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02
#301화
석고준은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할 수 있다.’
자그마치 30여 년 전이다. 대격변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가 이정룡을 만난 것이.
‘예전부터 너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나를 따라오지 않겠느냐?’
‘저를요?’
‘그래. 네겐 뛰어난 재능이 있어.’
그제야 알았다.
일개 고아인 자신이 어떻게 최고의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는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익명의 후원자가 누구였는지.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라가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네. 아저씨.’
‘앞으로는 스승님이라고 부르거라.’
그렇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또 다른 아이들과 섞여 난생처음 보는 동작들과 숨 쉬는 법을 익혀야 했지만, 석고준은 모든 것이 좋았다.
고사리 같던 손에는 물집이 잡혔고 이내 굳은살이 생겼다. 터지고, 아물고, 단단해지고…… 석고준의 인생도 그와 같았다.
고통만큼이나 단단하게 성장한 그는 이정룡의 오른편에 서게 되었다.
‘오늘부터 네가 경호팀장이다.’
‘제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주십시오.’
‘내 지시를 따르고, 내 지시를 거스르지 말아라. 그것이 전부다.’
스승, 이정룡의 대답은 석고준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그는 스승이 정해 준 이정표대로 살았다. 때로는 음지(陰地)에서, 혹은 양지(陽地)에서…….
이정룡을 위해 많은 일을 처리했고 언제나 빈틈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과대 포장하며 화려한 삶을 사는 헌터들과 달리, 자신의 실력을 숨긴 채 묵묵히 이정룡이 내주는 과제를 해결했다.
아레스 길드 내에서도 모두가 짐작만 할 뿐, 그의 진짜 실력을 아는 사람은 이정룡뿐이었다.
‘답답하지 않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내 곁에만 있는 것 말이다.’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네 실력이라면 당장 어디에서도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텐데.’
‘그런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언제나 스승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하하, 오늘따라 더 믿음직하구나.’
진심이었다. 경호팀 전부가 이정룡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석고준만큼 맹목적으로 그를 신봉하고, 존경하는 제자는 없었다.
뛰어난 실력과 결코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
석고준이 지닌 이 두 가지 덕목이, 아이러니하게도 이정룡의 지시를 거스르게 된 이유였다.
“스승님의 특별 지시가 아니었다면…… 넌 여기서 죽었어.”
“스승님? 아, 정룡이?”
“……!”
“정룡이 잘 지내냐? 슬슬 실버타운에 집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석고준에게 있어 이정룡은 부모요, 스승인 동시에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모시는 신을 모욕당한 광신도의 눈이 뒤집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찢어 죽일 놈이…….’
평화 길드와 충돌을 피하라고 했던 스승의 지시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순간, 그의 주먹에는 이미 오라가 맺혀 있었다.
“그때와 같을 거라 생각한다면……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석고준은 일주일 전, 병원에서의 짧은 격돌로 진태경의 실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승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 그는 당시 스스로가 가진 실력의 절반도 채 보여 주지 않았다.
지금 진태경은 그 방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전력을 다해, 단숨에 끝내 주마.’
뒷수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스승을 모욕한 놈을 처절하게 응징하고 싶을 뿐.
그리고 석고준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죽엇!”
후우웅!
무시무시한 파공성과 함께 그의 주먹이 빛살 같은 속도로 쏘아졌다.
진태경과의 거리는 고작 세 걸음.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놈의 모습은 무방비 그 자체였다.
느려진 세상 속, 가슴을 꿰뚫을 기세로 나아가는 석고준의 주먹과 달리 진태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끝났다, 애송아.’
그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맺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꽈앙-!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
그러나 석고준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반탄력(反彈力)과 함께 내부를 휩쓰는 용암 같은 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건…….’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고, 뜨겁게 달군 칼로 뱃속을 헤집는 듯한 고통이 덮쳐 왔다.
자신도 모르게 떡 벌어진 입을 통해 뭔가가 쏟아져 나왔다.
“쿠웨에엑!”
촤아악.
새우처럼 허리를 굽힌 채 속을 게워 낸 석고준은 눈을 부릅떴다.
피, 온통 피다. 바닥을 적신 검붉은 핏물 사이로 정체를 할 수 없는 희끄무레한 물체들이 보였다.
그 정체가 내장 조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이게 도대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고인 자신의 핏물을 바라보던 석고준의 시야에 불쑥, 한 사람의 발이 끼어들었다.
“후회하게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나?”
“……!”
“이상하네. 내 눈에는 별거 없어 보이는데.”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핏물을 밟고 있는 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뜨겁게 이글거리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내가 어떻게 단 일격에…….’
단 한 번의 격돌. 그것은 석고준이 지난 30년간 쌓아 올린 공든 탑을 잿더미로 만들 불기둥이었다.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석고준의 전신이 덜덜 떨렸다.
고통?
아니다. 지금 그를 지배한 것은 지금껏 단 한 사람, 그의 스승인 이정룡에게서만 느꼈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바로 그 두려움이 석고준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천천히 들어 올린다.
피 웅덩이에 잠긴 발. 강철처럼 단단하고도 곧게 뻗은 다리를 지나 맹수처럼 유연하고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상체가 보인다. 그리고…….
안광(眼光)이 있었다.
사방이 엷은 어둠에 휩싸인 검은 숲. 타오르는 불꽃을 담은 두 개의 눈동자가 석고준을 응시했다.
“네 스승에게 전해.”
귓가에 뜨거운 숨이 닿는다. 오직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숨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있는 한, 평화 길드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고.”
“……!”
석고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잔뜩 쉰 목소리가 피에 젖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대체…… 너는 뭐지?”
“나?”
잠시 후 들려온 대답은 그의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 화왕(火王)의 후인. 열화(熱火)의 후계자가 바로 나다.
마치 환청과도 같은 목소리.
석고준은 그것이 전음(傳音)이라는 것도, 그의 말이 품은 뜻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그저 한 가지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괴물…….’
익살스럽게 웃는 청년, 진태경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석고준의 신형이 썩은 고목나무처럼 무너져 내렸다.
* * *
스르륵. 쿵!
숨 막히는 정적이 내리깔렸다.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흔들리는 수백 쌍의 눈동자가 내 전신을 훑는다.
나는 혼절한 석고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짤막한 소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왜 까불고 지랄이야. 별것도 아닌 새끼가.”
“……!”
“……!”
삽시간에 얼어붙는 공기. 석고준에게서 시선을 뗀 내가 고개를 돌리자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사방에서 속출한다.
그중 한 사람의 반응은 유독 더 격렬했다.
“협회장님.”
“으헉!”
화들짝 놀란 이우중 서울 중앙 협회장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부, 부르셨습니까.”
“갑자기 왜 존댓말을 쓰고 그러세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 편히 하시던 분이.”
협회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기억 안 나세요?”
“요즘, 요즘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 자주 깜빡…….”
“아이고, 그러시구나. 그럼 오늘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도 벌써 다 잊으셨겠네요?”
“……!”
“표정 보니까 기억력 좋으신 것 같은데?”
이만큼 말했는데 못 알아들을 정도라면 지금 같은 고위직에 앉지도 못했을 터.
내 물음에 협회장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제가 알아서 입단속 시키겠습니다.”
“입단속이요?”
“헉, 그게 아니고.”
“같이 오신 분들도 다 기억력이 안 좋으시구나. 맞죠?”
“예에. 예. 그렇습니다. 저 친구들 다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예요. 다들 그렇지 않나?”
직속 상관인 협회장을 따라 게이트에 들어온 이백여 명의 협회 헌터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요. 제 이름도 기억 안 납니다.”
“잠깐,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마지막에 말한 놈 누구야.
나는 얼굴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거 잘됐네요.”
활짝 웃는 나를 따라 협회장도, 다른 헌터들도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보는 눈이 워낙 많았으니 이 정도로 입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다음은…….
“거기, 책임자 누굽니까?”
“납니다.”
앞으로 나선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인은 아레스 길드의 A급 헌터이자 팀장이었다.
그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와 쓰러진 석고준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석 팀장과 무슨 사정으로 얽혔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제대로 실수한 거요.”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정확한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나는 씩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뭘.”
“오늘 일을 부길드장님이 들으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걱정되지도 않소?”
“걱정은 아니고, 기대는 되네요. 이정룡 씨에게 꼭 보고하세요.”
내 대답에 중년인은 물론이고 뒤에 시립한 아레스 길드원 모두가 흠칫 놀랐다.
그게 이정룡을 부르는 호칭 때문인지, 천연덕스러운 내 태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들의 생각보다는 보고를 들은 이정룡의 반응이 더 궁금했다.
‘우리 정룡 아저씨. 골머리 좀 썩겠는데.’
이번 무대에서 이정룡에게 주어진 배역은 청소부다.
잡음이 새어 나가길 원치 않는 그로서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밖으로 소리를 퍼트리는 스피커를 꺼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일이 있고 보름도 안 돼서 다시 이빨을 드러내다니…… 대단해, 아주.’
최종 거래를 성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회가 오자마자 즉시 이빨을 들이대는 이정룡의 판단에 등골이 서늘해 진다.
‘만약 여기서 내가 정말 죽었다면?’
이 싸움은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평화 길드에게 아레스는 절대 당해 낼 수 없는 거인이니까.
동시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싸움, 잠깐이라도 마음 놓고 있다가는 그걸로 끝장이다.’
이 전쟁에는 종전(終戰)만 있을 뿐, 휴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들은 앞으로도 호시탐탐 이빨을 들이대리라는 것을말이다.
“후우.”
어쨌든 이것으로 최소한의 교통정리는 끝났다.
아니, 끝났다고 생각했다.
“…….”
“…….”
“…….”
“…….”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네 쌍의 시선. 그리고 설명을 요구하는 수십 쌍의 눈빛.
‘아, 우리 길드를 깜빡했네.’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나는 잠깐 동안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오줌 싸러 갔었어요.”
“…….”
순간 흐르는 침묵.
송송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전에 들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태경아.”
“응?”
“너 죽여도 돼?”
“……나가서 설명해 줄게.”
그래, 일단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