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310
#309화
버뮤다 삼각지대와 함께 낙양을 떠난 지도 벌써 사흘 째.
나는 문득 입을 열었다.
“무진아.”
“허억, 허억. 예?”
냇가 근처 바위에 엎어져 있던 혁무진은 거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지난 일 년 사이 장족의 발전을 이루기는 했으나, 개인이 지닌 공력과 무공이 금세 한계를 드러낸 탓이다.
‘궁기방, 저 녀석도 나름 잘 쫓아오고 있긴 하지만 부족하고.’
궁기방은 개방의 후개답게 후기지수 중에서는 손에 꼽는 신법의 소유자였지만, 나와 청풍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속도로는 개방 제일의 경신법이라는 만리추풍신법(萬里追風身法)을 익히면 뭐하나. 그래 봤자 오성의 경지인데.
“궁기방.”
“후욱, 왜 불렀나?”
거친 숨소리.
그나마 혁무진보다는 상태가 낫지만 이 녀석도 힘들어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놈은…….
“은인, 만두 드실래요?”
“너나 많이 드세요.”
“저는 오면서 많이 먹었어요. 배불러요.”
“그럼 똥 싸고 드세요.”
“와! 그런 방법이!”
“…….”
역시 청풍.
경신법을 발휘하는 틈틈이 배부르게 만두를 처먹을 정도로 여유가 넘치는 걸 보니 역시 괴물은 괴물이다.
뭐, 적천강을 지게에 매고도 청풍과 비슷한 상태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사람을 보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음. 이대로라면 곤란한데.’
하남에서 섬서를 지나 사천까지.
수천 리에 달하는 거리라 말을 이용해도 족히 한 달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이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허억, 조장님. 왜 부르신 건데요?”
“아, 별건 아니고.”
나는 혁무진을 향해 물었다.
“지난번에 내가 맡긴 거, 잘 갖고 있냐?”
“맡기다니, 어떤 거요?”
“쇠사슬.”
“그게 무슨…… 아, 예전에 주렁주렁 달고 계시던 그거요?”
“응.”
무려 열화문에서 특별 제작한 만년한철 쇠사슬.
나는 성라대연이 시작되기 직전 철구와 함께 쇠사슬을 풀었고, 재질이 만년한철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혁무진은 잽싸게 그걸 챙겼었다.
“가져왔지?”
눈치 하나는 백 단인 녀석이다.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은 혁무진이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며 대답했다.
“아뇨. 따로 맡겨 뒀는데요.”
“그래?”
“예.”
“그럼 이렇게 하자. 만약에 뒤져서 나오면 너도 뒤지는 걸로.”
“아차차, 내 정신 봐라. 다시 생각해 보니까 챙겨 왔네요.”
철그럭.
혁무진은 그제야 상의 안에 둘둘 감아 둔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만년한철은 이루 말할 데 없이 단단하고 가벼운 재질. 저런 식으로 몸에 묶어서 갑옷 대용처럼 쓴 모양이었다.
이처럼 임시 갑옷으로도,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는 데다가 그 자체로도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귀물(貴物)이 바로 만년한철이다.
그래서인지 쇠사슬을 내게 건네주는 혁무진의 눈동자에서는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이거 저 쓰라고 주신 거 아니었습니까? 나중에 무기 만들려고 아껴 뒀던 건데…….”
“내가 챙기라고 했지, 가지라고 했냐?”
“아니, 줬다 뺏는 게 어딨습니까.”
“나도 빌린 거다. 이거 열화문 물건이야. 노야가 나중에 깨어났을 때 네가 이걸 갖고 있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발 가져가 주십쇼. 제 눈에 띄지도 않게 꽁꽁 숨겨 주세요.”
“그래, 잘 생각했다. 기방아!”
쇠사슬을 집어 든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의 궁기방까지 불러 작업에 착수했다.
이게 뭔가, 하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두 녀석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지?”
촤르륵.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보고도 몰라? 쇠사슬로 매듭 묶잖아.”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제 허리에 감으시는…….”
“잠깐만. 이거 풀어라.”
“자, 끝.”
뿌듯한 마음으로 노동의 결과물을 바라봤다.
혁무진과 궁기방, 마지막으로 나까지. 우리 셋은 마치 쇠사슬로 굴비 엮듯이 묶인 상태였다.
“다들 푹 쉬었지?”
“푹 쉬긴 뭘 쉬어요. 일각도 안 됐는데.”
“당장 풀어라!”
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단전이 들끓으며 자그마치 구십 년에 달하는 공력이 다리를 향해 몰려들었다.
“자, 이제 뛰자.”
쐐애애애액!
“으허어어억! 이런 미친!”
“조장이 미쳤다! 조장이 날 죽이려고 한다!”
나와 연결된 궁기방과 혁무진은 꼬리에 불붙은 맷돼지처럼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 소리에 근처 풀숲에서 엉덩이를 까고 볼일을 보고 있던 청풍이 후다닥 튀어나오며 뒤를 따랐다.
“은인! 저도 같이 가요!”
“…….”
저 새끼 싸고 안 닦은 것 같은데. 아냐, 닦았겠지.
나는 막 떠오른 생각을 애써 부정하며 신법을 펼쳤다.
스쳐 가는 주위 풍경만큼이나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우리는 이틀 만에 하남과 섬서의 경계에 도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 * *
저벅. 저벅.
흐트러진 오와 열. 지친 얼굴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수십 여 명의 사람들은 모두 표국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병장기를 찬 표사들도, 두꺼운 옷을 걸친 채 말과 수레를 모는 쟁자수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
그것은 비단 넉 달 동안의 상행(商行) 때문만이 아니었다.
“화란(和蘭)아.”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에 은은하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옆을 향했다. 이내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씀하세요, 허 숙부.”
“그게 말이다.”
조용히 선두로 다가온 이는 턱수염이 희끗희끗한 중년인이었다. 머뭇거리던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석 표두가 숨을 거두었다.”
“……!”
말 안장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던 가녀린 신형이 덜컥 굳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잠시 후였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독이 골수에까지 미쳐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미안하구나.”
“숙부께서 사죄하실 일이 아니에요. 석 오라버니, 아니 석 표두의 죽음은 제 잘못입니다.”
주화란(周和蘭)은 면사 아래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맞다. 모두가 자신이 부덕했던 탓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남매처럼 자랐던 석 표두의 죽음도, 그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서른두 사람의 죽음도 자신의 그릇된 판단이 불러온 것이었다.
‘아버지.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주화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빛 하늘. 총총히 박힌 별무리 위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 년 전, 연공 도중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 주호군이었다.
‘이리 아름답고 뛰어난 재녀(才女)를 자식으로 두었으니, 이 아비는 더 바랄 것이 없다. 하하!’
주호군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양자라도 들여 후사를 이으려 했겠지만, 그는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난 외동딸을 사랑했고 늘 자랑거리로 삼았다.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오직 너뿐이다. 용봉표국(龍鳳驃國)의 지난 오십 년은, 앞으로 네가 이룰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다.’
주호군의 딸 사랑이 지극하다는 것은 섬서 땅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주화란이 성장할수록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그가 단순한 팔불출이 아니었음을.
약관이 되기도 전에 표국의 장부를 꿰뚫어 볼 정도로 명석한 두뇌와 강북삼화(江北三華)로 불릴 만큼 뛰어난 용모.
거기에 더해 정파 무림 제일의 후기지수라는 십봉룡(十鳳龍)에 꼽힐 만큼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가 바로 그녀, 주화란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주화란은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삼켰다.
지금,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쓰러진 아버지를 대신하여 용봉표국을 이끌기 시작한 지 고작 이 년 만의 일이었다.
“화란아, 괜찮으냐?”
그나마 남은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람이다.
주화란의 조부와 아버지가 인과 덕으로 쌓아 올린 오십 년의 세월이 그녀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걱정을 담아 말을 건네는 총 표두 허준에게 주화란은 애써 웃어 보였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허 숙부.”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허준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화란의 나이 이제 겨우 스물하나.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그녀이지만 마음까지 단단해지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그러나 심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지금, 그로서는 그저 주화란을 지켜봐 주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런 허준의 마음을 모를 주화란이 아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가 말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야숙 하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좋은 생각이다.”
“그리고…… 장례 준비도요.”
이번 표행의 서른세 번째 희생자. 주화란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석 표두를 보내야 할 시간이다.
소금을 구해 온다면 시신의 부패를 늦출 수 있겠으나, 모든 표행이 완료된 시점이면 그의 몸에 남아 있는 독이 살과 뼈를 한 줌 혈수로 만들어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알았으니 잠시 쉬고 있거라.”
“모두가 애쓰고 있는데 제가 쉴 수 있나요. 걱정 마시고 가 보세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허준이 수신호를 보내자 곧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직 한기가 남아 있지만 야숙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너른 땅. 주화란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여 체력을 보충하고 내일 아침 일찍 산을 넘을 생각이었다.
‘거의 다 왔어.’
주화란의 시선이 어둠에 잠긴 산을 응시했다.
돌이 검어 흑석산(黑石山)이라 불리는 저 산을 넘으면 이번 표행도 막바지에 접어든다.
비록 수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번 표행이 성공한다면 용봉표국은 한숨 돌릴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이제 종남산까지는 칠 주야. 넉넉하지는 않아도 흑석산만 무사히 넘으면 시간은 충분해.’
문제는…… 과연 저 흑석산의 주인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였다.
흑석채(黑石砦)는 녹림맹에 속한 수많은 산채 중에서도 십팔채(十八砦)라 불릴 만큼 강한 산채였고 흑석채의 채주는 한 자루의 부를 귀신같이 다루기로 유명한 절정 고수였다.
긴 여정으로 지친 용봉표국이 흑석채와 격돌한다면 지금까지 입은 것 이상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부디 아무 일도 없기를.’
주화란이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돌린 바로 그때였다.
바스락.
귓가를 파고드는 미세한 소음. 마른 잎사귀를 밟는 그 소리는 들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순간 주화란의 머릿속에 붉은 경종이 울렸다.
‘적!’
스르릉!
주화란은 허리춤에 찬 연검(柔劍)을 뽑으며 벼락처럼 외쳤다.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이 어둠을 타고 울려 퍼졌다.
주화란과 거의 동시에 상황을 눈치챈 총 표두 허준이 표사들을 이끌고 그녀의 곁을 둘러쌌다.
“소국주를 지켜라!”
“옛!”
차차창!
예리하게 날 선 병장기들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오십여 장 너머의 풀숲이 들썩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했더니, 용봉표국의 용맹한 표사님들이셨구먼.”
팔척장신의 거한. 등에 거대한 도끼를 짊어진 그를 본 허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천력부(天力斧)…….”
“오, 허 형 아니오? 요새 어린 년 밑 닦아 주느라 정신없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이자가 감히!”
딱딱하게 굳은 허준의 옆으로 유려한 신형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마침 잘됐군요. 통행료를 드리려던 참인데.”
“글쎄.”
씩 웃은 천력부가 도끼를 흔들었다.
“우선 물건부터 보고 얘기하자고.”
스스스슥!
그의 도끼 뒤로, 수백의 녹림도가 모습을 드러냈다.