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297
#296화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걸까.
이름도, 가족도, 친구와 연인도……. 심지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삶을 살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길고 깊은 어둠을 지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숲이었다.
‘이곳은 어디지?’
의문은 잠시뿐이었다.
이내 그는 몬스터의 본능에 사로잡혀 목적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한때 자신의 모습이었던 인간과 싸웠고, 몬스터들과도 싸웠다.
살아생전 뛰어난 기사였던 그는 마력을 키워 나가며 더욱더 강해졌다. 광활한 검은 숲의 주인이자, 숲에 잠든 모든 망자를 조종하는 흑마법사조차 넘어설 정도로.
– 이, 이놈! 감히 스켈레톤 나이트 따위가!
– 그. 아. 아. 아. 아!
퍼걱!
타락한 기사는 그렇게 검은 숲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선택받은 존재로 발돋움했다.
해골 군단의 사령관. 스켈레톤 워로드가 그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이런 기분이었나?’
놀라웠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변화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검은 숲에 흐르는 마력이 한층 짙어졌고 뼈밖에 남지 않은 몸에도 강대한 힘이 넘쳐흘렀다.
이렇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그에게, 몇 안 되는 인간의 무리 따위는 하찮기 그지없었다.
‘수도 적고 다들 겁에 질려 있군.’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이미 망자가 되어 버린 그에게 인간들의 그런 모습은 우스울 따름이었다.
‘도망쳐라. 그리고 더, 더 많은 목숨을 내게 가져오라!’
이제 그는 검은 숲의 주인이자 망자들의 사령관이었다.
저들이 데려오는 더 큰 인간의 무리는 곧 자신의 병력이 될 테다. 휘하에 수천, 수만의 망자를 거느리게 된다면…… 검은 숲이라는 영토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망자들의 사령관이 아닌, 진정한 군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이곳을 나가 더 넓은 영토를 정복해 주마.’
바로 그때였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오십여 명의 인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의 눈에 한 인간이 들어온 것은.
‘저놈은…….’
스켈레톤 나이트 셋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받는 인간.
참으로 신기하게도, 괴상한 언어를 구사하는 다른 인간과는 달리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괜찮아! 어서 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토록 능숙한 마계어라니.
혹시 인간의 모습을 한 몬스터인가?
그는 진태경에게 적용된 시스템의 존재를 몰랐고, [통합 언어 팩]의 기능은 더더욱 몰랐다.
단지 인간치고는 쓸 만해 보이는 저놈을 망자로 만들어 수하로 거두고 싶을 뿐이었다.
– 어. 리. 석. 구. 나. 인. 간. 이. 여.
하지만 그는 알았어야 했다.
어리석은 것은 바로 자신이었음을.
“휴. 드디어 다 갔네.”
– ……응?
이 좁은 오솔길에, 모든 병력을 이끌고 들어오지 말아야 했음을.
“너희는 여기서 다 뒈진다. 뭐, 그것만 알면 돼.”
– 뭐. 라. 고?
의문에 대한 답은 곧 알게 되었다.
“일섬(一殲).”
솨아아아!
푸른 화염을 머금은 용오름이 솟아오른 순간, 스켈레톤 워로드는 엄습해 오는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 이미 두려움의 대상이기보다 친구가 되어 버린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 모. 두. 피. 하……!
워로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오솔길을 휩쓴 푸름 화염이 그와 수백의 스켈레톤을 덮쳤다.
콰아아아아!
* * *
– 모든 공력과 체력을 소진했습니다!
– 상태 이상. [탈진]에 빠졌습니다!
– [Lv92. 스켈레톤 나이트]를 처치했습니다!
– 상당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Lv75. 스켈레톤 워리어]를 처치했습니다!
–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Lv78. 스켈레톤 메이지]를 처치했습니다!
– 소량의 경험치를……!
.
.
.
띠링. 띠링. 띠링.
끊임없이 귓가를 파고드는 시스템 알림.
순간 눈앞이 핑 돌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손에 든 창대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이야.
나는 스르륵 고꾸라지는 창날을 간신히 지면에 박아 넣어 몸을 지탱했다.
‘시벌, 죽겠다.’
일섬은 내가 가진 유일, 최강의 스킬이다. 공력과 체력을 원료로 삼아 그 어느 때보다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다.
처음과 달리 무공의 경지가 높아지면서 부여하는 힘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그 후유증은 여전히 막심했다.
‘일섬은 파괴력만큼이나 위험해.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으로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지.’
최소의 힘으로 최대의 결과를 끌어내는 것이 최선이다.
늘 효율적인 전투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일섬을 남발할 수 없었다. 최후의 한 수라는 것은, 실패한다면 다음이 없다는 것과 같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써.’
좁은 오솔길.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수백의 몬스터.
일섬을 쓰라고 만들어 준 무대나 다름없었다. 전력을 기울인 대가로 [탈진] 상태에 빠지기는 했지만…… 모든 행동에는 대비책이 있기 마련이다.
띠링.
– 대량 학살!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 레벨 업!
–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모든 상태 이상이 회복되었습니다!
기다리던 알림과 동시에 청량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솨아아아.
일섬의 후유증으로 텅 비어 있던 단전이 차오르고 덜덜 떨리던 사지에 힘이 돌아왔다.
그제야 새하얗게 물들어 있던 시야가 밝아지며 일섬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거 상상 이상인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타닥, 타다닥.
일섬의 위력으로 인해 폭이 두 배나 넓어진 오솔길.
주위에 가득하던 거대한 나무와 바위는 뽑혀 나갔고, 온통 검게 그을린 대지 위에는 불길에 휩싸인 뼈 무더기가 천천히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도대체 한 번에 몇 마리를 골로 보낸 거야?’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아니지. 이미 죽은 언데드 몬스터들이니 움직이고 있는 놈들로 정정해야겠다. 어쨌건 그런 놈들은 오십여 마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전투 불능 상태나 다름없었다.
‘한…… 삼백 마리쯤 처치한 건가?’
시스템이 대량 학살이라고까지 한 이유를 알겠다.
물론 그 거창한 단어 선택에 비해 경험치는 쥐꼬리만큼 줬지만.
“겨우 레벨 업 한 번이 뭐냐. 쩨쩨하게.”
나는 혀를 차며 남은 스켈레톤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갈수록 레벨 업 요구 경험치가 산더미처럼 불어나는 지금 상황에선 잡몹 하나하나가 아쉽다.
– 끼이이익. 끼긱.
콰직!
두 다리를 잃은 채 열심히 기어가는 스켈레톤의 골통을 부쉈다.
띠링.
– [Lv73. 스켈레톤 워리어]를 처치했습니다!
– 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염병. 경험치 진짜 짜게 주네.
투덜거리며 다음 몬스터를 찾아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오. 오오. 설마 저것은……!”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흙더미에 처박힌 놈을 향해 다가갔다.
목만 남아 떨그럭거리는 스켈레톤.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던 녹색 귀화(鬼火)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팍 쪼그라든 상태였지만 정체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Lv.105 스켈레톤 워로드]나는 활짝 웃으며 머리통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반갑다. 친구야!”
– …….
“너 여기 있었구나!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왜 가만히 있었어!”
– 끽. 끼기긱?
이 영악한 새끼, 스켈레톤 워리어인 척하는 것 보소?
나는 짐짓 실망한 얼굴로 창날을 치켜들었다.
“아, 뭐야. 잡몹이었네. 그냥 죽여야겠다.”
– 잠. 깐!
“헉. 말을 하다니. 혹시?”
– 그. 렇. 다. 바로. 나다.
스켈레톤 워로드가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 검은 숲의. 주인. 망자들을 이끄는. 사령관. 워로드가. 이 몸이시다.
“와! 워로드!”
– 이제야. 나를. 알아. 보는가?
“와! 경험치!”
– ……무어. 라?
이상함을 느낀 워로드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 설마 이 몸을 죽일 셈인가?
이 새끼……. 다급하니까 말 매끄러워진 것 봐라.
“죽긴 누가 죽어. 넌 이미 죽은 몸인데.”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을 고쳐 죽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정몽주야?”
단심가 좀 읽어 본 놈인가.
내가 어이가 없어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워로드가 턱을 딱딱거렸다.
– 인간이여. 그러지 말고 나와 거래를 하는 것이 어떻겠나?
“거래?”
– 그렇다. 나는 그대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느니라.
“선제시.”
– 선제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뭘 줄 수 있는지 읊어 보라고. 듣고 결정하게.”
고민에 잠긴 듯 잠깐 말이 없던 워로드가 대답했다.
– 나는 숲의 지배자. 이 광활한 검은 숲을 그대에게 선사하마!
“검은 숲 우리 건데.”
– ……응?
“게이트 독점권 있어서 상관없어.”
– 게이트 독점권이라니.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나 숲의 주인이 되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아닌데. 난 몬스터 리젠 될 때마다 와서 몰이사냥 하는 게 훨씬 좋던데.”
– 모, 몰이사냥이라니! 그런……! 감히 인간 따위가 우리를 사냥한단 말인가!
“응. 지금도 한 놈 보낼까 생각 중이야.”
으드득.
놈의 머리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자 워로드가 턱을 격렬하게 떨며 다급하게 외쳤다.
– 잠깐! 잠깐만! 방금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까 달팽이관도 없는 놈이 소리도 들을 수 있냐? 신기한 놈일세.”
– 정수리 쪽에 금이 갔단 말이다! 이대로 가면 소멸하고 만다!
“와! 경험치 개꿀!”
– 이노옴! 이 몸은 검은 숲의 지배자요, 망자들의 사령관…….
까드득!
– 검은 숲의 지배자시여! 망자들의 군주시여! 자비를 베푸소서!
“…….”
이 새끼 태세 전환 속도 최소 혁무진급.
몬스터와 이렇게까지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라 굉장히 참신한 느낌이긴 한데, 장난도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인벤토리 오픈. 단검 소환.”
스릉.
시퍼런 검날을 눈앞에 들이대자 워로드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 뭐, 뭘 하시려는 겁니까?
“응? 별거 아냐. 눈 꼭 감고 가만히 있어. 금방 끝나니까.”
– 끄, 끝나다니. 뭐가 말입니까?
“어허, 쉿. 턱 가만히 있어. 뼈라도 잘리면 시세가 떨어져.”
전에 처치했던 와이번, 외눈박이 카루스의 사체는 금덩어리였지만 이 해골 놈은 딱히 어떤 부위가 비싼지 모르겠다.
‘그래도 네임드 몬스터의 두개골 장식이면 비싸게 팔리지 않을까?’
썩어도 준치라고, 뼈다귀 표면이 검은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게 제법 예쁘다.
우선 확실하게 소멸시킨 다음 근처에 뼈다귀부터 주울 생각이었다.
–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딱! 따다다다닥!
아, 거 새끼 참 시끄럽네.
쉴 새 없이 위아래로 요동치는 워로드의 턱을 꽉 붙잡으려던 그때였다.
– 겨, 경험치! 경험치를 드리겠습니다!
“응. 안 그래도 지금 받아 가려고 하는 거니까 가만히 있을래? 그리고 넌 경험치가 뭔지도 모르잖아.”
– 아닙니다! 제가 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부하들을 시켜서 구해 바치겠습니다!
“뭔 개소리야. 그건 물건이 아니라…….”
말을 이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 때문이었다.
설마 이게 되려나?
“너, 검은 숲의 주인이라고 했지?”
– 예. 예예!
“부하가 몇 명이나 되냐?”
– 전부! 전부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검은 숲을 돌아다니면 천 명도 넘게 소집할 수 있습니다!
“천 명이나?”
– 그것도 최소로 잡았을 때 천 명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스켈레톤 워로드.”
– 예. 사령관을 거역할 수 있는 병사는 없는 법. 하위 개체는 감히 제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
“흐음.”
– 검은 숲을 다 뒤져서라도, 아니 뒤엎더라도 원하시는 걸 구해 오겠습니다!
애절하게 일렁이는 놈의 녹색 눈을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야.”
– 넵.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 일이라면 어떤……?
“그런 게 있어. 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내 음험한 웃음에 워로드의 두개골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