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07
#306화
보잉 747-8 VIP의 거대한 동체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엉덩이를 들썩거리던 진태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부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와, 이건 비행기가 아니라 호텔 스위트룸 수준인데? 팀장님, 여기 봐요. 침대도 있어요!”
연신 탄성을 터트리는 그의 모습에 최민우는 이마를 짚었다. 누가 보면 전쟁터가 아니라 해외여행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그, 음…… 진태경 씨?”
“잠시만요. 여기 술 뭐 뭐 있나 좀 물어볼게요.”
중국 중앙 위원회에서 보낸 전용기에는 중국인 스튜어디스 세 명이 있었는데, 진태경은 그중 한 명을 부르더니 유창한 중국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니, 저 정도면 현지인 수준인데.’
중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 해도 무방한 어휘 구사력.
언어에 재능이 있는 최민우도 몇 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편이지만 진태경만큼은 아니었다.
공부도 못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저 정도의 중국어 회화를 언제 익힌 걸까?
깜짝 놀란 최민우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까 애초에 몬스터와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잖아.’
유수의 언어 학자들도 골머리를 싸맨다는 마계어(魔界語)를 쌍욕까지 섞어 가며 쓰는 사람이 바로 진태경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봤더니, 기업 비밀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그게 마음 편해.’
뭐든 포기하면 편안해지는 법. 어차피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때가 되면 알아서 알려 주겠지 싶었다.
자포자기한 최민우는 스튜어디스가 따라 주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이건 무슨 술입니까? 색이 투명한 걸 보니 보드카 종류 같은데.”
“첫이슬 후레쉬요.”
“…….”
“설마 했는데 소주가 있더라고요. 역시 첫이슬은 온더락으로 마셔야 제맛이지.”
진태경은 내부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쉴 새 없이 쏟아붓는 모습에 기가 질린 최민우가 물었다.
“술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습니까?”
“지금 미리 마셔 두는 거죠. 왔다 갔다 하기도 귀찮고.”
“네?”
“아니에요. 아무것도.”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진태경이 물었다.
“대여섯 시간쯤 걸린다고 했죠?”
“일단 쓰촨성 청두(成都) 국제공항까지는 그렇습니다. 유사시에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고요.”
“유사시라면?”
“하나밖에 더 있겠습니까.”
지금 최민우가 말한 유사시의 상황이란, 리치(Lich)가 이끄는 몬스터 대군이 청두를 점령했을 경우를 뜻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지금쯤이면 엄청난 숫자의 인민해방군과 헌터들이 그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1억 명의 인구와 한반도의 두 배에 달하는 면적.
청두시는 바로 그 쓰촨성의 행정수도다. 청두가 넘어간다면 쓰촨성이 점령당한 것과 같다.
최민우의 말을 들은 진태경이 손을 내저었다.
“에이, 가능성을 따지면 안 되죠. 그랬다면 몬스터 웨이브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항상 최악을 보세요. 최선을 가늠하지 마시고.”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한마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진태경의 입에서 나오니 느낌이 달랐다.
뭐랄까, 허술함에 가려진 철두철미함과 백전노장 같은 노련함이 묻어 나온다고 해야 할까.
‘묘한 사람이야.’
최민우는 간혹 진태경이 기이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실력과 전투 경험의 문제가 아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면 위기를 한두 번 헤쳐 나간 사람이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문득문득 들고는 했다.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최민우의 새삼스러운 눈초리에 술잔을 기울이던 진태경이 멈칫했다.
“왜요, 보드카로 드려요?”
“아닙니다. 첫이슬도 괜찮네요.”
“그렇죠? 이게 깔끔한 맛이…….”
진태경이 말을 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이거.”
“……?”
“팀장님한테 한 말 아니에요. 어떤 놈이 자꾸 시끄럽게 꽥꽥거리는 바람에.”
최민우가 스튜어디스들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스켈레톤 워로드 말입니까?”
“네. 아까부터 엄청 난리 치네요, 중국 가기 싫다고.”
“리치 때문이군요.”
“같은 네임드라고 해도 클라스가 다르니까요. 거기다가 상위 언데드 몬스터고.”
리치가 범털이라면 스켈레톤 워로드는 개털이다. 아무리 네임드 몬스터가 되었다고 해도 근본부터가 다른 법.
게다가 이번에 나타난 리치는 과거 대격변 당시의 리치와는 궤를 달리할 만큼 강하다.
최민우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진태경 씨.”
“아, 닥치라고! 예?”
“요즘 뭔가 어긋나고 있습니다.”
“허리 나가셨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가.”
“아, 분위기. 저도 그래요.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별 거지 같은 새끼들이 사방에서 지랄발광을…… 아, 네 얘기 아니니까 조용히 하라고.”
갑자기 찾아오는 두통에 최민우는 미간을 문질렀다.
“게이트와 몬스터에 관한 부분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보이지 않는 스켈레톤 워로드와 설전을 벌이던 진태경이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긴 해요. 몇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네임드 몬스터가 몇 달 사이 두 놈이나 튀어나오질 않나.”
“올해 게이트 사고도 급증했습니다. 물어뜯기 좋아하는 언론은 길드와 개인의 부주의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글쎄요. 국제 게이트 연구소의 견해는 정반대라서요.”
최민우가 진태경에게 건넨 태블릿 PC 화면에는 굵직한 폰트로 [게이트 마력 급증 조사 결과]라고 적혀 있었다.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이미 기정사실입니다. 상당수의 게이트에서 마력 분포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더군요.”
“그게 최근 잇따른 게이트 사고의 진짜 원인이다?”
“네.”
마력은 몬스터가 가진 힘의 원천. 게이트 내부의 마력 분포도가 증가한다면 몬스터도 강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증거가 제 손에 있네요.”
진태경의 말에 최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켈레톤 워로드. 며칠 전 진태경에게 들은 바로 이 네임드 몬스터는 ‘진화’했다.
그것은 워로드 본인조차 그 이유를 모를 정도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이번에 나타난 리치도 그와 같은 힘의 성장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어요. 그런데…….”
진태경이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개빡세겠는데.”
“그래서 충분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제가 이번 사태에 대해 입수한 몇 가지 자료에 따르면…….”
“자료는 나중에 볼게요.”
“예?”
“제가 지금은 좀, 밀린 일이 많아서.”
“밀린 일이요? 지금 말입니까?”
그들이 탑승한 보잉 747-8 VIP는 2만 5천 피트 상공을 날아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무슨 밀린 일을 처리한단 말인가?
이어 들려온 진태경의 대답은 최민우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잠 좀 자려고요.”
“……잠이요? 이 시국에 잠이 옵니까?”
“요새 통 잠을 못 자서.”
“자, 잠깐만요.”
“절대 깨우지 마세요. 지금은 이게 답이니까.”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말릴 새도 없이 항공기 내부에 마련된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는 진태경의 모습에 최민우는 입을 딱 벌렸다.
“아, 맞다. 최 팀장님.”
머리만 쏙 내민 진태경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불 좀 꺼 주세요.”
“…….”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새근새근 잠든 진태경을 보며 최민우는 생각했다.
‘이익 배분은 무조건 9대 1이다.’
* * *
띠링.
– [로그인]을 완료했습니다.
익숙한 알림. 푹신한 베개와 매트리스 대신 목침(木枕)과 침상의 딱딱함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무림맹 전각의 천장이 보인다.
‘돌아왔구나.’
자그마치 한 달 만의 귀환이다. 무림에서는 고작 두 시진도 흐르지 않았겠지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깊은 잠에 빠진 자그마한 체구의 노인이 보였다.
창밖으로 스며든 햇살이 얼굴을 내리쬠에도 그, 화왕 적천강은 미동조차 없었다.
“저 왔습니다, 노야.”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 순간이었다.
“오, 음. 아.”
“…….”
“거기. 좋아요. 예아.”
나는 방 한구석에서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혁무진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분명히 로그인 전에 경비를 맡긴 것 같은데.’
이 미친놈은 경비를 서라니까 몽정을 하고 있네.
이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태원진가 단톡방에 공유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다.
대신 엉덩이를 걷어차 줄 수는 있지.
빡!
“억!”
“일어나, 이 도쿄핫 같은 새끼야.”
고통과 함께 흐뭇한 잠에서 깨어난 혁무진이 벌떡 일어났다.
“조장님, 기침하셨습니까!”
“응. 너도 막 기침한 것 같은데.”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던 혁무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그게. 사정이 있어서.”
“…….”
사정이 있었던 거야, 할 뻔한 거야.
혁무진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전부 이 자식을 믿은 내 잘못이다.
“후우, 언제부터 잤어?”
“얼마 안 잤습니다. 진짭니다.”
“그럼 네가 깨어 있는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고?”
“예. 두 시진 전까지는 개미 한 마리 못 들어오도록 막고 있었습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두 시진 전이면 내가 막 잠들었을 때 아니냐?”
“그게, 그러네요. 하지만 진짜 얼마 안 잤습니다.”
“그렇지. 두 시진이면 얼마 안 잔 건 맞지.”
“예, 예.”
“우리 무진이가 나를 호위하러 꿈속까지 따라왔구나?”
혁무진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 태원진가의 진룡대 부대주 혁무진! 조장님께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이고, 기특하기도 하지.”
나는 허허 웃으며 침상 옆에 놓인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럼 꿈속에서 날 호위하는데 왜 그런 오묘한 신음을 낸 걸까.”
“헉.”
“도대체 누굴 만난 거니. 홍화루의 미미? 도쿄루의 키라라? 아니면 순두부집 효녀?”
내가 아주 그냥. 저 자식을 보면 울화통이 터지고 가슴이 답답해서 못 참겠다.
화병을 높이 들어 올리자 혁무진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하, 한 번만 봐주십쇼.”
“지금까지 오백 번은 봐줬다.”
“그럼 오백 번 봐주신 김에 한 번만 더…….”
“딱 대.”
후웅!
그 순간,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첫 번째는 내 손에 들려 있던 화병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간 것. 두 번째는 화병이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숙인 혁무진의 정수리를 스쳐 문으로 날아간 것.
세 번째는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온 것.
“적 대협의 상태는 어떠…….”
빡!
한 손에 작은 보자기를 든 땅딸막한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힘이 풀린 눈동자로 나와 혁무진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몇 번 달싹거리더니 그대로 스르륵 무너졌다.
털썩, 쿵!
정확히 노인의 이마를 가격한 화병이 뒹굴고, 그가 들고 있던 보자기에서 각종 침이며 의술 도구들이 촤르륵 쏟아졌다.
“……!”
“……!”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적천강의 상태를 살피러 온 낙양괴의(洛陽怪醫)는 그렇게 뇌진탕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