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9
#28화
후우.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골랐다. 내뱉는 숨에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기(氣)가 섞여 있다.
‘아깝다.’
운기조식은 외부의 기를 받아들여 내부의 기와 함께 순환, 축적하는 행위다. 하지만 체내에 남는 기는 소량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기운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소설에서는 조금만 해도 쭉쭉 오르던데.’
천하제일의 무공? 천고의 영약?
여긴 그런 거 없다. 진가심법의 등급이 절정이긴 하지만 공력 축적에는 영 젬병이고 영약은 개뿔, 구경도 못 해 보고 고생만 죽도록 했지 뭐.
‘희망은 하나뿐인가?’
단전 한구석에 웅크린 또 다른 공력. 그걸 전부 내 것으로 만든다면 앞으로의 싸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시도해 봐도 요지부동이라는 사실이다.
‘움직여라. 움직여!’
지금껏 장군바위처럼 버티고 있던 놈이 움직일 리가 있나. 공력을 끌어 올려 봤지만 묵묵부답이다.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입니까?”
주위를 경계 중이던 혁무진이 물었다.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더니 잽싸게 순찰조원들을 준비시키고 소율을 품에 안는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순간이다.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이렇게 빠릿빠릿해졌지?
주먹을 들이밀어야 마지못해 움직이던 놈인데, 어째 인간이 좀 달라진 것 같다.
‘나야 좋지만.’
잡생각은 치워 버리고 공야청을 둘러업었다. 중독 증상이 심해지면서 그의 안색은 검푸르게 변색되어 있었다.
혁무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괜찮아야지.”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공야청이 버텨 주기를 바랄 뿐이다. 혼절해 있는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세요.”
어스름한 새벽 사이로 햇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햇빛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아니, 내딛으려고 했다.
– 아우우우!
처음에는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였다. 혁무진이 중얼거렸다.
“늑대들이 배가 고픈 모양이군요.”
“늑대?”
“그럼요. 산에 산짐승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
고대 중국이 배경인 게임이다. 늑대, 호랑이가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나도 지난 며칠간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기분이 이상해.’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다르다. 저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손끝이 찌릿하다.
지난 7년간의 경험으로 벼려 낸 직감이 속삭이는 듯했다. 아직 햇빛이 비치지 않은 저 숲 너머에 뭔가가 있다고.
“전투 준비.”
“그럼 이제 출발…… 예?”
“수비 대형 펼쳐.”
혁무진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 명령을 전달했다. 얇은 철을 씌운 방패를 든 정찰조원 셋이 눈 덮인 길을 틀어막는다.
비좁은 오솔길에 언덕 위의 고지대. 유리한 위치다.
– 아우우우!
두 번째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더 가깝고, 그래서 불길하다. 혁무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단순한 늑대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그럼 더 좋고.”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건 아닐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꼬박 이틀을 도망쳤다. 이 잠깐의 시간 때문에 붙잡힌다면 그건 운명인 거다.
“대기해. 조금만 더 기다린다.”
내 말을 짐승들도 알아들은 모양이다. 일 다경 동안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고 가까워졌다. 눈 덮인 새벽 산중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눈 위를 뛰어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두 마리가 아닌 모양입니다.”
혁무진이 슬쩍 내 얼굴을 바라봤다.
“들리는 소리로는 수십 마리는 될 듯한데…… 늑대가 무리를 짓는 짐승이라지만 이상하긴 하군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늑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이라 먹잇감을 구하지 못했는지 대부분 갈빗대가 앙상하다. 하지만 그 본질은 맹수. 방심할 수 없다.
‘그것도 굶주린 맹수지. 애들이 다칠 수도 있겠어.’
생각과는 반대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무림인들이 널리고 널린 곳이지만 설마 짐승까지 무공을 익혔을까.
느낌 운운할 것도 없이 손쉬운 상대인 것이다.
‘레이드 좀 안 뛰었다고 감 다 죽었네.’
나는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맹렬히 뛰어오는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벌써부터 경험치 덩어리로 보인다.
“빨리 끝내자. 응?”
저 멀리 선두에서 달려오는 늑대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덩치를 보아하니 저놈이 우두머리다.
– 크허엉!
아니 무슨 늑대가 사자처럼 울어. 설마 뭐 영물, 그런 건가? 설마 나 짐승한테 지는 거야?
‘그건 안 되지.’
침을 삼키며 창을 곧추세웠다.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눈에 힘을 빡 주고 목소리를 깔았다.
“와라.”
효과는 굉장했다!
– 크르르르.
달려오던 놈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숲속으로 뛰어든다. 수십 마리의 부하 늑대들도 우두머리를 따라 우르르 사라졌다.
아니, 이건 도망친 거다. 눈 위에 무수히 찍힌 발자국들 위로 찬 바람이 불었다.
‘뭐야, 이거.’
산 채로 씹어 먹을 것처럼 달려오더니 왜 도망쳐?
그때 문득 모 유명 만화가 생각났다. 과잉 행동 장애를 앓고 있는 고무 인간이 해상 공권력을 박살 내는 스토리.
“서, 설마 거기에 나오는 그거?”
기운만으로도 적을 겁먹게 만들고 기절시키는 그 능력.
워낙 정신 나간 게임이니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그럼 이 시점에서 시스템 알림 한 번 울려 줘야 하는데…….
띠링.
그렇지! 나는 기대에 부풀어서 시스템 음성을 기다렸다.
해괴한 표정을 한 정찰조원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떠라, 떠라, 떠라!”
떴다.
퀘스트창이.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퀘스트
[일문일살 조필]끈질긴 추격전이 끝났습니다. 당신은 이 잔인하고 집요한 추격자들과 맞닥트렸고, 일문일살 조필을 상대해야 합니다.
부디 명복을…… 아니, 무운을 빕니다.
등급 : 절정
제한 : 진태경
임무 : 생존 (미완료)
보상 : ???
실패 : 사망
– 당신은 퀘스트를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 퀘스트가 강제 수락되었습니다!
“……어?”
이게 무슨 일인가.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순간 수많은 물음이 떠올랐고 사라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만났군.”
앙상한 나무 옆,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십여 장의 거리.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 문제는 아무도 그의 존재를 몰랐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도대체 언제?’
레벨과 무공의 경지가 오를수록 오감(五感)은 날카로워졌다. 그런데 저 남자는 감지해 내지 못했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퀘스트창이 뜨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뒤돌았을 것이다.
‘늑대들.’
그 짐승들은 도망친 것이다. 내가 아닌 저 남자를 피해서.
아까부터 떠나지 않던 불안감이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고, [기감]은 쓸 필요도 없었다. 나는 이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조필?”
남자, 일문일살 조필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금까지 내가 만난 절정 고수는 셋이다.
진위경, 위팽, 그리고 대장로. 셋 모두 외관상 절정 고수다운 풍모를 지닌 자들이다. 하지만 일문일살 조필은 달랐다.
‘평범해.’
진위경 같은 거인도, 위팽처럼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도 아니었고 대장로처럼 은빛 수염을 기르지도 않았다.
일문일살 조필은 적당한 키에 평범한 인상의 소유자였고, 그래서 더 위험해 보였다.
“반갑네.”
조필이 환하게 웃으며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훌쩍 물러났다.
“민첩하군. 반응도 좋고. 마음에 들어.”
가슴이 쿵쾅거린다. 긴장한 탓인지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가오지 마.”
“미안하게 됐네.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만.”
난 하나도 안 반갑다.
“너무 긴장하지는 말게. 단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니까.”
“이야기?”
“그래. 자네를 만나고 싶었거든.”
조필 입장에서는 만나고 싶긴 했을 거다. 불과 며칠 전 수하 스무 명을 잃었으니까.
‘시발. 좆 됐네.’
저런 고수가 나를 찢어 죽일 생각에 이틀 밤낮을 쫓아왔다고 생각하자 속이 울렁거렸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조필!”
크게 소리치자 등 뒤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진다. 조필이 다 안다는 듯 웃었다.
“내 정체를 저들에게 알린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이류, 삼류. 전부 머저리에 쓰레기들이야.”
정찰조원들의 수준을 정확히 짚어 낸다. 이 자식도 시스템을 사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지 말고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떤가? 자네에게 궁금한 게 많거든.”
“대화? 시간을 벌려는 건 아니고?”
“시간을 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 당신이 수하들을 기다린다는 말이지.”
정곡을 찔린 듯, 조필의 콧잔등이 실룩거렸다. 맞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 놈은 혼자다. 약간의 희생을 감수한다면 충분히…….
“기다려? 내가? 그 약해 빠진 놈들을?”
“……뭐?”
“앞서 말하지 않았나. 전부 머저리에 쓰레기들이라고. 노력도, 재능도 없는 구제 불능의 인생들이지.”
“…….”
“흑산도 그놈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사람 보는 눈이 없었으니 죽어도 싸. 고수를 못 알아본 죄로 녀석의 눈을 찢어 주고 왔지.”
정정한다. 일문일살 조필은 위험해 보이는 게 아니라 존나 위험한 새끼다.
‘이건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현실에서도, 게임에서도 조필 같은 놈은 처음 봤다. 천연덕스러운 말투와 태도. 놈은 인간을 도구 취급하는 사이코패스다.
“아무튼 자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걸세. 느려 터진 놈들이라 쫓아오려면 반 시진은 걸릴 거야. 모든 게 끝난 후겠지.”
하나는 확실하다. 놈이 생각하는 결말에 자신의 죽음은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
“어떤가?”
“만약 거부한다면?”
조필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자네한테 실망하겠지. 아주 많이.”
실망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후배. 나는 자네에게 어떤 원한도 없어. 아니, 오히려 호감이 있는 편이지. 몇 가지만 사실대로 대답해 주면 보내 줄 수도 있네.”
“잠깐. 보내 준다고?”
“그래.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고 멀쩡히 돌려보내 주지.”
“……정말로?”
“내 목을 걸지. 이 정도면 됐나?”
조필의 얼굴에서 진심이 묻어 나온다. 사이코패스에 종잡을 수 없는 놈이지만 어쩌면 모두가 무사히 살아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지.”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싸우기밖에 더 하겠나. 잠깐 시간을 벌면서 놈의 약점을 읽어 낼 생각이었다.
“좋아. 말이 통하는 친구로군, 하하.”
조필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왼쪽 허리춤에 찬 검갑이 흔들거린다.
‘오른손잡이. 검수.’
그렇게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해 나갔다.
“먼저 자네 나이를 묻고 싶군.”
“스물.”
조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 약관에 그 정도 경지라니. 대단하군.”
헌터 생활 7년 동안 F급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게임에서는 무공의 천재 취급 받는다. 묘한 기분이다.
“복장을 보아하니 태원진가의 인물인 것 같은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약관에 초일류의 경지라. 그 유명한 진천검은 아닐 테고…… 자네 이름이?”
“진태경.”
“진태경. 진태경.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조필이 탄성을 내뱉었다.
“망나니 삼공자! 그게 자네라고?”
“망나니는 아니고. 요즘은 잠룡 소리 듣고 있지.”
“푸하하! 그럼 그렇지. 태원진가, 그 고지식한 작자들이 독살은 무슨. 누가 짜 놓은 판인지는 몰라도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조필은 흡족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자네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 그건 전부 위장이었나?”
“……뭐, 그렇지.”
“좋아. 숨겨진 칼이라 이거지. 마음에 들어. 무공은 언제부터 익혔나?”
“칠 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무림으로 따지자면 헌터들의 전투법도 일종의 무공이니까.
“칠 년이라. 스승은?”
“없어.”
“스승이 없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조필이 말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솔직하게 대답하면 살려 준다. 당신이 했던 약속 아닌가?”
“그래, 그랬지. 황당하면서 재밌는 이야기야. 태원진가의 직계가 스승도 없이 약관의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올랐다…… 허, 참.”
입이 바짝 타들어 간다. 창을 꽉 움켜쥐고 조필의 몸을 훑었다. 지금의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점투성이다. 하지만 정말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까?
‘내가 먼저 달려들기를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조필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으하하! 좋아. 마음에 들어. 약속은 지키지.”
약속을 지킨다고?
설마 했던 일이 사실이 될 줄이야. 나는 멍한 얼굴로 조필을 바라봤다.
“그렇게 볼 것 없네. 사실 처음에는 자네를 꼭 죽이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 더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거든.”
조필이 호의가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이런 걸출한 인재를 죽이기에는 아깝지.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이런 상황이라니?”
“아, 자네는 모를 수도 있겠군. 복귀하면 알게 될 거야. 그럼 가 보게. 다음에 볼 때는 좀 더 성장해 있길 바라지.”
가도 된다고? 정말로? 나는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뒷걸음질 쳤다. 조필은 웃으며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송사리를 놓아주는 낚시꾼의 그것 같았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더니.’
조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 탈출구가 될 줄이야.
안전거리가 확보되자 참았던 숨이 토해졌다. 하지만 숨 돌릴 틈도 없다. 1초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한다.
“이동한다. 빨리!”
하지만 다음 순간이었다.
“이보게. 후배.”
조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뭘 하는 건가?”
“뭘 하다니. 그야 당연히 약속대로 돌아가는…….”
“내가 허락한 건 자네 혼자야.”
“……뭐?”
“이래 봬도 고용된 처지거든. 맡은 임무는 완수해야지.”
임무라니. 설마?
“삭주 지부의 생존자 셋. 그리고 자네가 수하라고 부르는 저 쓰레기들은 두고 가게. 이틀간 수고한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나?”
어린아이처럼 맑던 눈동자가 번뜩인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은 포식자의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리 말해 두지. 거부한다면 내가 아주 실망하게 될 거야.”
나는 멍하니 조필과 정찰조원들, 그리고 어린 남매와 죽어 가는 공야청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짧았지만 수십 번의 고민과 갈등 끝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럼 실망해, 이 시발 새끼야.”
조필이 광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