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06
#305화
“몸은 좀 괜찮나?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힘들다 싶으면 쉬게. 석 팀장이 아직 젊다지만 계속 무리하면 뼈 삭아.”
“면목 없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는 석고준을 힐끗 바라본 이정룡은 내심 혀를 찼다.
‘이렇게 쉽게 당할 줄이야.’
석고준은 이정룡이 갖고 있던 가장 쓸 만한 칼이었다.
비록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국내를 통틀어도 녀석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는 다섯도 채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중 두 사람은 천태민과 자신이다.
‘그런 녀석을 단 한 수로 쓰러트리다니…… 예상을 뛰어넘는군.’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태경과 평화 길드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힘의 격차는 가소로울 정도였으나 매번 물 먹는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이정룡의 시선이 고개 숙인 석고준을 향했다.
“고준아.”
석고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정룡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부길드장과 경호팀장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 간의 대화라는 뜻이다.
“예, 스승님.”
“넌 내가 심혈을 다해 가르친 제자다. 그 사실을 잊지 마라.”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스승님은 제게 부모 이상의 존재십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충직한 대답에 이정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제자지만 충성심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뤄 뒀지만…… 이제는 좀 더 날카롭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넘어진 것이다. 다시 일어설 힘을 네게 주마.”
“힘, 이라고 하셨습니까?”
“우선은 그렇게 알고 있거라. 네 손으로 진태경을 쓰러트리게 만들어 줄 테니.”
“……!”
몸을 부르르 떤 석고준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 스승은 널 믿고 있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거라.”
따스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정룡의 눈동자는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석고준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문밖으로 희미한 인기척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제야 오는군.”
이정룡의 중얼거림에 석고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약속했던 시간을 어겼습니다.”
“놔두게. 이제 겨우 임기 첫해야. 레임덕(Lame Duck)이 오기 전에 마음껏 누리려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스승님을 기다리게 만들다니…….”
“석 팀장. 본분을 지키게.”
“알겠습니다.”
이정룡의 제자에서 아레스 길드의 경호팀장으로 돌아간 석고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중 선두에 있던 중년인이 이정룡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악수를 청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따라 길이 좀 막히더군요. 경호 차량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하하.”
정중하면서도 자신감에 가득 찬 태도와 말투. 아레스 길드의 실질적 수장인 이정룡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단 중년인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었다.
이정룡은 엷은 웃음과 함께 그의 손을 맞잡았다.
“별말씀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대통령 각하.”
대한민국의 27대 대통령이자 만 40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당선 기록을 수립한 백한성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정룡 부길드장님. 올해 초 취임 선서 때 뵙고 처음인가요?”
“맞습니다. 생각보다 자주 뵙는군요.”
“네? 하하.”
이정룡의 대답을 들은 백한성이 실소를 흘렸다.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정룡이 얼마나 강력한 권한을 쥔 거물인지.
오죽하면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두 사람이며, 아레스 길드 하우스가 또 다른 청와대라는 말까지 나오겠나.
‘전임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청와대를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었지.’
대형 길드는 무력과 재물로 쌓아 올린 철옹성이다.
그중에서도 아레스 길드를 손에 쥐고 흔드는 이정룡의 위상은 과거 재벌 총수들이 지녔던 그것을 뛰어넘는다.
그런 이정룡을 지금처럼 비공식적이나마 마주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백한성이 국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임기 초기 대통령이라서, 둘째는 서로가 상부상조할 수 있는 주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늙을수록 여유가 생긴다는데, 저는 아닌가 봅니다.”
“역시 시원시원하시군요.”
이정룡이 넌지시 건넨 말의 뜻을 파악한 백한성이 새하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샤오 양(Shao Yang) 주석이 보낸 비공식 외교 서한입니다.”
“역시 비공식이군요.”
“예, 아시다시피 그렇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식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은 여전히 뿌리 깊은 공산 국가다.
그리고 공산당 지도부는 인민이 동요하는 것도, 공산당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 정도 규모의 피해를 용케 숨기고 있군요.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 중국 전역이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어요.”
그러나 이미 이 사실을 아는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쓰촨성 대참사’로 불리는 중이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대지진으로 발표하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하여 인근을 틀어막은 상태지만.
“리치(Lich)라고 하던가요? 그 네임드 몬스터가 의도치 않게 중국 중앙위원회를 도운 셈이 됐습니다. 미국 인공위성으로도 내부를 파악할 수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공간 왜곡 마법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그렇군요. 아직 마법에 관해서는 통 문외한이라.”
“중앙위원회를 도왔을지는 몰라도 전황(戰況)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겁니다. 그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니까요.”
느긋하게 대답하는 입과 달리 이정룡의 눈은 빠르게 서류에 적힌 활자를 훑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내용을 확인한 그의 입술 사이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A급 헌터 30명, B급 헌터 200명이라…….”
중국에서 날아온 서류의 정체는 계약서였다.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겠다는 계약서.
그리고 그곳에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항목도 있었다.
“저를 지목했군요.”
백한성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 군사 위원회에서 강력히 주장했다고 합니다. 이번 일엔 아레스 길드와 이정룡 부길드장님의 역할이 결정적일 거라고요.”
“그렇겠지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다급하게 흘러가고 있으니.”
“부길드장님께서도 익히 아시겠지만, 중국은 보유한 헌터의 머릿수에 비해 정예화가 그리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중국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지요.”
탁. 탁. 탁.
이정룡의 손가락이 느린 템포로 서류 위를 두드렸다.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중국이 요청하는 전력은 아레스 길드 전체 전력의 2할.
아니, 이정룡이 가세한다면 5할까지 솟구친다. S급 헌터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스물이 채 되지 않는 절대 강자니까.
‘어지간히 몸이 달았나 보군.’
중국의 제안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이정룡은 사흘 전, 주한 중국 대사와 비밀리에 회동했다. 제안과 함께 봤던 영상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엄청난 마법이었다.’
수천이 넘는 몬스터를 휘하로 부리는 통솔력. 압도적인 파괴력의 마법.
대격변 당시 겪었던 리치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 한 번의 마법이었지만 이번 일이 지닌 위험성을 알기에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위험에는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법이지.’
독재 국가에 둥지를 마련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
‘쓰촨성 대참사’는 누군가에게는 재앙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그리고 중국이 제시한 조건은 달콤했다. 경쟁자들에게 빼앗길까 봐 우려될 정도로.
‘어차피 내가 있는 한, 이 일은 실패하지 않는다.’
마침내 생각을 끝마친 이정룡이 입술을 뗐다.
“중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백한성 대통령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아레스 길드가 이번 일에 큰 공을 세운다면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임기 내 굵직한 업적을 세우고 싶은 그로서는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조국과 대통령 각하께 도움이 된다니,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지요. 그런데…….”
다음 순간 이어진 이정룡의 말에 백한성의 웃음이 흐려졌다.
“저희 아레스 길드뿐만 아니라 국내 10대 길드 중 몇 군데에도 비슷한 제안이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
“헛소문이라는 건 압니다만, 혹시나 해서 각하께 여쭤보는 겁니다.”
잠시 침묵하던 백한성이 대답했다.
“근거 없는 소문이 새어 나갔군요.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그 순간, 백한성의 등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은 생각했다.
내일 있을 국내 10대 길드장들과의 비공식 만남은 일정에서 삭제해야겠다고.
거슬리는 잔가지들을 쳐 낸 이정룡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역시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당장 필요한 인원을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백한성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0대 길드에 관한 말은 헛소문이지만, 아주 근거 없는 말은 아닙니다.”
서류를 정리하던 이정룡이 멈칫했다.
“그 말씀은?”
“중국의 제안을 받은 길드 중에, 10대 길드에 속하지 않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설마.”
순간 이정룡의 뇌리를 번쩍 스치는 한 줄기 생각.
동시에 백한성의 입술이 열렸다.
“바로 진태경 헌터가 소속된 평화 길드입니다.”
“……!”
이정룡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또다. 다시 한번 놈이 그의 앞길을 알짱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최민우라는 이름보다, 진태경, 세 글자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것참, 곤란하군요.”
이정룡의 목소리는 사포처럼 꺼끌거렸다.
유통기한이 5년밖에 되지 않는 새파란 대통령은 알면서도 그 사실을 막지 않았다.
반(反) 아레스 노선을 취하는 신임 대통령의 정치 성향은 알지만, 이건 숫제 척을 지자는 것 아닌가?
이정룡은 큰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각하.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할 문제가 아닌…….”
이어지려던 이정룡의 말은 백한성의 태연한 대답에 가로막혔다.
“배 주인이 직접 부른 사공이라 제가 어찌할 방도가 없더군요.”
“배 주인이라면…… 설마?”
“예. 샤오 양 주석이 직접 지명했습니다. 이정룡 부길드장님과 아레스. 그리고 진태경 헌터만큼은 반드시 참가시켜 달라고요.”
“……!”
파르르 떨리는 이정룡의 눈꺼풀.
그 모습에 백한성 대통령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대선에 당선된 그 순간의 짜릿함을 느꼈다. 그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시계를 내려다봤다.
“평화 길드는 워낙 영세한 곳이라 그런지, 준비도 빠르더군요. 지금쯤이면 이미 항공편에 탑승했을 겁니다.”
* * *
– 너, 간악한 인간이여.
“와. 여기가 퍼스트 클래스구나.”
– 네놈을 간악하고, 멍청한 인간이라 생각했던 본 사령관의 판단이 틀렸다. 내 정중히 사과하마.
“키야. 쿠션 죽이네. 술은 어떤 거 있어요?”
– 네놈은 미친 인간이다. 미친 자. 미친놈. 미친 새끼!
“좌석 넓은 것 봐. 여기서 살아도 되겠네.”
– 이 미친 인간아! 가지 말라고!
아, 거 더럽게 시끄럽네.
인벤토리 안, 스켈레톤 워로드의 절규를 못 들은 척하며 최 팀장에게 물었다.
“이거 한 대에 얼마나 해요?”
최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이름 높은 독일 항공 제조사 포케불프의 신형 모델은…….”
또 시작이네.
나는 포케불프의 창립자에 관한 설명을 듣기 전에 냉큼 말을 잘랐다.
“아니, 포케불프인지 포켓몬 블랙 프라이데이인지는 모르겠고, 보통 이런 비행기는 얼마나 하냐고요.”
“저희가 지금 타고 있는 항공기 같은 경우에는 1000억이 약간 넘을 겁니다.”
“음. 한 대 사야겠다.”
누가 들었으면 미친놈 보듯이 쳐다봤을 거다.
하지만 불가능한 얘긴 아니다.
나는 불과 몇 시간 전 최 팀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안타깝긴 한데, 종석이 아저씨한테 못 간다고 전해 주세요.’
‘종석이 아저씨가 아니라 샤오 양 주석입니다. 그나저나 정말 안타깝군요.’
‘저도 안타깝네요. 제 이름 알리는 것도 좋고, 길드 위상 높이는 것도 좋은데 저기는 좀.’
‘백억을 제시했습니다.’
‘얼마요?’
‘백억입니다. 약속한 기간인 일주일을 넘어가면 주급 백억으로 더 계산됩니다.’
‘주급? 주급이 백어억?’
‘어쩔 수 없죠.’
‘그, 그래도 안 가요. 몬스터 수천 마리에 미친 해골 마법사까지 있으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좀. 내가 무슨 돈에 환장한 놈도 아니고.’
‘리치를 잡는 사람에게는 50조를 지급하겠답니다.’
‘아, 갑자기 매운 거 땡기네. 사천 지방 요리가 그렇게 맵고 감칠맛이 난다던데…….’
‘…….’
‘시발, 갑시다.’
모든 준비가 전광석화처럼 끝났다. 나와 최 팀장만 중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어차피 샤오 양 주석이 원한 것도 원래는 나 혼자뿐이었다.
‘이건 돈 때문이 아냐.’
고통받고 있을 중국 국민, 그리고 길드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 가는 것뿐이다.
나는 사명감에 찬 얼굴로 최 팀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팀장님.”
“네?”
“만약에 제가 50조 벌면. 이것도 길드랑 나눕니까?”
“…….”
“확실하게 하고 갑시다. 돈 문제는 깔끔해야 돼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최 팀장이 대답했다.
“구 대 일로 나누죠.”
이 인간도 어지간하네.
우리가 서로를 인간쓰레기처럼 바라보던 그때, 기내 방송과 함께 중국에서 보낸 전용기가 이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