꽈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