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0
#29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조필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솜씨 좀 볼까.”
한 마디를 툭 내뱉은 조필이 지면을 박찼다. 십여 장의 거리가 두 걸음 만에 사라진다. 놈의 허리춤에서 섬광이 뿜어졌다.
쉭!
‘이게 뭐…….’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쭉 뻗은 창대가 섬광과 맞닿은 순간.
쾅!
굉음과 함께 몸이 뒤로 쏠렸다. 포탄처럼 날아가던 내 몸은 정찰조원들을 향해 날아갔다. 방패고 나발이고, 선두의 서너 명이 우르르 쓰러진다.
“으악!”
“조장! 괜찮으십니까!”
……괜찮겠냐.
‘와, 씨.’
진동이 가라앉지 않은 창대를 꽉 움켜잡았다.
섬광의 정체는 조필의 검이었다. 그리고 내 27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막았는데도 이 정도라고?’
잠깐이라도 반응이 늦었다면 지금쯤 북망산을 등산하고 있었을 거다.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어났다.
조필은 웃고 있었다.
“실망인데. 이 정도밖에 안 되나?”
그나마 ‘이 정도’라서 막아 낼 수 있었던 공격이다. 앞서 스무 명을 쓸어버리고 레벨 업을 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몰랐다.
‘시발, 잘못 걸렸네.’
내 경지는 이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두 명의 일류 고수를 손쉽게 이겼다. 시스템으로 얻은 무공과 능력치로, 그리고 내가 쌓아 온 전투 경험으로.
하지만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은 달라.’
모든 면에서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조필은 이소군이나 흑산도와는 격이 다른 존재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겁먹었군.”
겁먹었다고? 내가?
나는 손을 바라보았다. 창의 진동은 멎었지만 창을 움켜쥔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심장 소리는 너무 커서 모두에게 들릴 듯했다.
“그런 새가슴으로 어찌 풍진강호에서 살아남겠나.”
조필이 혀를 찼다.
“안 되겠군. 내가 힘을 좀 북돋아 주지.”
“뭐?”
“분노는 언제나 두려움을 이기거든.”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조필이 소매를 떨쳤다. 동시에 여러 개의 빛줄기가 튀어나왔다.
‘위험!’
머릿속 적색경보가 울리자마자 창을 휘둘렀다. 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몇 개의 비수가 튕겨 나갔다.
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컥.”
정찰조원 중 하나가 목을 움켜잡았다. 손가락 너머로 펑펑 솟구치는 핏물과 비수 한 자루가 보였다.
“크륵. 조……장. 크르륵.”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그가 무릎을 꿇었다. 아직 앳된 얼굴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사, 살려 주…….”
쉭, 퍽!
목과 미간에 비수가 박히고도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철퍽. 이제 막 녹기 시작한 땅에 그가 얼굴을 박았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어려 보이기에 골랐는데…… 아끼던 수하였나?”
조필이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거 안타깝군.”
“사실 이름도 몰라.”
“수하라면서?”
“NPC니까. 이름도, 나이도 알 필요 없는.”
“뭐?”
나는 시신을 뒤집어 눕혔다. 얼굴에 묻어 있는 흙과 눈을 털어 준 다음 부릅뜬 눈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의 조필에게 고백처럼 털어놨다.
“사실 만난 지 사흘밖에 안 됐어.”
“그런가?”
“그렇지.”
“그런데 자네…….”
조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화가 나 있나?”
놈의 말이 맞았다. 뱃속에서부터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머리고 가슴이고 뜨겁게 달궈져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저 녀석 이름이 뭐더라.’
정찰조에서 칠 호로 불리던 놈이다. 싫다는 녀석에게 억지로 방패를 들게 하고 틈틈이 수련시켰다. 어린 녀석이라 몇 번 칭찬해 주니 좋아서 헤벌쭉 웃곤 했었다.
‘이름이 뭐였지.’
나는 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다.
같은 고시원 주민들 이름도 다 모르는데 고작 며칠 본 NPC 따위. 기억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짜증이 난다. 화가 난다. 게임에서는 다를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내 팀원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애써 훈련시킨 이유도, 지난 며칠간의 노력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나는 입을 벌려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개새끼. 넌 뒈졌어.”
마지막 하나 남은 벽곡단을 씹어 삼켰다. 기력이 회복되었다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쿵-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았다.
* * *
조필은 사각(死角)에서 솟구친 창날을 튕겨 냈다.
캉! 카가각.
빠르고, 힘 있다. 기본기가 튼튼하고 전투 감각도 제법이다.
항산검문의 애새끼나 흑산도처럼 근본 없는 낭인이 당해 낼 수 있는 놈이 아니다.
‘태원진가…… 썩어도 준치라 이건가?’
조필은 여유롭게 창날을 피해 내며 생각했다.
태원진가의 몰락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때 산서성을 아우르던 위엄은 이미 사라졌고 남은 건 빛바랜 과거의 영광과 가물에 콩 나듯 출현하는 인재뿐이다.
눈앞의 진태경 같은.
‘재미있는 놈을 길렀어.’
약관에 이 정도 솜씨라. 이미 산서성 제일의 고수 소리를 듣는 진천검만큼은 못하지만 흥미로운 녀석이다.
나이를 떠나 보면 공력도, 무공도 어중간한데…… 싸울 줄 안다. 물러설 때, 나아갈 때를 정확히 알고 기회가 오면 투귀처럼 달려든다.
바로 지금처럼.
“핫!”
쉭- 팡!
얼굴을 노리고 번뜩이는 창날이 허공을 관통했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조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허, 이것 보게.’
창을 들고 찌르는 일련의 동작이 간결하고 물 흐르듯이 이어진다. 그뿐인가, 부드럽게 전신을 비틀어 힘을 폭발시키는 저 움직임은 전사경(纏紗勁)이다. 아직은 서툴지만 틀림없다.
‘약관에 전사경을?’
타고난 감각에 노강호를 연상시키는 전투 경험. 그리고 재능.
무서운 잠재력이다. 조필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진태경이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발, 뭐야 이거.”
“…….”
조필의 발이 꼬였다. 아차, 하는 순간 진태경의 창이 뱀처럼 파고들었다. 훌쩍 뒤로 거리를 벌렸지만 창에 실린 공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찌이이익!
처음으로 허용한 공격이다. 상의가 길게 갈라지며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아, 아깝다. 끝낼 수 있었는데.”
“…….”
아까워? 끝내? 다름 아닌 나, 일문일살 조필을 상대로?
입맛을 다시는 진태경을 보며 조필은 극렬한 분노를 느꼈다.
“이노오오옴!”
공력이 실린 고함에 숲속이 진동했다. 눈깔이 홱 뒤집힌 조필이 진태경을 향해 돌진했다.
* * *
조필의 옷을 길게 잘라 낸 순간, 시스템 알림이 울렸다.
띠링.
– [Lv.??? 조필]이 [광분]합니다!
– 지속 시간 동안 힘과 민첩이 상승합니다!
젠장. 여기서 더?
“크아아아!”
쾅- 콰광!
일격, 일격이 굉음과 함께 내리꽂힌다. 지면이 뒤집히고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눈깔이 허옇게 뒤집힌 조필은 말 그대로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니까 문제지.’
자그마치 절정 고수씩이나 되는 미친놈이다. 일대일 대결 시 전투 능력치를 10% 향상시켜 주는 칭호, [승부사]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콰아앙!
저건 무공이 아니다. 폭격이지.
그러나 지금의 조필에게 정교함은 찾아볼 수 없다. 간결하고 빠른 동작에 [광분]으로 인해 과한 힘이 들어가다 보니 동작이 크고 허점이 많아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틈만 보이면 되는데…….’
문제는 그 틈이 안 보인다. 꼭지가 돌아서 주변을 초토화시키는데, 피하는 게 고작이고 막을 엄두도 나지 않는다.
사정권에 들어가면 갈가리 찢겨 나갈 게 뻔했다.
“조장!”
“저희가 가겠습니다!”
달려오는 정찰조원들을 향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야, 오지 마! 오지 마! 물러나라고!”
저놈들이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와? 이미 허무하게 한 명을 잃었다. 정찰조의 전멸은 내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다.
그리고…….
‘저놈들 오면 승부사 칭호 효과가 사라지잖아!’
[승부사]는 일대일 대결 시에만 효과가 적용된다.지금도 근근이 버티는 형국인데 칭호 효과까지 사라지면 얼마나 더 견딜지 모르겠다.
“돌아가라고 이 새끼들아!”
고함과 함께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어김없이 조필의 검이 지면을 박살 냈다.
콰직!
“조장!”
한 박자 늦게 혁무진의 외침이 들렸다. 내 만류가 무색하게도 녀석은 이미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결연한 얼굴의 한엽도 보였다.
“야, 오지……!”
“조필, 이 악독한 놈!”
“조장에게서 물러나라!”
그러나 한발 늦었다. 온 힘을 다해 달려온 혁무진과 한엽이 내게 정신이 팔린 조필을 향해 각자의 병장기를 찔러 넣었다.
“죽어라!”
검과 창. 창과 검. 미리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좋은 타이밍에 좋은 공격이다. 하지만 딱 하나, 상대가 나빴다.
“감히! 이 쥐새끼들이!”
조필의 대응은 신속했다. 검을 그 자리에 꽂고 돌아섬과 동시에 양손으로 두 개의 무기를 후려친 것이다.
검과 창에 맨손으로 맞서는 건 자살행위다. 그러나 이곳 무림에서는 달랐다. 정확히는 절정 고수인 조필은 달랐다.
쩌적- 콰직!
고작 옆면에 손바닥이 닿았을 뿐인데, 조필에게 닿기도 전에 혁무진의 검이 조각나서 흩어졌다. 한엽은 창두가 싹둑 잘려 나간 창을 보고 경악한 얼굴로 변했다.
조필의 곧게 핀 수도(手刀)가 불러온 결과였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필의 양손이 두 사람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그들은 피 분수를 뿜으며 나무에 처박혔다.
“죽여 주마.”
스산하게 웃는 놈의 얼굴에선 더 이상 흰자위가 보이지 않았다. 광분이 풀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씨발…….”
점입가경. 첩첩산중. 사면초가. 조필 개새끼.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막으려면 내가 나서야 했다.
“조필-!”
전력으로 끌어 올린 공력이 빠르게 전신으로 뻗어 나간다. 땅을 박차고 놈을 향해 쏘아졌다. 조필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네놈부터 죽여 주마.”
하지만 나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 놈은 맨손이다.’
광분 상태에서 저지른 패착이다. 그리고 나는 놈이 등 뒤의 검을 뽑아 휘두르기 전에 모든 걸 끝낼 자신이 있었다.
다음 순간, 있는 힘을 다해 단전 안의 공력을 끌어 올렸다. 모든 힘을 오로지 창끝. 일점(一點)에 집중하고 뻗어 냈다.
“죽엇!”
진가창법의 마지막 초식, 천관일. 하늘을 뚫는데 조필의 심장이라고 못 뚫을까. 나는 확신했다.
‘이걸로…… 끝이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조필의 얼굴이 보였다. 놈은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
카가가각.
내 창보다 조필의 검이 더 빨랐다. 피를 머금은 붉은 칼날이 창대를 밀어 내며 안쪽으로 파고든다. 공력이 실린 창날이 허공을 찌른 순간.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가슴이 시원해졌다. 이내 격통과 함께 뿜어지는 핏물. 다행히 마지막 순간 몸을 뺀 덕분에 치명상은 피했다.
‘빌어먹을.’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내게 조필이 달려들었다.
쉬쉬쉭!
붉은 검광이 쏟아진다. 하나같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고 강력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창을 휘둘렀지만 기세와 무공, 모두 조필이 앞섰다.
서걱. 푹. 촤악.
번갯불이 전신을 가로질렀다. 어깨와 무릎, 옆구리를 쑤시고 베고 꿰뚫은 검신은 핏물과 함께 빠져나왔다.
“커헉.”
“무기를 놓치지 않았군. 칭찬해 주지.”
조필이 덧붙였다.
“이것도 버티면.”
다음 순간, 놈의 손이 내 가슴을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